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다시 옥패
사방을 짓누르던 검은 달의 잔향이 잦아들었다. 월하대(月下臺)의 거대한 제단 위로 내려앉은 침묵은 무겁고도 차가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기 속에서, 핏빛으로 물들었던 허공은 이젠 바래진 잉크처럼 잿빛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무현은 품 안에서 차갑게 식은 옥패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옥패는 십 년 전, 청월장이 불타던 그날 밤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반쪽짜리 달의 문양. 거칠게 마모된 가장자리와 손때 묻은 표면. 그 시절, 스승인 서문 월청이 쥐여주었던 유품이자, 그가 강호의 바닥을 떠돌며 품에 품고 살았던 유일한 빚의 증거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도 위태로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 위를 걷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월소연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옛날의 그 빛이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지워진 자의 공허함이자, 낯선 이의 경계심이었다.
소연은 무현을 향해 멈춰 섰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라비라 불렀던 이, 사내라고 불렀던 이, 혹은 그저 눈앞에 서 있는 흉터 가득한 검객. 그 모든 호칭이 머릿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뒤 그녀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 안쪽까지 메말라버린 사람의 목소리였다.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선을 낮추어, 손바닥 위에 놓인 옥패를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빛을 잃은 옥패가 달빛에 비쳐 미세하게 번뜩였다.
"이걸 봐라."
무현의 목소리는 낮고 편안했다.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바위 같은 목소리였다.
소연은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그러졌다. 머릿속 깊은 곳, 닿을 수 없는 심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뒤척이는 느낌이었다.
챙—!
머릿속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환청이 울렸다.
불길. 붉은 불꽃. 사방으로 튀는 횃불.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누군가의 손에 쥐여졌던 반쪽짜리 옥패의 형상.
소연이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를 감싸쥔 채 그녀가 무릎을 꺾었다.
"크……윽, 머리가……!"
"소연아."
무현이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억지로 기억을 파내려 할수록 영혼이 타들어 간다는 백초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소연은 스스로 그 기억의 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이 흉터 난 검객과 어떤 바닥을 굴렀는지 알기 위해.
"보려고 하지 마라. 억지로 끄집어낼 필요 없다."
"아냐…… 보, 보여…… 불길…… 그날 밤…… 오라버니가 내게 쥐여주었던……."
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피처럼 붉은 눈물이 아니라, 투명하고 시린 여인의 눈물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무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삿갓 아래 드러난 화상 흉터, 그리고 그 아래 깊게 박힌 쓸쓸한 눈동자.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지며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십 년 전, 청월장의 무너진 기와 아래서 울음을 삼키던 어린 소녀의 모습. 그리고 그 소녀에게 옥패를 쥐여주며 등을 떠밀었던 소년의 뒷모습.
"……오라버니?"
소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는 무현의 가슴을 깊게 후벼 팠다.
비록 모든 것을 잃고 껍데기만 남았을지라도, 그녀의 영혼 깊은 곳의 뿌리는 아직 뽑히지 않았다.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는 계약의 허점, 혹은 그보다 더 질긴 인연의 실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무현은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 옥패를 그 손바닥 위에 포개어 얹었다.
"그래. 내가 맞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월하대의 바깥쪽, 붕괴하는 진법의 잔해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야, 이거 사방이 아주 지옥구절판이 따로 없구만!"
철갑을 두른 채 거대한 철퇴를 질질 끌고 오던 남궁설이 콧김을 뿜어냈다. 그녀의 뒤를 이어, 피투성이가 된 검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월소한이었다.
소한의 얼굴은 십 년 전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굳어 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끝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궁설이 옆에서 힐끗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봐, 붉은 가면 양반. 다리 안 절어? 그러다 마주치기도 전에 엎어지겠어."
"신경 꺼."
"신경 안 쓰면 내가 업어주기라도 할 줄 알았나? 어림도 없지. 내 봉명사(封名絲)는 바쁜 몸이시거든."
소한은 대답 대신 앞을 노려보았다. 월하대로 이어지는 마지막 관문, 붕괴된 석벽의 무너진 틈새로 익숙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소란스럽군."
낮게 깔리는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걸어 나왔다. 남해의 파도를 삼킨 듯한 거친 해풍의 기운, 해적왕의 부름이었다. 그 뒤를 이어 소림의 방장이 염불을 외우며 합장했고, 한쪽 구석에서는 당가의 독공을 숨긴 당하린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라, 생각보다 정리가 빠른데? 이거 우리가 나설 자리가 없겠어."
당하린이 비싯 웃으며 월하대 입구에 모여든 무리를 훑어보았다. 무림맹의 잔당과 흑월문의 남은 세력이 완전히 와해된 지금, 강호의 판도를 뒤흔들던 거대한 음모의 실타래는 이제 마지막 매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소림 방장이 무거운 눈으로 제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은 달의 기운은 옅어졌으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맹주…… 아니, 남궁청 그 자가 남긴 마지막 장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알고 있소."
목소리와 함께 무현이 소연을 부축하며 제단 아래로 내려왔다. 소연은 비록 창백했지만, 스스로의 발로 걸으며 눈빛에 단단한 빛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그 옥패가 쥐어져 있었다.
해적왕이 콧방귀를 뀌며 거대한 도를 둘러메었다.
"남은 건 하나뿐이지. 그 녀석의 목을 베고, 강호 전체를 옭아매었던 그 빚더미를 태워버리는 것."
"그렇소."
무현의 시선이 모여든 동맹들을 향했다. 당하린, 소림 방장, 해적왕, 남궁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지키는 소한과 소연까지.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혼자 남겨졌던 소년이 걸어온 길의 끝에 마침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빚을 받기 위해 시작된 여정은 이제, 그 빚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시작을 열기 위한 마지막 결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결전지를 코앞에 둔 임시 주둔지. 사방에 피워낸 모닥불의 불꽃이 붉은 춤을 추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불티가 타닥 소리를 내며 밤하늘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기를 손보거나 눈을 감고 기를 가라앉혔다.
조금 떨어진 바위 그늘 아래, 무현은 홀로 앉아 자신의 검을 닦고 있었다. 흑천월식검. 빛을 삼키고 이름을 대가로 요구하는 그 흉측한 검은, 달빛 아래서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무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삿갓을 벗은 소연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완벽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누구이며, 이 검객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기억해낸 이의 눈빛이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그의 곁에 주저앉으며 낮게 말했다.
무현은 검을 닦던 헝겊을 내려놓았다.
"안 자고 왜 나왔어."
"잠이 안 와서."
소연은 무현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검신에 비친 불꽃이 아스라이 흔들렸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들었어."
무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뭘."
"소한 오라버니랑 나누던 말. 당가 그 여자랑 소림 방장이랑……."
소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울었고, 이제는 강해져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지막 초식. 월식(月蝕). 그 무공을 쓰면…… 내 이름을 포함해서, 당신이 가진 모든 기억과 존재가 지워진다고 했잖아."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흑천월식검의 가장 마지막이자 유일한 해법이었다. 계약을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서는 계약의 주인이 가진 이름을 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즉, 자신이라는 존재를 강호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내는 것.
그것이 무현이 십 년 동안 짊어져야 했던 운명이자, 마지막 대가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소연의 목소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겨우 찾았는데…… 오라버니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또 사라지겠다고? 이번엔 아예 세상에서 지워져 버리겠다고?"
무현은 고개를 돌려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 흉터 가득한 얼굴에 지어지는 미소는 어딘가 슬프면서도 완벽하게 평온했다.
"소연아."
"싫어, 그런 거……."
"잘 들어라."
무현의 손이 뻗어 소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거칠고 굳은살 박힌 손길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스했다.
"나는 십 년 전부터 이미 죽어 있었어야 할 목숨이다. 그날 밤, 흑월의 문턱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계약의 대가로 저 달에 팔렸었지."
"하지만……!"
"하지만 너희가 기억해 주었다. 네가, 소한이가, 그리고 스승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무현은 밤하늘의 잿빛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이지러져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강호 전체를 삼키려는 거대한 악의 기운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빚은 갚아야 한다. 그것이 검객의 도리다."
무현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낮게 울려 퍼졌다.
"나는 마지막에 내 이름을 모두 내주겠다. 내가 가진 기억, 내 이름, 그 모든 빚을 월식(月蝕)의 검광에 실어 달에 바칠 것이다."
소연의 숨이 멎었다.
"그렇게 하면 계약은 완전히 깨진다. 더 이상 아무도 이름을 빼앗기지 않고, 무명병에 걸려 껍데기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온전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그럼 오라버니는요?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나는 원래 없었던 자가 되는 것뿐이다."
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마라. 네가 말했잖느냐.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고."
소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무현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 말의 의미를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무현이 자신을 지우고 계약을 끊어낸다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 한 사람, 그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부를 수 있는 자가 남아있지 않다면.
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모닥불의 불티가 마지막으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어둠 속으로 사그러들었다. 멀리서 결전의 전율을 품은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검은 달의 밤이, 비로소 그 마지막 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자 주위는 묘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소연은 더 이상 무현을 말리지 못했다. 아니,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가 품은 짐의 무게가 얼마나 거대하고 오랜 세월 동안 짓눌러 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무현은 소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 쉬어라. 내일이면 끝난다."
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모닥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무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그날 밤의 옥패가 부서질 듯 쥐어져 있었다. 옥패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튿날 새벽,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의 짙은 안개가 주둔지를 감쌌다.
출정의 시각이었다. 흑월문의 본단이 자리한 심장부, 더 이상 검은 달의 잔향조차 남아 있지 않은 폐허의 대지로 걸음을 옮길 시간이었다.
동맹들은 이미 무장을 마친 채 진형을 정비하고 있었다.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멘 남궁설은 입을 삐죽거리며 검을 닦는 소한을 힐끗 보았고, 해적왕은 콧방귀를 뀌며 허리춤의 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림 방장은 합장한 채 무언가 무거운 경문을 속삭이고 있었고, 당하린은 소매 속에서 독침을 은밀하게 골라내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무현이 무리를 향해 낮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혼란이나 미련은 없었다. 삿갓 아래 드러난 눈동자는 칠흑 같은 밤바다처럼 깊고 단단했다.
소한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들린 칠흑 대검이 묵직한 살기를 흘렸다.
"가자. 끝을 보러."
소연 역시 무현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검끝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강호 전체를 집어삼키려던 검은 달의 계약, 그 마지막 잔재가 도사리고 있는 심연을 향해 발걸음이 내딛어졌다. 비가 그친 밤의 안개 속에서, 마지막 결전을 향한 검객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