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검은 달의 검객
1. 일 년 뒤, 재건된 청월장
봄비가 세차게 대지를 적시던 날이 지나고, 청월장(靑月莊)의 기와지붕 위로는 은은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십 년 전 그 참혹한 화마(火魔)가 삼켰던 자리에는 놀랍도록 정갈하고 튼튼한 목책과 전각들이 다시 들어서 있었다. 과거 핏빛 흑월의 기운이 음산하게 짓누르던 공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마당귀에 심어진 매화나무에서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이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청월(靑月).’
정문 현판에 새로 새겨진 푸른 달의 각인은 더 이상 저주나 빚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둠을 견뎌낸 이들이 마주한 비 그친 밤하늘의 청명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마당 한켠에는 굵직한 통나무를 다듬는 목수들의 망치질 소리가 탕탕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옆으로 무림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강호의 도처에서 모여든 의협객들이 오고 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이름을 잃을지 모른다’는 해묵은 공포나 공허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며 웃었다. 장부가 불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저마다의 기억과 타인이 건네는 온기만이 온전한 증거로 남았다.
그중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낡은 삿갓은 머리 위에 쓰이지 않고 옆모서리에 툭 걸쳐져 있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흑발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는 희미한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더 이상 벼려진 칼날처럼 차갑지 않았다. 마치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고 아득했다.
서무현.
그가 손에 든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맑고 푸른 하늘과 떠가는 구름이 일렁였다.
"오라버니, 차 식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2. 장주가 된 소연과 속죄의 묘지기
푸른색 검협(劍俠)의 복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월소연이 손에 작은 서류 묶음을 들고 걸어왔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맑은 금빛 명인(名刃)이 꽂혀 있었지만, 그 칼끝은 살기를 품기보다 타인을 지키는 호국의 빛을 머금은 듯 은은했다.
소연은 이제 청월장의 정식 장주였다.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울부짖던 어린 소녀는 이제 거친 강호의 풍파를 정면으로 돌파해 스스로의 힘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여장부로 성장해 있었다.
"무림맹에서 자네들의 협조에 대한 사절단이 떠났다고 합니다. 남궁설 양도 이번 일로 집법당의 전권을 위임받아 당분간 북방과 중원을 잇는 치안을 정돈할 거라더군요."
소연이 무현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장주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번거롭고 서류가 많았다.
"소한이는?"
무현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채워졌다.
"뒷산에 갔습니다. 십 년 전 그날...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헛된 횃불을 들었던 이들의 유골을 수습해 작은 비석을 세웠더군요. 매일 아침 거기에 올라가 잡초를 뽑고 칼을 닦는답니다. 자청해서 묘지기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래."
무현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월소한은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과오의 무거움을 평생 품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벌을 받기 위한 속죄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속죄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한의 이름은 더 이상 짓밟히지 않고, 오직 진실한 기억 속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소연이 불쑥 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무현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무엇을?"
"다시 이름을 찾고, 빚도 계약도 모두 사라진 이 평화로운 강호에서... 예전처럼 홀로 떠돌지 않는 삶을 말입니다."
무현은 피식 웃으며 빈 찻잔을 채웠다.
"떠돌던 시절엔 빚을 갚기 위해 걸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떻게요?"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굳이 떠돌지 않아도,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올 곳이 생겼잖느냐."
소연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툴툴거리듯 서류 묶음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말은 잘 하셔요. 언제 또 삿갓 눌러쓰고 사라질지 몰라 늘 감시해야 합니다."
3. 강호의 이름들이 돌아온다
청월장 밖, 중원의 강호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 깊은 안정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흑월문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검은 달의 계약이라는 거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무명병(無名病)을 앓던 이들은 점차 기억을 되찾았다. 타인이 불러주는 이름, 잊혀지지 않기 위해 나누던 따스한 눈빛들이 모여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했다.
더 이상 밤하늘에 핏빛 월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림맹주 남궁청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으나, 남궁설을 비롯한 신진 고수들과 각 문파의 장로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무공은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방패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백초는 의원을 떠나 전국을 돌며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상처를 보살폈고, 마교와 소림, 당문 역시 각자의 영역에서 평화를 유지했다.
강호는 비로소 비가 그친 뒤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름을 빼앗기지 않고, 누구도 영원한 빚쟁이로 살아가지 않는 세상. 그것이 무현과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낸 답이었다.
4. 비 그친 밤, 낡은 객잔
시간은 흘러 계절이 몇 번 바뀐 뒤였다.
어두운 밤, 대지에 가득 고인 안개를 뚫고 가늘게 비가 내렸다.
시골길의 어귀, 허름하고 낡은 객잔 하나가 붉은 등불을 처마 끝에 매단 채 흐릿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현판, 그리고 그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의 냄새.
그것은 1년 전, 아니 어쩌면 십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기묘한 시공간의 일치를 풍기고 있었다.
객잔 안은 한산했다.
구석진 자리에 놓인 둥근 나무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가 담긴 투박한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깊게 눌러쓴 삿갓, 얼굴 반쪽을 가린 희미한 화상 흉터, 그리고 낡은 검집이 비스듬히 놓인 의자.
그 모습은 마치 1화의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홀로 빚을 찾아 흑월문에 발을 들였던, 이름을 버린 검객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짓누르는 계약의 무게도, 서늘한 복수심도 없었다.
사발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따뜻했고, 창밖의 밤은 두렵지 않았다.
사내가 손을 뻗어 사발을 감싸쥐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생생했다.
"객주, 여기 차가 식었소."
낮고 편안한 음성이 객잔 안의 침묵을 깨웠다.
주방 쪽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나이든 주모가 허리를 펴고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고, 손님.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디 멀리 가시게요?"
"아니, 그냥. 잠시 들렀다 가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객부(客簿)에 적어두려 하니."
사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흉터가 드러났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숨어들지 않았다.
"서무현(徐武賢)."
자신의 이름을 입 밖에 내어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벅찬 일임을, 그는 이제야 온전히 알고 있었다.
5. 삿갓 쓴 사내가 식은 차를 마신다
무현은 사발을 입가에 대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입안 가득 퍼지는 쌉싸름하면서도 달달한 차의 여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창밖의 비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오랫동안 숨어 있던 밤하늘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득, 객잔의 낡은 나무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스으으—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빗방울을 머금은 은은한 매화 향기가 객잔 안으로 밀려들었다.
무현은 마시던 사발을 내려놓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6. 소연이 들어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비옷을 가볍게 두르고 삿갓을 벗어든 늘씬한 체구의 여인이 문간에 서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살짝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하늘의 별보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월소연이었다.
그녀는 객잔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하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찾았네."
소연은 성큼성큼 걸어와 무현의 맞은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녀는 주모를 향해 손을 들어 차 한 사발을 더 청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후미진 객잔까지 혼자 찾아오십니까?"
"바람이 불어서."
"핑계는."
소연이 턱을 괴고 무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장주의 무거운 책임감도, 복수의 서늘함도 없었다. 오직 오랜 세월을 돌아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이의 편안한 안도만이 가득했다.
외풍이 불어와 객잔의 붉은 등불이 크게 흔들렸다.
창밖의 먹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있었다.
그 밤, 구름 뒤에 가려져 있던 하늘의 달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세상을 삼킬 듯 핏빛으로 물들거나 모든 빛을 집어삼키던 '검은 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떠오른 것은...
유리알처럼 맑고, 눈이 시리도록 순수한 하얀 달이었다.
달빛이 객잔의 낡은 창살을 통과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금빛 환영도, 빚을 재촉하는 장부도 없는 세상의 빛이었다.
소연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무현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마시다 만 찻잔을 가볍게 제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사발의 온기를 느끼며 사내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며 말했다.
"가시지요, 무현 오라버니."
무현은 삿갓을 완전히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 옅고도 깊은 미소가 걸렸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 갠 후의 촉촉한 길 위로 길게 늘어졌다.
이름은 빚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이 그에게 준 가장 찬란한 선물이었고, 그들은 이제 그 선물을 품고 새로운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비 그친 밤,
세계는 온전한 평화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 <검은 달의 검객> 제60화 (완) —
객잔을 나선 두 사람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이 완전히 걷히자, 비 갠 대지 위로 쏟아지는 하얀 달빛은 온 세상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웅덩이마다 고인 빗물 속에는 밤하늘의 청명함과 두 사람의 나란한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겼다.
"오라버니."
소연이 앞서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옷자락에서 은은한 매화 향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느냐."
"정말... 다 끝난 거겠지요?"
무현은 잠시 멈춰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심장을 조여오는 검은 핏빛의 기운도, 잊혀져간다는 공포에 영혼이 갉아먹히는 서늘함도 없었다. 바람은 서늘하면서도 포근했고, 가슴속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방의 문을 활짝 연 것처럼 탁 트여 있었다.
"그래. 끝났다."
무현이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지."
소연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툭 털어내듯 가볍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정해진 목적지가 아니었다.
과거처럼 빚을 갚기 위해 쫓기듯 걷는 길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칼을 뽑아야 하는 살수의 길도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발걸음이자, 서로의 이름을 온전히 기억하며 함께 살아갈 날들을 향한 여정이었다.
청월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멀리 동쪽 하늘의 경계가 옅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밤의 끝자락이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여명이었다.
뒷산의 작은 묘지에서는 새벽을 여는 바람 소리에 맞춰 소한이 정성껏 닦아낸 비석들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 잠든 이들도, 살아남아 속죄의 길을 걷는 이들도, 모두 저마다의 이름을 되찾은 채 평온한 잠과 숨을 누리고 있었다.
무림맹의 새 판을 짜기 위해 밤낮으로 서류를 검토할 남궁설의 투덜거림이 선하게 그려졌고, 전국을 떠돌며 아픈 이들의 이름을 불러줄 백초의 투박한 발걸음도 눈에 선했다.
세계는 비가 그친 뒤의 고요 속에서 저마다의 온기를 품은 채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무현은 문득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살짝 짚어 보았다.
심장이 규칙적이고 건강하게 뛰고 있었다. 타인이 기억해 주는 온기로 가득 찬 그곳은 더 이상 빚을 짊어진 장부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들이 새겨진 서판이었다.
"오라버니, 빨리 오십시오! 이러다 해 뜹니다!"
앞서 가던 소연이 뒤를 돌아보며 낭랑하게 외쳤다.
무현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삿갓을 고쳐 쓰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비 그친 밤,
세계는 온전한 평화 속에서 깊고 따스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검은 달의 검객> 본편 완 —
마지막 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