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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55화목차

제55화 장주의 망령

피비린내가 짙은 공기는 달빛마저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린 밤바람이 청월곡의 골짜기를 휘돌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늦가을. 무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흑천월식검을 너무 많이 쓴 대가였다. 오른팔의 근육은 터져 나간 지 오래였고, 손가락 끝마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가 거친 돌바닥을 검게 적셨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십 년 전 그 밤에 왜 삿갓을 눌러쓰고 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왔는지 기억의 파편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멀리서 월소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연은 피투성이가 된 무현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동시에 독기 어린 푸른 광채가 손끝의 명인(名刃)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라비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타인의 기억 속에서 그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짜내어 그의 이름을 마음에 새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압도적인 공포가 두 사람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철컥.

철컥, 철컥.

그것은 뼈가 부딪히는 소리도, 칼날이 스치는 소리도 아니었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의 대들보가 무너지던 날과 똑같은 파멸의 마찰음.

바닥에 깔린 자운영(紫雲英) 꽃잎 위로 길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달빛이 부서지는 그곳에, 죽었어야 할 남자가 서 있었다.

서문 월청(西門 月淸).

청월장의 장주이자 무현의 양부, 그리고 검을 가르쳐준 스승.

그의 얼굴 반쪽은 이미 십 년 전의 화마에 휩쓸려 녹아내려 있었고, 나머지 반쪽에는 형언할 수 없는 흑백의 무늬가 음양어(陰陽魚)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반쯤 깨진 푸른 가면이 그의 광대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스승님……?”

무현의 목소리가 쉰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자만이 낼 수 있는, 뼛속까지 저린 비명에 가까웠다.

서문 월청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쥐여 있는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은 달의 계약을 기록한 ‘이름 장부’의 타버린 파편들이 기묘하게 엉겨 붙어 만들어진, 한 자루의 거대한 핏빛 척추검(脊椎劍)이었다.

“무현아.”

장주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지옥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듯 쩍쩍 갈라졌다.

“네가 베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네가 짊어진 그 빚의 무게다.”

“…….”

“너는 나를 죽였다 믿었겠지. 내가 너를 버렸고, 내가 이 장원을 불태웠다고 믿었겠지. 하지만 보아라, 무현아. 이 월식(月蝕)의 그늘 아래서 진정으로 타오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장주의 망령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흑월문이 수십 년간 감추어 온 금기, 흑천월식검의 원류가 그의 발자국마다 검은 연기로 피어올랐다. 빛을 흡수하는 중력장이 무현과 소연의 숨통을 조여왔다.

소연이 이를 악물며 명인(名刃)을 치켜들었다.

“개소리 마세요! 당신은…… 당신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었어!”

“소연아, 가엾은 내 딸아.”

장주의 망령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다. 흑월은 원래부터 주인이 없던 곳. 거대한 빚더미 위에서 누군가는 이름을 지불하고, 누군가는 그 이름을 거두어가는 법이지. 너희의 오라비, 그리고 너…… 너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그 계약의 담보였다.”

장주의 시선이 무현의 눈동자에 박혔다.

“기억해라, 무현. 나는 너에게 검을 가르칠 때 무엇을 일렀느냐.”

무현의 뇌 속에서 아득한 과거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화로가 타오르던 장원의 안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어린 무현에게 양부 월청이 건네었던 서늘한 목소리.

‘검은 이름을 지키려거든, 먼저 네 자신의 이름을 버려라. 타인을 위해 울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진짜 칼을 쥘 수 있는 법이다.’

“……검은 이름을 지키라고 가르치셨지.”

무현의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오른팔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졌어야 할 손가락 끝에, 기묘한 금빛과 칠흑의 빛이 동시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장주의 망령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 빚을 갚을 때가 왔다. 네 안의 검은 달이 완전히 잠기기 전에, 저 위를 보아라.”

장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청월곡의 가장 높은 곳, 거대한 제단이 세워진 ‘월하대(月下臺)’의 꼭대기에서 붉고 탁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지금 강호 전체를 뒤흔들 끔찍한 의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설원(雪原)의 잃어버린 무녀, 무현의 생모인 설야(雪夜)의 육신을 강제로 현세로 불러내기 위한 흑월의 마지막 제사. 그리고 그 제단의 중앙에는, 모든 음모의 원흉인 무림맹주 남궁청이 백색의 도포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가거라, 무현.”

장주의 망령이 척추검을 땅에 내리꽂았다. 쾅—! 하는 천지를 뒤흔드는 파열음과 함께, 바닥이 갈라지며 월하대로 향하는 거대한 벼랑길이 열렸다.

“스승님!”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단지, 네가 그 빚의 진짜 주인을 만나기 위해 열어둔 마지막 문일 뿐…….”

장주의 몸이 검은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잔영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무현은 그가 던진 마지막 눈빛을 보았다. 그것은 증오도, 원망도 아닌…… 모든 것을 짊어진 자의 처절한 해방감이었다.

휘익—!

바람이 거세졌다.

무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흑천월식검의 검신이, 왼손에는 소연이 건네준 백천월광검의 잔광(殘光)이 붙들렸다.

흑과 백.

빛과 어둠.

월식과 월광.

두 개의 극단적인 기운이 무현의 심장에서 만나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소연이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무현의 주변을 감싼 기운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검객이 스스로의 이름을 태워 만든 기적, 흑백 합일의 궁극진기—— 월륜(月輪) 이었다.

무현의 등 뒤로 검고 커다란 초승달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 달의 중심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한 글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무현(無顯).’

사라졌던 기억이, 타인들이 지워버리려 했던 자아가, 오직 소연의 기억과 스스로의 의지 덕분에 다시금 선명한 칼날이 되어 되살아났다.

“가자.”

무현이 낮게 읊조리며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월하대의 가파른 벼랑을 수직으로 치고 올라갔다.

월하대 정상.

빙글빙글 돌며 피어오르는 푸른 향연(香煙) 속에서, 거대한 얼음 관(棺) 하나가 공중에 떠 있었다.

관의 내부에는 마치 방금 잠들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십 년 전, 흑월문의 계약에 모든 것을 바쳤던 무녀 설야. 그녀의 심장 부근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그 자물쇠의 열쇠는 바로 십 년간 무현이 지녀온 옥패의 조각들이었다.

“흐흐흐…… 마침내 완성되는구나.”

광기 어린 눈빛을 빛내며 서 있는 자가 있었다.

백색 무림맹주의 도포를 입었으나, 그 얼굴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반은 늙은 무림맹주의 얼굴, 반은 계약에 영혼을 저당 잡힌 흑월의 괴물이 뒤섞인 남궁청.

그는 손에 든 검은 장부를 펼치며 얼음 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설야. 네가 내게 남긴 그 거대한 빚을 이제 돌려받아야겠다. 네 아들이 가져온 그 마지막 옥패만 더해지면, 이 강호의 모든 이름은 나의 것이……!”

“남궁청.”

서늘한 목소리가 제단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궁청이 고개를 휙 돌렸다. 월하대로 오르는 단애의 끝자락, 피투성이가 된 삿갓 검객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흑과 백의 거대한 달무리가 겹쳐지며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월륜(月輪)을 그리고 있었다.

무현이었다.

남궁청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오, 살아 있었나? 그 늙은이의 망령이 길을 열어주던가? 기특하구나, 무현아. 네가 가져온 그 피묻은 몸뚱이가 바로 이 의식을 완성시킬 마지막 제물이다.”

남궁청이 손을 휘젓자, 제단 주변에 매복해 있던 수십 명의 흑월 살수들과 무림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무현을 향해 살진(殺陣)을 펼쳤다. 영인비수진의 수천 은빛 비수들이 폭우처럼 무현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무현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의 화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눈 내리는 설원에서 자신을 품에 안아주던 어머니의 따스한 품, 그리고 눈물 흘리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소연의 목소리였다.

‘내 이름은 빚이 아니다.’

무현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 검은 달이 부서지며 순백의 빛이 대지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

흑백의 월륜이 회전하며 제단을 뒤덮은 비수들을 먼지로 만들었다. 남궁청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럴 리가……! 네놈은 이미 이름을 다 먹혔을 터인데……!”

“내 이름은 내가 정한다.”

무현이 허공을 박차며 남궁청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검끝이 거대한 얼음 관을 향해 뻗어 나가는 순간, 관속에 누워 있던 설야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마침내, 감겨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올랐다.

관 속에서 흘러나온 눈부신 설원(雪原)의 빛이 무현의 검끝에 닿았다.

그 순간, 온 강호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관의 표면에 맺힌 냉기가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지이익——.

귀를 찌르는 마찰음과 함께 설야의 눈동자가 완전히 열렸다. 그것은 이승의 공기가 아니라, 아득한 북방 설원의 백야(白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순백의 광채였다.

관 속에 잠들어 있던 무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 파동은 월하대 전장의 공기를 진동시키기 충분했다.

‘……무현아.’

쿵.

무현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생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십 년 동안 짓눌려 있던 빚의 무게, 자신의 존재가 거대한 계약의 담보에 불과했다는 자낮함이 그 한마디에 의해 사정없이 부서져 내렸다.

“설야……! 안 돼, 아직 완성이 아니야! 내 빚을 돌려주기 전엔 잠들 수 없다!”

남궁청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반은 인간, 반은 괴물의 형상을 한 몰골로 검은 장부를 품에 안은 채 얼음 관을 향해 독사처럼 튀어 올랐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명부혈쇄의 핏빛 사슬이 무녀의 목을 감아쥐려 뻗어 나갔다.

“접근하지 마라.”

무현의 입에서 낮고 서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등 뒤에서 회전하던 흑백의 월륜(月輪)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흑천월식검의 어둠과 백천월광검의 빛이 소용돌이치며 남궁청의 핏빛 사슬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콰아아아궁—!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남궁청의 신형이 사정없이 뒤로 밀려났다. 백색 무림맹주의 도포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남궁청은 바닥을 구르며 경악 어린 눈으로 무현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네놈의 이름은 이미 흑월의 장부에 기록되었을 터인데, 어찌 그 힘을 스스로 제어한단 말인가!”

“내 이름은 너희 같은 자들이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무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오른손에 쥔 검신에는 더 이상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타인이 기억하는 온기와, 스스로 되찾은 자아로 단단히 벼려진 금빛 명인(名刃)의 형상이었다.

“십 년 전, 너희는 장원을 불태우고 우리의 이름을 빼앗아갔지. 강호를 삼키겠다는 욕망 하나로 수많은 이들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남궁청.”

“웃기지 마라! 이 강호의 모든 이름은 원래부터 지배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 계약의 빚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남궁청이 미친 듯이 웃으며 품속에서 마지막 남은 검은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기운이 월하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 팽창했다. 제단 아래서 대기하던 수십 명의 흑월 살수들과 무림맹 고수들의 눈빛이 동시에 탁하게 흐려졌다. 그들도 또한 이름을 먹히고 껍데기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바로 그때.

휘리릭——.

밤하늘의 구름이 걷히며, 진짜 달빛이 월하대의 제단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제단 중앙에 떠 있던 얼음 관이 완전히 열리며 설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광휘가 남궁청이 쥐고 있던 검은 장부를 강하게 내리쳤다.

파지지직—!

장부의 페이지가 불타오르듯 하얗게 바래기 시작했다.

“안 돼……! 내 장부가……! 나의 영원한 생명이……!”

남궁청이 비명을 지르며 장부를 붙잡으려 했으나, 설원 무녀의 빛은 이미 그의 육신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은 계약의 힘을 무효로 만드는 정화의 빛이자, 잃어버린 이름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기적이었다.

무현은 남궁청을 향해 천천히 검을 겨누었다.

“네가 짊어져야 할 빚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잊지 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무현의 검이 남궁청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월륜의 빛이 밤하늘을 갈라놓으며 강호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일격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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