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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56화목차

제56화 <설야>

빛이 사그라드는 자리에 남은 것은 밤의 적막이 아니었다.

지독할 정도로 하얗고 차가운, 모든 감각을 동결시키는 정화(淨化)의 서리였다. 무림맹의 본진을 뒤덮고 있던 어두운 혈기(血氣)와 흑월의 검은 기운은 그 하얀 빛 앞에서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사방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대기 속에서, 얼어붙은 대지 위로 부서진 월륜(月輪)의 잔해만이 은백색 인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마지막 여파가 멀리 떨어진 전각의 지붕을 박살 내며 무너져 내렸지만, 그 소리는 지독하게 아득하게 들렸다. 서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바닥에 짚었다. 손아귀가 찢어져 흘러내린 피가 백색의 서리 위에 툭툭 떨어져 붉은 매화꽃을 피웠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얼음 관이 부서진 자리였다.

거기에 여인이 있었다.

십 년 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잠들어 있던 무녀. 설원(雪原)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닮은 은빛 머리칼과, 세상의 모든 빛을 거부하듯 투명한 피부를 가진 여인.

설야(雪野).

서무현, 그의 생모이기도 한 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무현의 입술 사이로 비명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통증은 신체적인 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뿌리가 흔들리는 듯한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설야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밤하늘에 떠 있어야 할 달이 지워진 것처럼, 그 눈동자 속에는 빛도, 감정도, 과거도,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자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껍데기. 검은 달의 계약에 모든 이름을 저당 잡힌 채, 단지 육신만 깨어난 망령(亡靈)에 가까운 상태였다.

"……."

설야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무현에게 닿았다.

무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뻔했다. 저 눈빛. 십 년 전, 청월장의 장원이 불타던 날 밤 보았던 그 차갑고도 거대한 공허함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

무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한마디는 비틀린 강호의 역사 속에서 짓밟힌 이름 없는 검객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단어였다.

그러나 설야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설야……!"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무림맹주 남궁청.

그의 몸은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다. 정화의 빛에 직격당한 가슴팍은 흉측하게 파여 있었고, 흑천월식검의 여파로 전신경맥이 끊어져 검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조차 없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모았던 열두 권의 '이름 장부'가 그의 부서진 육신을 억지로 꿰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청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미쳐 있었다. 야망과 광기, 그리고 그 밑바닥에 도사린 집념이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설야…… 마침내, 마침내 네가 깨어났구나……!"

남궁청의 목소리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현을 거들러 보지도 않았다. 오직 눈앞에 서 있는 텅 빈 껍데기, 설야만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내 모든 것을 바쳤다. 무림맹을 세우고, 강호의 모든 이름을 훔치고, 이 천지를 거대한 제단으로 만들어 너를 되살리기 위해……! 보아라, 설야! 내가 해냈다! 이 세계의 모든 기억이 너를 위해 바쳐질 것이다!"

광기 어린 호소가 야경(夜景) 속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착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덮기 위해 세계를 인질로 잡은 자의 흉측한 오만이었다. 남궁청은 설야를 향해 기어가며 손을 뻗쳤다. 그의 손끝에서 검붉은 계약의 사슬이 흉측하게 뻗어나가 설야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오지 마라."

무현이 검을 들었다.

비록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월륜의 기운이 다시 한 번 그의 검신을 타고 흘렀다. 흑과 백의 조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참격이 남궁청의 사슬을 향해 내리꽂히려 했다.

"비켜라, 서무현!"

남궁청이 미친 듯이 고개를 돌려 무현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반쯤 일그러져 괴물의 형상과 다름없었다.

"네놈은 모른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규율을 부수고 살려낸, 나의 유일한 빛이다! 네놈 같은 피 흘리는 짐승이 감히 어디서 손을 대느냐!"

"빛?"

무현이 냉혹하게 웃었다. 입가로 흘러내린 피가 턱을 적셨다.

"그것이 빛으로 보이느냐. 저 여인의 눈을 똑바로 보아라, 남궁청. 네가 만든 것은 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는 끝없는 어둠일 뿐이다."

"시끄럽다!"

남궁청이 전신의 내력을 짜내어 바닥을 박찼다.

쾅!

그의 몸이 사슬과 함께 무현을 향해 쇄도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거대한 폭풍이 일어났다. 사방의 전각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지면이 깊게 파였다. 무현은 이를 악물며 남궁청의 검세를 받아쳤다. 쇳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리고, 두 사람의 내력이 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그 격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극히 낮고, 지극히 아득하며, 마치 얼어붙은 호수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

"...무현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격돌하던 무현의 검이 멈췄다. 미쳐 날뛰던 남궁청의 숨소리마저 멎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설야였다.

그녀는 여전히 텅 빈 눈을 하고 있었으나, 그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이름 없는 껍데기,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망령이, 오직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된 단 하나의 흔적만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

무현이 고개를 돌렸다.

설야의 손끝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청의 사슬을 태우는 정화의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지닌 가장 따뜻한 기억의 온도, 타인이 기억해 주는 이의 온기였다.

설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죽어 있던 별빛 같은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내 아이야."

설야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무현의 뺨을 스쳤다. 얼어붙은 서리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손끝에서, 거짓말처럼 온기가 전해져 왔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어머니, 안 돼……!"

무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십 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아픔과 그리움이 녹아내린 순수한 눈물이었다. 그는 설야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설야가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원이었다.

그녀는 무현의 손을 밀어내고,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미치광이처럼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는 남궁청이 있었다.

"설야, 설야야……!"

남궁청이 손을 뻗어 설야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다.

설야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남궁청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가슴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남궁청. 우리의 계약은 여기서 끝이다."

"아니, 안 돼! 안 돼, 설야! 우리가 어떻게 만든 세상인데……!"

남궁청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늦었다.

설야의 몸 안에서 눈부신 백색의 광휘와 동시에, 강호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검은 달의 기운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열두 권의 이름 장부가 남궁청의 품속에서 튀어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장부의 페이지마다 새겨진 수만 명의 이름들이 황금빛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설야! 날 버리지 마라! 제발……!"

남궁청이 설야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으나, 설야의 몸은 이미 빛의 입자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궁청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이름을 삼킨 자여. 그대 역시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질지니."

"아아아아아―――!"

남궁청의 절규가 하늘을 찢었다.

그의 몸이 설야의 몸과 엉켜 붙기 시작했다. 정화의 빛과 계약의 어둠이 충돌하며 발생한 거대한 소용돌이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남궁청은 설야를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장부와 함께 붕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운이 융합되는 순간, 세상의 이치가 비틀렸다.

콰르릉―! 쾅!

하늘이 갈라졌다.

무림맹 본진의 상공,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그 중심에 기괴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밤하늘을 비추는 은은한 달이 아니었다.

검은 테두리 사이에 피처럼 붉은 광채가 감돌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거대한 형상이 일그러진 채 박혀 있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흉측한 천체.

'달의 화신'이 강림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림맹의 잔당들과 구파 한문의 고수들이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다.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검붉은 달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호 전체의 생명력과 기억을, 그리고 수만 명의 '이름'을 한꺼번에 삼키기 시작한 거대한 포식자였다.

슈우우우―――!

하늘의 달로부터 거대한 중력장이 뿜어져 나왔다. 대지가 갈라지고, 부서진 전각의 파편들이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사람들의 입에서 은빛 가루 같은 형상의 기억 조각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하늘의 달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무명병.

강호 전체가 거대한 기억 상실의 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현아!"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연이었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달려오며 명인을 겨누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압박감 앞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소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칠흑 대검을 바닥에 박고 버텼지만, 두 사람의 몸에서도 미세한 빛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억이 지워진다.

타인이 기억해주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이 세계의 잔인한 법칙이, 이제 강호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무현은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 거대한 달의 중심에서, 남궁청의 일그러진 얼굴과 설야의 텅 빈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끝낼 수 없다."

무현이 중얼거렸다.

그는 손에 쥔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터져 피가 흘러넘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스승의 유서가, 동료들의 목소리가,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온기가 남아 있었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강호 전체가 이름을 잃고 껍데기로 변해간다고 해도, 그가 기억하는 한, 그들이 서로를 기억하는 한―― 이 계약의 고리는 끊어낼 수 있다.

무현의 몸에서 검고 흰 기운이 다시 한 번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월륜의 진정한 완성. 빛과 어둠을 넘어, 모든 이름의 근원을 향해 도달하는 마지막 참격이 그의 검신에 모였다.

하늘의 달이 포효했다.

거대한 화신이 강호 전체를 향해 서서히 입을 벌렸다.

검은 달의 그늘 아래, 모든 이름이 지워지는 종말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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