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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52화목차

제52화 소연의 이름

비 그친 밤의 공기는 철과 핏물, 그리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잿더미의 냄새로 무거웠다.

월하대(月下臺).

흑월문의 가장 깊숙한 곳, 붉은 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그 제단 위로 서늘한 초승달빛이 비껴 내렸다. 잉크를 흩뿌린 듯한 칠흑의 밤하늘 아래, 거대한 석판 위에 묶인 소녀의 가늘고 하얀 손목이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월소연(月小然).

아직 가시지 않은 오한에 떨면서도, 소녀의 눈동자는 스러지지 않는 불꽃처럼 파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오라버니."

작게 읊조린 목소리는 메아리도 없이 부서졌다. 제단의 사방에는 핏빛으로 칠해진 철쇄가 복잡한 주술의 문양을 그리며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소연의 전신을 죌 듯이 압박하고 있었다.

계약의 제물.

남궁청이 남긴 마지막 잔재와 흑월의 남은 세력이 얽혀 꾸민 마지막 의식이었다. 강호를 삼키기 위한 검은 달의 계약, 그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소연의 피와 이름이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월하대로 오르는 거대한 돌계단이 폭발하듯 부서져 내렸다.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와 함께, 암흑 속에서 거대한 짐승의 포효 같은 기도가 울려 퍼졌다.

"비켜라……!"

월소한(月小漢).

붉은 가면은 이미 반쯤 부서져 깨져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칠흑 대검은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내력을 토해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검강은 밤의 어둠마저 집어삼킬 듯 맹렬한 중력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한 오라버니……!"

소연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소한의 온몸은 이미 성한 곳이 없었다. 십 년 전, 거짓말에 속아 스스로 장원에 불을 지폈던 그 손으로, 이제는 자신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부서진 지옥도를 헤쳐 나오고 있었다.

콰드득! 콰아앙!

"누가 내 동생에게 손을 대느냐……!"

소한의 검격이 월하대를 지키던 잔당들의 진형을 단숨에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핏빛이 터지고 육신이 짓눌리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소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제단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동생의 모습만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제단을 둘러싼 진법의 압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크루루룩―!

소한이 휘두른 칠흑 대검이 진법의 결계에 부딪히며 거대한 섬광을 튀겼다. 엄청난 반동에 소한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고, 그의 무릎이 석판 위에 쿵 하고 꺾였다.

"크윽……!"

"소한!"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묵직한 검광이 쏘아져 들어왔다.

삿갓을 깊게 눌러쓴 검객, 서무현(徐武鉉)이었다.

전신에 새겨진 상처와 핏자국이 그의 고단한 여정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은 태양빛마저 삼킬 듯이 고요하고 깊었다. 무현의 발걸음이 월하대의 석판을 밟는 순간, 사방을 짓누르던 무거운 중력장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무현이 형……!"

소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무현은 말없이 소한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받쳐 일으키며, 정면에 가로놓인 거대한 혈쇄진(血鎖陣)을 응시했다.

"일어나라, 소한. 아직 끝내지 못한 빚이 있다."

"……크흠, 그래. 내 손으로 끄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두 사람의 기도가 하나로 합쳐졌다. 무현의 백천월광검과 소한의 흑천월식검이 교차하며 뿜어낸 빛과 어둠의 조화는, 월하대를 감싸고 있던 기괴한 붉은 안개를 순식간에 밀어내기 시작했다.

콰구구구궁―!

두 사람의 공조 구출전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고도 잔혹했다. 무현이 진법의 핵을 정면으로 꿰뚫어 빈틈을 만들면, 소한이 그 틈새로 칠흑 대검을 박아 넣어 철쇄를 박살 냈다.

"크아아악!"

남은 흑월의 잔당들이 저항하려 했으나, 이미 눈이 뒤집힌 무현과 소한의 검세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핏물이 비처럼 내리고, 제단을 두르고 있던 마지막 사슬이 쩌렁한 소리를 내며 끊어져 나갔다.

"소연아!"

무현이 진법의 중심부로 뛰어들어 사슬에 묶인 소연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안도감은 찰나였다.

진법은 이미 깨졌으나, 그 과정에서 풀려난 계약의 잔류 에너지가 소연의 몸속으로 거꾸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소연의 전신이 눈부실 정도로 하얗고 금빛 어린 투명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

소연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맑은 초승달의 형상이 깨진 거울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대가로, 이 진을 부순다.

소연의 머릿속에 울린 것은 소리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가였다.

소연의 손끝에서 금빛의 예기가 피어올랐다.

명인(名刃).

그녀가 가진 장원의 비전, 자신의 존재를 칼로 세우는 기예.

"소연아, 안 돼! 그 검을 쓰지 마라!"

무현이 경악하며 소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소연의 명인은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이름의 뿌리를 향해 겨누어지고 있었다.

치이익―!

살을 태우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깎여 나가는, 묵직하고도 서늘한 침묵의 소리였다.

빛이 폭발했다.

제단 위를 뒤덮었던 모든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사방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소연은 무현의 품 안에서 힘없이 눈을 감았다가, 이내 파르르 떨며 스르륵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

그곳에 있던 온기, 그리움, 그리고 애틋함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석양처럼 붉었던 하늘도, 빗물이 고인 돌바닥도, 제 품을 감싸 안은 거친 손길도 모두 처음 보는 것인 양 낯설기만 한 눈동자.

소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을 에는 듯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단검이 서서히 허공을 향해 겨누어졌다.

달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월하대 위.

소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열렸다.

"……당신, 누구죠?"

서무현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서 홀로 살아남아 빚을 짊어졌던 그날처럼, 시간은 잔인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름을 지켜낸 대가로, 그녀는 자신을 잊었다.

바람이 불었다.

흑월문의 잔해 위로, 서늘하고도 슬픈 초승달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지독한 정적이 월하대를 내리눌렀다.

사방에 흩어진 핏자국과 부서진 철쇄의 조각들 위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삭풍보다도 서무현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은, 제 품에 안긴 소녀의 텅 빈 눈동자였다.

"……소연아."

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수많은 사지를 헤쳐 나오고, 흑월의 심장을 꿰뚫으며 기어코 여기까지 도달했던 이유가 바로 저 아이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계약의 저주와 맞바꾼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소연은 무현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불했다.

오라버니라 부르며 옷자락을 붙잡던 온기, 잿더미 속에서 함께 울부짖던 눈물, 그리고 기나긴 세월 동안 서로를 지탱해주었던 유일한 유대까지도 전부.

소연은 천천히 무현의 품에서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단검의 날끝이 매섭게 빛났다. 그 눈빛에는 적의(敵意)조차 없었다. 오직 경계와 낯섦, 그리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허허로움만이 가득했다.

"다가오지 마세요."

소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그 속에는 완고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제단 위에 묶여 있었는지, 왜 이 피비린내 나는 장소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커먼 삿갓을 쓰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남자가 자신에게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을—기억의 바닥이 통째로 도려내어진 그녀는 결코 알 리가 없었다.

"소연아…… 내가 누군지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거냐?"

무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소연은 사르륵 물러서며 단검을 더욱 곧추세웠다.

"이름을 대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마치 십 년 전, 흑월문의 잿더미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눈을 떴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잔인했다. 무현은 적어도 자신의 빚과 기억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소연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뿌리마저 유령처럼 지워버린 것이다.

"크흠……!"

그때, 제단 한편에서 거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소한이 상체를 일으켰다. 칠흑 대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버티고 선 그의 눈이 소연을 향해 크게 흔들렸다.

"소연아……?"

소한의 목소리에 절박함과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묻어났다. 친오빠의 그 목소리마저도 지금의 소연에게는 닿지 않았다. 소연은 소한을 향해 경계 어린 눈빛을 던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소연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기억을 되찾으려 할수록 영혼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 쓴 명인의 대가였다.

"소연아, 멈춰라! 더 이상 그 이름을 파내려 하지 마라!"

무현이 번개처럼 움직여 소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순한 무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지금 소연의 몸은 계약의 잔여 에너지와 스스로 세운 명인의 반작용으로 인해, 건드리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 유리잔과 같았다.

"놔! 놓으란 말이야!"

소연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단검이 무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스으윽.

붉은 핏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떨어졌지만, 무현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삿갓이 벗겨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그의 얼굴에 난 흉터와 젖은 머리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무현의 품 안에서 소연은 숨이 멎을 듯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 거친 저항도 잠시, 사내의 가슴팍에서 전해져 오는 투박하지만 깊은 온기, 그리고 낯익은 듯 가슴 저 깊은 곳을 울리는 심장 소리 앞에 소연의 몸이 점차 굳어졌다.

두두둑,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을 가르며 떠오른 서늘한 초승달이 월하대의 세 사람을 은빛으로 적셨다.

"……이상해."

소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을 꽉 끌어안은 무현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꾹 쥐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여전히 하얗게 비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충동이 밀려왔다.

"왜 눈물이 나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괜찮다."

무현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서 소연을 업고 달리던 그날 밤처럼,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누구인지 잊었어도 상관없어."

무현의 눈빛이 먼 지평선을 향했다.

강호는 여전히 어둡고, 검은 달의 계약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나아갈 길은 가시밭길일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기억하는 한, 이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소연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주면 된다.

십 년 전 자신이 짊어졌던 그 빚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소연의 기억이 되어주면 그만이었다.

"오라버니……?"

소한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무현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면은 완전히 부서져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자의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형, 저 아이를……."

"걱정 마라."

무현은 소연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내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긴 그 맑은 초승달빛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우리가 기억할 테니까."

월하대의 바람이 거세게 불며 흑월문의 무너진 잔해들을 흩날렸다.

모든 것이 불타고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슬픔을 딛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이름을 써 내려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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