제59화 이름을 부르는 소리
하늘에 박힌 거대한 검은 달이 피눈물 같은 붉은빛을 토해내며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칠흑 같은 장막이 찢어지듯 수많은 균열이 가고, 그 틈새로 감당할 수 없는 중력의 파문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흑월문 본단의 제단, 모든 계약의 서판이 쌓여 있던 거대한 탑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서무현은 그 폭풍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흑천월식검은 이미 본래의 형상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검신은 칠흑 같은 어둠 대신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고 시린 백색의 광휘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빛이자 소멸이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던 계약의 서판을 스스로의 검으로 베어내는 행위였다.
바스스, 소리를 내며 무현의 어깨 위로 흩어지는 빛의 입자들이 있었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다. 스승 서문 월청의 서늘했던 눈빛도, 십 년 전 불타던 청월장의 붉은 화마도, 차가운 눈발이 날리던 설원의 풍경도 하나둘씩 그의 머릿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빛을 삼키는 검의 대가로, 너는 네가 누구인지 잊으리라.’
오래전, 그 이름 없는 계약의 목소리가 영혼의 기저에서 울렸다.
무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손끝부터 시작된 백색의 용해는 이미 팔목을 지나 어깨와 가슴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제 실체라 부를 수 없었다. 형체는 희미해졌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한 자루의 검과, 스러져 가는 한 줄기 흩날리는 빛가루뿐이었다.
하지만 무현은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니, 떨어뜨릴 손가락조차 이미 빛으로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
눈을 감으려 하자, 문득 밀려오는 거대한 공포가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잊혀진다는 것.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존재했던 모든 시간들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지워진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완전한 무(無)로의 회귀였다.
“오라버니!”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월소연은 제단 아래의 돌바닥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악을 썼다. 손톱이 깨져 피가 흘러내리고, 무릎이 짓이겨져 살점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소연의 등 뒤에서 월소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그의 두 손은 칠흑 대검을 쥐느라 피투성이였고, 몸은 수차례의 격전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소한 역시 무릎을 꿇은 채, 눈이 멀 것처럼 부서지는 빛의 형체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서무현! 당장 눈을 떠! 네가, 네가 어떻게 우리를 두고 사라져!”
소한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십 년 전, 그 눈먼 횃불을 들어 장원을 불태웠던 죄책감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언제나 그 무뚝뚝한 의오라비였다. 이름 없는 검객, 삿갓 아래 숨겨진 화상 흉터, 그리고 언제나 자신들의 앞에 서서 칼을 뽑던 그 등짝.
소한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줬잖아! 내 죄를 씻어준 게 너인데, 네가 없으면 나는 누구로 살아가야 돼! 서무현!”
소연이 그의 뒤를 이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라버니! 가지 마! 제발, 제발 내 이름을 불러줘…… 내가 기억할게! 네가 누구였는지,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그 낡은 객잔의 비 오는 소리까지 전부 내가 기억할 테니까!”
소연의 손이 허공을 덧없이 휘저었다.
붙잡으려 할수록 무현의 몸은 바람에 흩날리는 재처럼 더 빠르게 부서져 내렸다. 백색의 광휘는 이제 그의 목덜미와 뺨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쩌렁한 호령과 함께 남궁설이 봉명사를 허공에 뿌려내렸다.
수천 가닥의 은실이 허공을 얽어매며 소멸하는 무현의 형체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계약의 힘은 은실마저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만큼 거세었다. 남궁설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목청을 높였다.
“검객! 네가 강호를 구했어! 네가 계약을 끊었다고! 그러니 네가 네 이름을 잊게 둘 줄 알아? 정신 차려, 이 바보 같은 검객!”
그 뒤를 이어 백초가 지팡이를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의원의 늙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네 놈의 맥을 짚고 치료비를 청구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빚을 떼먹고 도망가려고 작정했어? 일어나라, 이 녀석아! 내가 네게 준 약값 아직 다 못 받았단 말이다!”
강호의 끝에서 모여든 동맹들, 당문의 후예들과 소림의 고수들, 남해의 무리들까지 일제히 제단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칼을 거두고, 두 손을 모으거나 주먹을 쥔 채 외쳤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들의 목소리가 거대한 합창이 되어 하늘의 검은 달을 때렸다.
“서무현!”
“서무현!”
“이름 없는 검객이여, 눈을 떠라!”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무현의 귓가를 두드렸다.
사라져 가던 의식이 그 소리에 번쩍이며 흔들렸다.
기억하는 자가 있는 한, 이름은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
어두운 무의식의 바다를 떠돌던 무현의 영혼 속에서, 오래전 잊혔던 한 마디가 귓가를 스쳤다.
‘무현아.’
따스한 손길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설원의 풍경. 그곳에 서 있던 여인의 미소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어머니 설야였다.
갓난아기였던 자신을 품에 안고, 차가운 눈바람 속에서 그녀가 속삭였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은 이 이름을 빚이라 부르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달에게 바친 대가라고. 하지만 기억하거라, 내 아들아.’
여인의 손이 무현의 볼을 쓸어내렸다.
‘이름은 빚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너를 기억하고, 네가 세상을 사랑했던 흔적이야. 그러니 그것은 가장 귀한 선물이란다.’
빛 속에서 무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빚이 아니었다.
자신을 옭아매던 계약의 사슬은, 사실 세상이 자신에게 건네준 온기였다. 남들이 기억해 주는 한, 자신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아니라 서로를 잇는 끈이었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네가 나를 기억한다면…….’
무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마음의 울림이 백색의 광휘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르릉-!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달이 견딜 수 없는 과부하에 걸린 듯 발작적으로 진동했다.
계약의 서판은 이미 백지로 변해 흩날리고 있었다. '이름을 먹는 달'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타오르는 이름의 온기를 소화할 수 없었다. 잊혀야만 유지되던 계약이었거늘, 모두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는 순간, 계약의 규칙 자체가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아악-!
하늘의 검은 달 속에서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계약의 주인이자, 강호의 모든 비극을 잉태했던 어둠의 의지가 지르는 마지막 비명이기도 했다.
빠직, 파지지직-!
거대한 검은 달의 표면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마침내 중심부터 가차 없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칠흑의 파편들이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둠이 걷힌 자리에,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순수하고 찬란한 '하얀 달'의 빛이 강호의 밤하늘을 비추었다.
암흑에 잠겨 있던 비 오는 객잔의 지붕도, 흑월문의 무너진 제단도, 핏빛으로 물들었던 강호의 대지도 모두 시린 은빛 월광 아래 그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 위.
무현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색의 광휘가 정점에 달했다가, 거짓말처럼 툭 하고 끊어졌다.
더 이상 빛은 없었다.
소멸의 파문도 멈췄다.
“……!”
소연이 숨을 멈춘 채 제단 위로 달려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완전히 흩어져 바람에 날아갔어야 할 그 자리에, 낡은 삿갓 하나와 해진 검집, 그리고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의 형체가 남아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떨리는 손으로 그 형체를 뒤집었다.
화상 흉터가 남은 얼굴. 차갑게 식어 있던 호흡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함께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깜빡이더니, 칠흑 같이 어두운 눈동자가 소연의 얼굴을 담아냈다.
무현이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비가, 그쳤나.”
소연의 눈에서 터진 눈물이 무현의 뺨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소한이 그 뒤를 따라 올라와 두 사람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들의 등 뒤로, 마침내 구름이 걷힌 밤하늘 위에서 하얗고 맑은 달이 온 세상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밤하늘을 뒤덮던 칠흑의 달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 자리에, 서늘하면서도 온화한 은빛 월광이 쏟아져 내렸다.
흑월문 본단의 무너진 제단 위, 소연의 품에 안겨 겨우 숨을 몰아쉬던 무현의 눈동자에 밤하늘의 풍경이 희미하게 담겼다. 그토록 무겁게 짓누르던 계약의 서판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것은 쇳덩이 같은 빚의 잔재가 아니라, 밤기운에 씻긴 맑은 흙냄새와 풀잎의 향기뿐이었다.
“오라버니…… 진짜 살아 있는 거야? 정말로…… 돌아온 거야?”
소연은 무현의 뺨을 감싸 쥔 손을 거두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하얀 빛으로 녹아내리며 세상에서 지워지던 그 손끝이, 지금은 온기를 품은 채 자신의 손바닥을 마주 잡고 있었다.
무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아득한 공백은 사라져 있었다. 스승 서문 월청의 잔잔했던 미소, 불타던 장원의 붉은 화마, 설원의 차가운 눈발,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던 동맹들의 목소리까지. 흩어졌던 조각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하나의 거대한 기억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 빼앗긴 빚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과 나누었던 삶의 흔적들이었다.
“……그래.”
무현의 입술 사이로 아주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한마디에 소연은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소한은 두 사람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무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거친 호흡 속에서 전해지는 안도감은 그 어떤 맹세보다 무겁고 진했다.
제단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무림맹의 무리들과 문파의 고수들도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남궁설은 허공에 흩어졌던 봉명사를 거두며 주저앉듯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거 원, 사람을 이렇게까지 진 빼게 만들 줄이야…… 저 검객 녀석, 나중에 살아나면 정말 치료비라도 톡톡히 받아내야겠어.”
백초가 지팡이를 짚으며 헛기침을 했다. 늙은 의원의 눈가도 잔뜩 젖어 있었지만, 입꼬리는 씰룩이며 올라가고 있었다.
강호의 끝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 이상 칼을 뽑지 않았다. 검은 달의 지배가 끝나고 진짜 밤이 찾아온 대지 위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안도의 탄식이 나뭇잎 스치는 소리처럼 번져 나갔다. 묵은 앙금이 씻겨 내려가는 평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사흘 뒤.
흑월문의 잔해가 모두 치워진 본단 터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나른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청월장의 낡은 깃발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무현은 그늘진 처마 아래에 앉아 허름한 검집을 무릎에 올려둔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삿갓은 옆에 곱게 놓여 있었다. 더 이상 얼굴의 흉터를 가릴 필요는 없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의 오랜 동반자였다.
“오라버니.”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소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사발이 들려 있었다. 소연은 무현의 옆에 나란히 앉으며 사발을 건넸다.
무현이 눈을 뜨고 사발을 받아 들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비쳤다.
소연은 멀리 훈련장에서 소한과 함께 칼을 맞추고 있는 무림맹의 젊은 무사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현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름을 되찾았고, 빚은 사라졌으며, 강호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무현이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무현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키며 대답했다.
“글쎄.”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잔잔한 바람이 스쳤다.
십 년 전 불타던 장원에서 멈춰 있던 시간은 이제 흐르기 시작했다. 빚을 받기 위해 흑월문에 발을 들였던 그날 밤의 객잔으로 돌아갈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무현은 사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구름이 완전히 걷힌 푸른 하늘 위에서 따스한 햇살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더 이상 검은 달은 없었다.
오직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발소리만이 강호의 진짜 이름처럼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