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결전 전야
비 그친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다.
흑월곡(黑月谷)의 안개는 평범한 물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강호의 고수들이 계약에 눈이 멀어 바친 기억의 파편이자, 이름 없는 자들의 한숨이 엉켜 만들어진 칠흑빛의 장막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모조리 지워진 듯한 적막 속에서, 발소리만이 눅눅한 흙바닥을 적셨다.
철컥, 끼익.
무현은 낡은 삿갓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등에 돋아난 핏줄은 어둠 속에서도 붉고 선명했다. 계약의 힘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쓴 대가였다. 흑천월식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은 이미 감각이 반쯤 마비되어 있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지독한 공허함이 치밀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멈추자, 뒤따르던 이들의 행렬도 일제히 멈춰 섰다.
전방에는 이미 잿더미가 된 청월장의 옛터가 거대한 무덤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흑월문의 본단이 검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1.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밤
본단으로 향하는 임시 야영지. 타다닥, 타닥. 젖은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며 튀기는 작은 불꽃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모닥불의 반대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바위에 기대어 앉은 이가 있었다. 붉은 가면을 벗어 든 월소한이었다. 십 년 전, 흑월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제 손으로 청월장의 기둥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 그 죄책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했던 사내의 눈가에는 깊고 어두운 그늘이 패여 있었다.
"소한 오라버니."
나지막한 목소리. 월소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옥패가 들려 있었다. 십 년 전의 기억이 전부 돌아온 이후, 소연은 소한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그날의 불길 속에서 친오빠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소연의 눈빛에는 증오나 원망 대신, 기나긴 세월을 돌고 돌아 마침내 서로를 마주한 자매의 처연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미안하다, 소연아."
소한의 목소리가 쉰 모래처럼 갈라졌다. 그는 거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은 여전히 십 년 전 장원의 화염 속에서 타오르던 열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그날 밤, 눈이 멀어 있었다. 문주가 내게 네가 아픈 이유가 장주가 진 빚문서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를 구하는 길이라 믿었다."
"알아."
소연이 손을 뻗어 소한의 떨리는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은 차가운 새벽 공기만큼이나 서늘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오라버니도 이용당했을 뿐이잖아. 어머니가… 대모가 병든 너를 살리려 계약을 맺었고, 그 대가가 우리를 덮쳤던 것뿐이야. 나도, 너도, 그리고 무현 오라버니도 모두 피해자였어."
"하지만 내 손으로 불을 붙였다. 그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
"지우지 마."
소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우려고 하지 마, 오라버니. 기억을 지우는 건… 계약을 한 자들이 하는 짓이야. 우리는 기억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해. 그래야만 비로소 그날 밤의 불이 꺼질 수 있어."
소한은 멍한 눈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십 년 전, 여리디여리던 소녀는 이제 검은 달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검을 쥔 무인이 되어 있었다. 소한은 떨리는 손을 들어 소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그 안에는 형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가 담겨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품속에 지닌 검을 다시 한번 고쳐 잡았을 뿐이다.
2. 이름을 불러다오
"무현 오라버니."
소한과의 대화를 마친 소연이 걸어와 무현의 앞에 멈춰 섰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달빛처럼 하얗게 빛났다. 아니,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이미 검은 달을 넘어선 투명한 빛이 서려 있었다. 흑천월식검을 극한까지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소연은 알고 있었다. 무현이 자신의 존재와 '이름'을 담보로 계약의 장부를 태우려 한다는 것을.
"너는…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소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흑발이 뺨을 스쳤다.
무현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은 화상 흉터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소연아."
"응."
"내가 십 년 전에 흑월문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름이 없었어. 아니, 버려졌지. 빗속을 헤매던 나를 거두어 준 건 장주였고, 함께 칼을 쥐며 살아갈 이유를 준 건 너희 남매였다."
무현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소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삼키지 못한 단 하나의 빛이 남아 있었다.
"계약의 규칙을 알지? 이름을 바치면 존재가 지워져. 기억에서 사라지고,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되지. 하지만… 타인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군."
"……!"
소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라버니, 설마…."
"내가 흑월의 본단으로 들어가 계약의 마지막 초식을 쓰겠다. 장부를 태우고, 검은 달의 눈을 멀게 할 거야. 그 과정에서 내 기억과 이름이 흩어질지도 몰라."
무현의 손이 소연의 어깨 위에 얹혔다. 단단하고도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이었다.
"그러니, 소연아. 내가 모든 걸 끝내고 돌아올 때… 아니, 혹시라도 내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거든, 그때 네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소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짜낸 목소리가 쉰 소리처럼 흩어졌다.
"……약속해. 반드시, 몇 번이고 네 이름을 불러줄게. 네가 네 이름을 잊어버려도, 내가 세상 끝까지 찾아가서 네 이름을 기억해 낼 거야. 그러니까…."
소연이 무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현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비록 생명의 혈육은 아니었으나, 십 년간의 지옥 같은 세월을 함께 견뎌낸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혈연보다 진한 인연의 끈이 얽혀 있었다. 그것은 흑월문의 계약조차 끊어낼 수 없는 진짜 '이름'의 무게였다.
3. 아버지를 향한 갈등
두 사람의 무거운 공기를 깬 것은 가볍고도 날카로운 발소리였다.
"정감 어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군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이는 남궁설이었다. 무림맹주 남궁청의 딸이자, 봉명사(封名絲)를 다루는 치명적인 자객.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은빛의 실이 거미줄처럼 아슬아슬하게 얽혀 있었다.
적이었으나 배신했고, 마침내 무현의 동맹이 된 여자. 남궁설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남궁설."
무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궁설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내 결심한 듯 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현. 내 아버지… 남궁청에 대한 이야기야."
"……."
"그가 강호 전체를 삼키기 위해 흑월문의 장부를 모았고, 검은 달의 계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설야 무녀의 일도, 그가 저지른 과오라는 것도."
남궁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핏줄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굴레가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부탁이야. 그를 죽이지 마라 줘."
무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강호에 뿌린 피의 대가를 알고 말하는가? 십 년 전 청월장이 불탈 때, 그 배후에서 방아쇠를 당긴 게 누구지. 수많은 이들이 '이름'을 빼앗기고 무명병에 걸려 죽어갔다. 그 책임을 묻지 말라는 건가?"
"죽이지 말아 달라는 게 아니야."
남궁설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 진심 어린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이미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어. 계약의 힘을 탐닉한 대가로,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잊고 있지. 내 손으로… 아니, 내 눈으로 보았어. 아버지는 이미 괴물이 되어가고 있어. 그러니 그를 죽여서 해방시키지 말고, 살아있는 채로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직시하게 해줘.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채 껍데기로 살아가는 게 어떤 고통인지, 그가 직접 느끼게 해달란 말이야."
남궁설의 청은 단순한 혈육의 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잔인한 복수이자, 동시에 맹주라는 거대한 위선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현은 잠시 동안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달빛이 남궁설의 뺨을 비추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얽힌 봉명사(封名絲)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좋다."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주마. 단, 그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땐 내 검이 아니라, 계약의 장부가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남궁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4. 월하대(月下隊)의 진격
새벽의 첫 빛이 수평선 너머로 핏빛처럼 번져갈 무렵, 흑월곡의 안개가 급격히 짙어졌다.
"시간이다."
무현이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그의 손에 들린 흑천월식검에서 스물스물 칠흑 같은 어둠이 흘러나와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월소연, 월소한, 남궁설, 그리고 강호 각지에서 모여든 동맹들의 무리가 일제히 무기를 빼어들었다. 흑월문의 본단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행렬은 마치 저승으로 향하는 명부의 사신들 같았다.
공기 중에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저기다."
소연이 옥패를 치켜들었다. 옥패에서 흘러나온 금빛 광채가 안개를 가르며 흑월문 본단의 거대한 철문(鐵門)을 비추었다.
철문 앞, 칠흑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두 개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기괴한 쇠사슬 소리가 귓가를 찢듯 울려 퍼졌다.
철그렁- 덜그렁-
지옥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들. 핏빛 귀화 사슬을 휘감은 외눈 문지기와… 그와 똑 닮은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 쌍눈이었다.
"어디를 가느냐."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겹쳐 들렸다. 그들의 눈에는 생명의 빛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이름을 바치고 계약의 노예가 된 망령들이었다.
"여기는 흑월의 문. 계약의 장부에 이름을 적지 않은 자는, 단 한 걸음도 안으로 들일 수 없다!"
외눈의 손에서 핏빛 쇠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튀어나왔고, 쌍눈의 손에서는 수십 가닥의 명부혈쇄가 공중을 가르며 사방을 포위했다.
5. 명부혈쇄 망령전
콰쾅-!
첫 번째 격돌은 예고도 없이 폭발했다.
쌍눈이 휘두른 붉은 쇠사슬이 허공을 찢으며 무현의 목을 노렸다. 칠흑빛 중력장이 뿜어져 나오며 사슬의 속도를 늦추려 했지만, 망령들의 힘은 과거 생존해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괴하고 거대해져 있었다.
"비켜라."
무현의 입에서 낮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검신에 흑빛 초승달이 떠올랐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첫 번째 초식, '참월(斬月)'.
슈우우욱-!
빛이 사라진 공간에 오직 검광만이 뻗어나갔다. 거대한 사슬의 무리가 단 한 번의 검세에 두 쪽으로 갈라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망령들은 피를 흘리지도,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들은 부서진 사슬을 다시 쥐어잡으며 괴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름을 바친 자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흑월의 영원한 파수꾼이니!"
"죽지 않는다면, 그 몸을 산산조각 내주마!"
월소한이 대검을 치켜들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속죄의 열기가 안개를 태웠다. 칠흑 대검이 쌍눈의 사슬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쾅! 쾅! 쾅!
사방으로 흙더미가 튀고, 붉은 피와 검은 먹물이 뒤엉켰다. 소연 역시 명인(名刃)을 전개하며 비수처럼 날아드는 사슬들을 정교하게 쳐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들의 핵은 사슬이 아니야! 가슴팍에 박힌 계약의 옥패다!"
소연의 외침에 무현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쌍눈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순식간에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외눈 문지기가 가로막았지만, 남궁설의 봉명사가 날아와 그의 팔다리를 팽팽하게 묶어버렸다.
"지금이야!"
무현의 검이 금빛과 흑빛의 경계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흑천월식검의 진면목, 빛과 어둠이 뒤엉킨 묵직한 일격이 쌍눈의 가슴팍을 정확히 관통했다.
파지직-!
계약의 옥패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망령들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6. 망령 속에서 피어오르는 얼굴
옥패가 깨어지며 뿜어져 나온 빛은 흑월곡의 짙은 안개를 사방으로 밀어내었다.
외눈과 쌍눈의 몸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아……."
비로소 이름과 기억을 되찾은 자들의 허탈한 탄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며, 마치 오랜 꿈에서 깬 듯 편안한 눈빛으로 스르륵 사라져 갔다.
전투가 멈춘 고요한 철문 앞.
남은 것은 부서진 쇠사슬과 흩날리는 금빛 가루뿐이었다. 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바닥에 짚었다. 흑천월식검을 과도하게 사용한 여파로 그의 오른팔 피부가 미세하게 갈라져 피가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조심해!"
소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 망령들이 서 있던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심장부에서, 또 다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앞서의 문지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이고도 서늘한 중력장의 압박이었다.
스으윽-.
안개가 걷히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철문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낡은 도포를 걸치고, 얼굴에는 반쯤 깨진 푸른 가면을 쓴 사내. 그 사내가 손에 쥔 검은, 놀랍게도 청월장의 비전(秘傳)인 월광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무현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삿갓을 눌러쓴 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그러나 뼛속까지 파고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무현아."
그 목소리는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서,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 설원의 눈밭에서 들렸던 목소리와 정확히 겹쳐 있었다.
장주 서문 월청.
이미 불에 타 죽었어야 할 양부이자 스승의 망령이, 핏빛으로 물든 검은 달 아래에서 서서히 그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