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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51화목차

제51화 두 개의 달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핏빛보다 붉고, 다른 하나는 눈(雪)의 진물처럼 창백한 푸른빛을 띤 흑월(黑月)이었다. 두 개의 달이 강호의 밤하늘을 동시에 점멸할 때마다, 대지 위를 떠돌던 안개는 붉은 피아물(血霧)로 변해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 왔다.

강호 전역이 비명에 휩싸였다.

객잔의 주막거리가, 험준한 산길의 표행(標行) 무리들이, 이름난 문파의 정전(正殿)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차례로 주저앉았다. 무명병(無名病). 검은 달의 계약이 맺어질수록, 그 기운이 강호의 기맥을 잠식할수록 인간의 기억은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제 무슨 칼을 쥐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껍데기로 변해가는 이들이 골목마다 넘쳐났다.

"아…… 내 이름이……."

비틀거리며 쓰러진 노인의 손에서 옥패가 떨어져 구르며 깨졌다.

하늘의 두 달이 품은 중력은 비단 무공을 익힌 고수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영혼마저 짓이기고 있었다.

그 참혹한 현장의 중심, 거대한 암석과 얼어붙은 폭포가 맞닿은 협곡—월하대(月下臺).

서무현의 발치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삿갓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실핏줄처럼 붉은 문양이 돋아나 있었다. 흑천월식검을 쥐고 있는 손등이 검게 타들어가듯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타오르는 숯불처럼 매서웠다.

그의 정면, 부서진 제단의 파편 위에 무림맹주 남궁청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남궁청의 가슴팍에는 거대한 검흔(劍痕)이 패어 있었고, 입가로는 흑백이 섞인 탁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상처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는 듯 미쳐 있었다. 품 안에서 꺼내 든 마지막 '이름 장부'가 손끝에서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느냐, 무현아."

남궁청이 쉰 목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기괴한 집착과 처절한 광기가 엉겨 있었다.

"저 하늘의 두 달은 실수가 아니다. 이 강호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니, 기억을 지우고 모든 것을 리셋하여 완벽한 세계를 새로이 빚어내려는 천명(天命)이다. 내가 모은 이 장부들은 그분을 위한 열쇠야."

"그분의 이름은 장부의 구석에 없다. 네가 찾던 그 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무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남궁청은 십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먼 과거부터 이 거대한 계약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림맹주라는 명예와 정파의 수장이라는 가면 뒤에서,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설원(雪原)의 무녀, 설야.

십 년 전 장원의 화마 속에서, 혹은 그 이전 흑월문과의 어두운 밀약 속에서 사라진 여인. 남궁청은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혹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강호 전체의 기억 속에 억지로 박아 넣기 위해 이 거대한 미친 판을 짜 온 것이었다.

"죽었다고? 아니, 틀렸다. 설야는 죽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가 있는 한, 그녀는 언제든 이 검은 달 아래서 되살아날 수 있다."

남궁청의 눈이 혈안이 되어 무현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무현의 삿갓과 화상 흉터,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백천월광검의 잔여 기운에 닿았다.

"너를 볼 때마다 넌 그녀를 닮았어. 네가 휘두르는 그 검의 궤적도, 눈빛도…… 큭, 가끔은 내가 그토록 잊지 못하던 이의 피가 네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단 말이다. 어쩌면…… 너는 내게서 태어났어야 할 무언가였을지도 모르지."

남궁청의 목소리에 실린 광기는 점차 서늘한 독기로 변해갔다.

그의 말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다. 십 년 전 흑월문 본단과 설원, 그리고 청월장 사이에 얽힌 복잡한 혈연과 계약의 사슬 속에서, 남궁청은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무현을 하나의 '도구'이자 '핏줄'로 여겼던 것이다.

무현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일렁였다.

설마, 하는 의심.

내 아버지가, 혹은 내 생명의 근원이 저 미치광이 맹주와 닿아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지독한 업보는 어디서부터 끊어내야 하는 것인가.

"헛소리 마라."

무현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멀리서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인영이 월하대의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올라왔다.

휘날리는 약초꾼의 누더기 옷자락, 백초였다.

그의 어깨에는 부상을 입은 월소한이 부축되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월소연과 남궁설이 차례로 뛰어내렸다. 소연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은 은은한 금빛을 뿜어내며 붉은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거기서 더 추악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남궁청!"

백초가 품에서 약재가 든 주머니를 내던지며 험악하게 뱉어냈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혐오와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이 미치광이 늙은이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군. 저 녀석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나? 네놈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설야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 네놈의 손에 의해 벼랑 끝에서 떨어져 죽은 무명(無名)의 검객이다! 장주의 옛 벗이자, 네놈의 비열한 그늘에 가려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진짜 검객 말이다!"

남궁청의 얼굴이 한순간 하얗게 질렸다.

"아……."

"그래, 무현이는 네 자식이 아니다. 네가 짓밟고 버렸던 설원과, 네가 탐욕스럽게 삼키려 했던 계약의 장부 속에서 가장 순수한 이름 하나를 지키려다 목숨을 바친 이의 아들이지. 네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백초의 일갈이 월하대의 골짜기를 울렸다.

남궁청은 비틀거렸다. 그가 믿고 있던 신념과 집착의 탑이 단 한마디 진실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내가 틀렸을 리 없다. 내가 그년을 위해 강호 전체를 바치려 했는데……!"

남궁청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 무림맹주가 아니었다. 거대한 빚에 영혼을 잡힌 채, 이름을 잃어버린 채 허우적거리는 비참한 껍데기일 뿐이었다.

남궁청이 미쳐 돌아가는 눈으로 허공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남은 모든 내력을 끌어모아 흑월의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리려 했다. 강호 전체를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막아라!"

무현이 소리치기도 전에, 월소한이 거대한 칠흑 대검을 땅에 내리꽂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소한의 몸에서도 검은 계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뚜렷했다. 십 년 전, 횃불을 들었던 자신의 손으로 이 지옥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네 죗값은 내가 아니라, 이 칼이 치른다, 맹주!"

소한의 대검이 묵직한 파열음을 내며 남궁청의 횡포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쾅—!

지반이 무너지고,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그 틈을 타, 무현은 백천월광검을 역수로 쥐고 단숨에 남궁청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빛과 어둠이 섞인 궤적이 남궁청의 검세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네가 짊어진 빚은 여기서 끝이다."

무현의 검끝이 남궁청의 미간을 겨누는 순간, 하늘의 두 달 중 붉은 달이 거대한 진동과 함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남궁청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래, 내 이름도 이제는 기억해 주는 이가 없겠군."

남궁청의 몸이 빛의 파편으로 부서져 내리며 흩어졌다.

그가 평생에 걸쳐 모았던 모든 '이름 장부'들이 허공에서 하얀 재가 되어 날아갔다. 강호의 밤하늘을 짓누르던 무거운 중력이 한순간에 걷히는 듯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렀다.

남궁청이 소멸한 그 자리, 흑월의 가장 깊은 심장부에서 거대한 흑빛의 소용돌이가 다시 한번 웅장하게 고동쳤다.

죽은 자들의 기억과 이름이 모여 만들어진 결계의 진눈깨비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오라비!"

소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현이 고개를 돌린 순간, 공중에 흩날리던 흑빛의 봉명사(封名絲)들이 뱀의 형상을 하고 튀어 올랐다. 그것들이 향한 곳은 남궁청의 잔재가 아니라, 바로 월소연의 작은 등이었다.

"소연아!"

무현이 몸을 날려 소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계약의 마지막 남은 잔여 의지는 영리하게도 무현을 피해, 그의 뒤에 서 있던 소연의 가슴팍을 정조준했다.

흑월의 진짜 채권자, 그리고 계약의 최종 단계.

열두 권의 장부가 불타 사라진 지금, 검은 달은 새로운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던 초승달 소녀, 월소연의 '이름' 그 자체였다.

소연의 눈앞에 금빛으로 빛나는 새로운 장부의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녀의 몸이 굳어지며, 기억의 조각들이 모래성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소연의 입술 사이로 스러져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승의 유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름은 빚이 아니라 선물이다.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

무현은 부서져 내리는 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하늘의 두 달 아래, 마침내 마지막 결전의 막이 올랐다.

"소연아!"

무현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발걸음을 박차고 나아갔다.

그러나 흑월의 봉명사는 이미 소연의 어깨를 칭칭 감싸고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던 명인(名刃)의 칼날 위로 서늘한 흑기가 스며들며, 소녀의 맑은 눈동자에 어려 있던 초점이 조금씩 흐려졌다.

"내…… 이름이……."

소연이 작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이 불타던 그날 밤의 기억이, 사형의 칼날과 잿더미의 냄새가, 그리고 오라버니들과 함께 보았던 밤하늘의 초승달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달의 계약이 완결되기 위해, 마침내 마지막 남은 가장 순수한 이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안 돼! 그 아이의 이름은 네가 가져갈 수 없다!"

백초가 품에서 수십 개의 침을 꺼내 혈도를 향해 던지려 했으나, 솟구치는 흑빛 중력장은 그의 늙은 육신을 그대로 짓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월소한 역시 칠흑 대검을 짚고 일어 서려 했지만, 전신을 타고 흐르는 반작용에 부르르 떨며 피를 토했다.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절대적인 흑월(黑月)의 결계 안에서, 무현만이 유일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두두두—!

손에 쥔 백천월광검이 울부짖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검신 위로 무현의 핏방울이 스며들자, 억눌려 있던 눈부신 백색 검기가 자욱한 어둠을 찢어발기며 솟구쳤다.

'잊지 마라, 무현아.'

귀가를 때리는 것은 스승 서문 월청의 유언이었다.

'이름은 남이 적어준 장부가 아니라, 누군가가 네 부름에 기꺼이 대답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선물이다.'

"소연아!"

무현이 결계의 중심을 향해 소리쳤다.

그것은 단순히 동생을 구하기 위한 절규가 아니었다.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이 지독한 계약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내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선언이었다.

푸스스스——!

무현의 외침에 반응하듯, 소연의 몸을 죄어오던 흑빛 봉명사들이 파르르 떨리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소연의 흐릿해지던 눈동자에 금빛 광채가 번뜩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무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오라버니. 나를…… 잊지 마."

"네가 기억하는 한, 난 절대로 너를 잊지 않는다. 그러니 내 이름을 불러다오, 소연아!"

콰아아앙——!

월하대 전체가 반으로 쪼개질 듯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무현의 검이 흑월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백천월광검의 눈부신 빛이 칠흑의 결계를 산산조각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두 개의 달 중 핏빛 월식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옅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빗방울처럼 흩날리던 '이름 장부'의 파편들이 하얀 눈꽃으로 변해 대지 위로 내려앉았다.

소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실슬들이 툭 끊어지며 그녀의 작은 체구가 무현의 품 안으로 고꾸라졌다.

무현은 서둘러 소연을 받아안았다. 그녀의 숨결은 가늘었지만, 눈빛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살았어?"

소연이 울먹이며 무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현은 아무 말 없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어깨 위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가슴속을 짓누르던 거대한 짐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후련함이 밀려왔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초가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크흐…… 끝났어. 정말로, 저주 같은 계약이 끝난 거냐……."

소한 역시 대검을 땅에 꽂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핏빛으로 물들어 있던 월하대의 하늘 위로, 붉은 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서늘하면서도 아스라이 하얀 초승달 하나만이 조용히 떠올라 강호를 비추고 있었다.

더 이상 이름을 먹히는 자도, 빚을 추궁하는 대모도, 기억을 지우려는 맹주도 없었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월하대와, 그 위에서 겨우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상처 입은 생존자들뿐이었다.

하지만 무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비록 검은 달의 계약은 깨어졌고 이름 장부는 모두 사라졌으나, 강호의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그들이 남긴 상흔이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무현은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소연을 품에 안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안개 걷힌 강호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삿갓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비가 그친 뒤의 새벽 공기처럼 맑고 서늘했다.

"가자."

무현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손에 들린 백천월광검의 빛이 하얀 달빛과 어우러져 조용히 호흡하고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검객의 진짜 여정이,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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