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강호대전 (중간 고비)
북방 협곡의 밤하늘은 이미 밤이 아니었다.
핏빛으로 칠해진 대기는 진득한 피비린내를 토해내고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대지는 무림의 정(正)과 사(邪)가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해 있었다.
쿵—! 쿵—!
지축이 울릴 때마다 무림맹과 마교의 연합군이 만들어낸 철갑의 파도가 청월장과 산산이 부서진 화산, 소림의 남은 고수들이 버텨내는 방어선을 무참히 짓밟았다.
"비켜라! 이 짐승들아!"
월소한의 입에서 피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칠흑 대검은 이미 적의 피로 완전히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허공에는 으스러진 철갑과 살점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십 년 전, 자신의 손으로 장원에 횃불을 들었던 그 어리석은 소년은 없었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속죄를 위해 스스로를 지옥에 던진 귀신뿐이었다.
하지만 적들은 쓰러져도 끝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 저 자를 보십시오!"
당문(唐門)의 장로가 독혈을 뿜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당문의 암기를 맞고 심장이 관통당한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이 쓰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났다. 그들의 눈동자는 완전히 백탁(白濁)으로 흐려져 있었고, 자아나 고통 따위는 느낄 수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검은 달의 계약.
이름을 먹힌 자들.
남궁청이 강호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심어둔 '무명병'의 군단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피를 흘려도 멈추지 않았다. 자아가 지워진 채 오직 맹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살인 인형들에 불과했다.
"진형이 흔들립니다! 이대로라면 우측의 협곡 입구가 무너집니다!"
월소연의 목소리가 전장을 가르듯 울렸다.
흑월의 살수로 길러졌던 소녀, 이제는 청월장의 장주이자 무현의 의동생인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이 금빛 섬광을 뿜어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던 그날 이후로, 소연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챙강-! 챙강-!
소연이 허공을 차고 오르며 비수를 뿌렸다. 금빛의 이름칼들이 허공을 수놓으며 무림맹 무사들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검은 달의 법칙 속에서, 소연은 아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저들은 이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는 지지 않는다!"
소연의 외침에 뒤에서 피를 흘리며 버티고 있던 남해의 해적들과 소림의 승려들이 다시 한번 합장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마교의 잔류 무리 중 일부 역시 광오한 웃음을 터뜨리며 연합군의 측면을 후볐다. 비록 모래성 같은 동맹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의 공포는 모두를 하나로 묶어놓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버지의 명령을 거두십시오! 그것은 강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전장의 한복판, 무림맹 본진의 기치가 휘날리는 곳에서 청아하면서도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봉명사(封名絲)의 실들이 은빛 달빛을 받아 거미줄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남궁설.
무림맹주의 딸이자, 집법당의 고수였던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봉명사는 적들의 사지를 칭칭 감아 행동을 봉쇄했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이미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설아…!"
남궁청이 친히 이끄는 친위대가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무림맹주 남궁청.
그의 얼굴에는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냉혹하고 비정한 눈빛은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신(神)의 눈을 닮아 있었다.
"어리석은 년. 대의를 위해 작은 가지를 쳐내는 것은 맹주가 할 일이다. 네가 그토록 비호하던 그 이방인 놈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라."
"아버지의 대의는 거짓입니다! 당신이 모으는 장부는 강호를 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당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빚더미일 뿐이에요!"
남궁설이 이를 악물며 손목을 튕겼다. 봉명사의 실들이 남궁청의 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나 맹주의 경지는 그야말로 심원했다. 남궁청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공만으로 폭풍을 일으켜 봉명사의 실들을 사방으로 찢어버렸다.
퍼억-!
"크으윽……!"
남궁설이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친위대의 검이 그녀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설어야!"
그 순간, 전장의 저편에서 한 줄기 칠흑빛 섬광이 폭발했다.
공기를 찢는 중력장과 함께, 빛을 집어삼키는 초승달 참격이 무림맹의 진형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서무현.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새하얗게 바래 있었고, 얼굴의 화상 흉터 위로 검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힘을 너무 많이 쓴 대가로 그의 기억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누구였던가. 나는 왜 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가.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우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스승의 유서 구절.
설원 무녀의 피.
그리고 귓가를 스치는 소연과 소한, 남궁설의 목소리.
‘이름은 빚이 아니라 선물이다.’
무현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쩍였다. 그의 손에 쥔 검이 백천월광검의 찬란한 빛과 흑천의 어둠을 동시에 품었다. 월륜(月輪)의 경지. 어둠과 빛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슈우우욱-!
무현의 몸이 벼락처럼 튀어 올랐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무림맹주 남궁청의 목이었다.
중간에 가로막는 무림맹의 장로들과 무명병 군단들은 그의 검기 한 번에 묵사발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방해하지 마라."
무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판의 소리였다.
타앙-!
무현의 검이 남궁청의 호위 장로 세 명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품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이름 장부' 세 권이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장부의 표면에는 강호 고수들의 이름이 피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무현……!"
마침내 무현과 남궁청이 정면으로 마주 섰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엄청난 내공의 충돌로 인해 일그러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궁청의 손에는 이미 열두 권 중 남은 장부들이 거대한 오라를 뿜어내며 쥐어져 있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이 강호의 뿌리 깊은 계약을 바꿀 수는 없다."
남궁청이 입꼬리를 비틀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마교와 손을 잡았는 줄 아느냐? 강호의 정과 사, 그 모든 구태의 의식을 끝내고, 이 검은 달 아래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다!"
남궁청이 품 안에서 꺼낸 마지막 장부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서 장부가 불타오르며 검붉은 연기가 북방의 밤하늘로 치솟았다.
콰구구구구궁—!
대지가 통째로 요동쳤다.
병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래 하나여야 할 밤하늘의 붉은 달 옆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검은 구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빛을 완전히 삼키고, 세상을 영원한 망각 속으로 집어삼킬 듯한 두 번째 달.
검은 달이 강호의 하늘에 완전히 강림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연합군의 진형에서 누군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북방 협곡의 밤하늘, 핏빛으로 물든 붉은 달의 곁에 도사린 또 하나의 거대한 심연. 빛이라곤 단 일 원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칠흑의 구체, '검은 달'이 마침내 강호의 천장에 그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오르는 순간, 대지는 기괴한 진동에 휩싸였다.
마치 거대한 지각 변동이라도 일어난 듯 바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에서는 붉은빛과 칠흑빛이 뒤섞인 기이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가 스치는 곳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무명병의 껍데기 군단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그들의 백탁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검은 달의 그림자를 반사하며 기묘한 광채를 뿜어냈다.
"크아아아……!"
군단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고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계약의 주인이 내리는 최종적인 강림의 복종, 영혼의 종속을 알리는 환호성에 가까웠다.
"이런 미친 짓을……!"
서무현의 입에서 피가 왈칵 솟구쳤다.
하늘에 떠오른 두 번째 달, 검은 달이 커질수록 무현의 머릿속을 조여오는 고통은 배가 되었다. 십 년 전 불타오르던 청월장의 냄새, 스승이 남긴 유서의 글자들, 그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거대한 중력에 빨려 들어가듯 흩어지고 있었다.
무현아.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환청인지, 아니면 설원 무녀인 생모의 잔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검은 달이 완성되는 순간,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과 '기억'이 완전히 지워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서무현!"
멀리서 월소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연은 쏟아지는 무림맹의 공세를 명인으로 간신히 막아내며 무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와 팔다리에는 깊은 자상이 생겨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소녀의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 달을 내버려 두면 안 돼! 모든 게 끝난다고!"
소연의 뒤를 이어 월소한이 칠흑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온몸은 적의 피와 자신의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 칼이 저 문드러진 달의 목을 칠 수 있다면, 지옥에 열두 번이라도 떨어져 주마!"
소한의 눈에 깃든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십 년 전 멍청하게 횃불을 들었던 자신의 손을 원망하며, 이제는 그 죗값을 치르겠다는 처절한 결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아무리 뜨거워도, 하늘의 검은 달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중력장은 정·사 연합군의 모든 무사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내공이 깊지 않은 이들은 이미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정신을 잃은 이들의 몸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기억의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하하하! 보았느냐!"
남궁청이 미친 듯이 웃어제켰다.
그의 손에 쥐어진 마지막 장부들이 검은 달의 빛을 받아 가루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장부에 적힌 강호 수천 명의 이름이 계약의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진정한 정화다! 껍데기뿐인 의리와 명예, 그 더러운 기억과 빚을 모두 지우고, 이 남궁청이 다스리는 완벽한 영원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남궁청의 몸 주위로 칠흑 같은 오라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채, 검은 달의 대리인으로서 강호를 집어삼킬 신이 되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남궁설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외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이 바라던 세상이 고작 이런 허무맹랑한 껍데기들의 세상입니까? 어머니가,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한 이유가 당신의 그릇된 망령을 채우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시끄럽다, 설아."
남궁청은 딸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든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푸르스름한 살기를 뿜어냈다.
"너마저 내 대의를 방해한다면, 네 이름 또한 저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에 기록해 주마."
찰나의 순간, 남궁청의 검기가 남궁설의 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너무나도 무자비하고 순식간의 일격이었다. 남궁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할 겨를도, 방어할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챙—!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남궁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 무현?"
남궁설의 눈이 커졌다.
서무현이었다.
기억이 지워져 가는 고통 속에서도, 무현은 월륜(月輪)을 둘러싼 검을 들어 남궁청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백색의 섬광과 칠흑의 어둠이 격돌하며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무명병 군단들이 그 충격파에 밀려 낙엽처럼 사방으로 쓸려 나갔다.
"네 녀석……!"
남궁청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무현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흑천월식검의 어둠과 백천월광검의 빛이 그의 안구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머릿속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서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스승이 남긴 유언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이름은 빚이 아니라 선물이다.’
"내 이름은……."
무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칼을 쥔 손에 더욱 강한 힘을 주며 남궁청을 밀어붙였다.
"누구의 빚도 아니다."
콰아아앙—!
무현의 검에서 터져 나온 백색의 검기가 남궁청의 칠흑 같은 오라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남궁청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품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장부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하늘의 검은 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완전한 침묵으로 세상을 삼키려던 검은 달의 중심부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내 계약이……!"
남궁청이 경악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달의 표면을 타고 거미줄 같은 금빛 균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현이 지켜낸 '이름'들의 반격이자, 강호의 무사들이 아직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라버니!"
월소연이 외쳤다.
소연과 소한, 그리고 남궁설과 살아남은 동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무현의 뒤로 집결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끝내자."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에 든 검이 백색의 찬란한 빛과 흑천의 초승달 그림자를 동시에 품었다.
강호 전체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혈투, 그 정점에서 두 개의 달이 떠오른 하늘이 서서히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