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마교의 문
차가운 안개가 협곡을 집어삼켰다.
시즌2의 거대한 소용돌이는 강호의 정중앙을 넘어, 금지의 땅이라 불리는 북방과 서역의 경계, 마교(魔敎)의 영지로 무현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철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협곡의 입구는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한 줌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천마신교(天魔神敎)의 본산인가.”
월소연이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은 은은한 금빛을 품은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천월광검의 기운을 얻은 이후, 소연의 검은 단순한 살인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과 기억을 되찾는 성스러운 불빛에 가까웠다.
그녀의 곁에는 여전히 붉은 가면을 벗지 못한 월소한이 무거운 대검을 질질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을 태웠던 횃불의 무게는 이제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쇳덩이가 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가만히 소한의 옷자락을 잡았다. 소한은 가면 너머로 탁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현은 그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철문(鐵門)을 바라보았다. 흑월문의 칠흑 같은 어둠과는 또 다른, 날것의 광기와 생명력이 뒤섞인 마교의 기운. 그 기운 속에서 무현의 가슴 한구석, 잊혀졌던 설원의 기억이 날카롭게 요동쳤다.
‘계약의 빚은 강호 전체로 번질 것이다.’
무림맹주 남궁청이 남긴 암묵적 경고는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장부를 손에 넣기 위해, 그리고 검은 달의 계약을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사자의 굴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멈춰라.”
낮고 묵직한 음성이 협곡의 벽을 타고 울렸다.
두둥- 둥-!
거대한 철문 위로 붉은 화툿불이 일제히 피어오르며, 칠흑의 갑주를 차려입은 마교의 사대호법(四大護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검은 달의 파편에 잠식당한 자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허무와 갈증만이 서려 있었다.
“천마신교의 성지에 발을 들인 자, 목숨을 내놓거나 이름을 바쳐라!”
사대호법 중 수장이 단숨에 허리춤에서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월도(月刀)를 뽑아 들었다. 그 순간, 그가 내뿜는 투기가 공기를 가르며 무현 일행을 압박해왔다.
“우리는 마교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무현이 삿갓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달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부를 찾으러 왔다. 길을 비켜라.”
“장부? 하하하! 흑월의 찌꺼기들이 감히 천마의 영역에서 장부를 논하다니! 이곳은 이미 검은 달이 지배하는 제단이다. 그 장부 또한 교주님의 손에 들어갔으니, 너희들의 목숨도 그분의 제물에 불과하다!”
호법의 포효와 함께 사방에서 수백 명의 마교 무사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전투는 예고도 없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사대호법의 월도가 땅을 내리찍자, 거대한 균열이 무현의 발밑까지 치달았다.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흑월문의 금기 무공인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변형된 형태였다. 마교 역시 검은 달의 계약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오라버니!”
소연이 외침과 함께 금빛 명인을 뽑아 들었다. 슈우우욱- 소연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천월광검의 빛줄기가 사방을 뒤덮은 흑색 중력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이 부딪치는 순간, 협곡 전체가 거대한 비명 소리를 질렀다.
소한은 칠흑 대검을 들어 마교 무사들의 진형을 단숨에 두어 쪽으로 갈라놓았다. 그의 칼끝에는 살기 대신 처절한 속죄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사대호법의 공세는 너무나 맹렬했다. 네 명의 고수가 동시에 뿜어내는 암흑의 기운은 무현의 숨통을 조여왔다.
“크윽…!”
무현의 어깨 위로 붉은 피가 튀었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는 것들이 늘어났다. 스승 서문 월청의 얼굴, 십 년 전 장원의 온기, 그리고 자신의 본명인 ‘서무현’이라는 세 글자까지.
안 돼. 아직은 아니야.
무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검을 고쳐 잡으며 온몸의 혈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무현의 등 뒤로 백야(白夜)의 환영이 떠올랐다. 설원 무녀 설야의 혈통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빛이여. 이름을 되찾는 빛이여.
“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 — 개화(開花).”
무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순백의 광채가 밤하늘을 태울 듯이 치솟았다. 그것은 어둠을 삼키는 검은 달의 중력장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기적적인 섬광이었다.
파아아앗-!
사대호법이 뿜어내던 칠흑의 투기가 단 한 번의 검식에 박살 나며 그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호법들의 눈동자에서 검은 달의 흔적이 점차 걷히고 있었다.
“크… 으윽… 교주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호법의 마지막 말이 사그라들 무렵, 거대한 마교의 본전 문이 양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웅장한 악기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인물들이 걸어 나왔다. 그 맨 앞에는 흑금색 도포를 걸치고, 얼굴의 절반을 가면으로 가린 마교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놀랍게도, 무림맹에서 남궁설이 탈취해 갔던 그 ‘이름 장부’ 두 권이 들려 있었다.
“잘 왔다, 검객.”
마교주의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익숙하면서도 낯선 메아리를 담고 있었다. 그는 장부를 가볍게 던지듯 손에 쥐며 무현을 향해 걸어왔다.
“네가 찾던 빚의 정보다.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기도 하지.”
무현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검을 겨누며 물었다.
“네 정체가 뭐냐. 흑월문주도, 남궁청도 아닌 네가 왜 이 장부를 가지고 있는 거지?”
마교주는 가만히 웃으며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흉측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청명했다. 그것은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서 보았던 누군가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정체라니. 나는 단지 계약의 참상을 가장 먼저 깨달은 자일뿐이다.”
마교주가 장부를 무현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너희들은 남궁청이 이 장부를 모아 강호를 지배하려 한다고 믿고 있겠지. 무림맹의 그 위선자가 세계를 삼키려 한다고 말이다.”
마교주는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구름 사이로 기이하게 찌그러진 검은 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틀렸다. 남궁청도, 나도, 그리고 십 년 전 너희 장원을 불태운 자들도… 모두 그 달의 장난감에 불과해. 진짜 적은 무림맹도, 마교도 아니다. 달 그 자체다. 이 강호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빚더미로 만들려는 그 악랄한 채권자 말이다.”
무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름은 빚이 아니라 선물이다.’
문득 스승의 유서 속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교주는 장부를 무현에게 밀어주며 차갑게 선언했다.
“장부를 가져가라. 그리고 그 끝에서 네가 누구인지 확인해라. 다만… 그 대가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할 것이다.”
그때, 협곡의 입구 쪽에서 대지 전체가 울리는 듯한 거대한 함성과 함께 무수히 많은 깃발이 밀려 들어왔다.
무림맹의 깃발이었다.
철면으로 무장한 집법당 고수들과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이 협곡을 완전히 포위한 가운데, 그 맨 앞에서 남궁청이 차가운 은빛 장검을 겨누며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위선적인 미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교와 흑월의 잔당들이여, 그리고 내 딸을 홀린 역적들이여.”
남궁청의 서늘한 목소리가 협곡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오늘부로 무림맹과 천마신교는 하나가 된다. 강호의 모든 이름을 거두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노라. 맹·마 연합(盟魔聯合)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사형에 처한다!”
검은 달빛 아래, 무림맹주 남궁청과 마교주, 그리고 서무현 일행이 한자리에 마주 섰다.
시즌2의 가장 거대한 전쟁, 강호대전의 서막이 피칠해진 협곡 위에 잔인하게 올랐다.
남궁청의 서늘한 선언이 협곡의 암벽에 부딪혀 기괴한 메아리를 낳았다.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과 마교의 잔당들이 서로 칼끝을 맞추던 이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남궁청의 입에서 ‘맹·마 연합’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측의 고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무현 일행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것은 우연한 대치가 아니었다. 애초에 강호의 패권을 쥐기 위한 거대한 판이 이 북방의 협곡 위에서 짜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무림맹주를 향해 다가가던 남궁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장부를 탈취해 강호의 비밀을 폭로하려 했으나, 그 기획 자체가 이 거대한 연합이라는 이름의 거미줄에 걸려들었던 미끼에 불과했던 셈이다. 남궁청은 딸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무현의 손에 들린 장부와 그가 쥔 검을 응시했다.
“서무현. 네놈이 살아남아 이 북방까지 기어올 줄은 몰랐다. 십 년 전, 청월장의 잔해 속에서 타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남궁청의 목소리에는 일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달의 의지가 대변하는 심판관의 선고에 가까웠다.
무현은 마교주가 던져준 장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가죽 표면의 감촉이 기묘하게도 자신의 심장박동과 공명하고 있었다.
‘내 이름의 빚… 그리고 강호의 기억.’
무현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져 가던 과거의 조각들이 억지로 꿰맞춰지듯 통증을 동반하며 밀려왔다. 설원의 눈보라 속에서 자신을 품에 안았던 어머니 설야의 눈물, 십 년 전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화염, 그리고 스승 서문 월청이 쥐여주었던 낡은 옥패까지. 그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지금 이 순간, 손에 쥔 장부 속 글자들과 하나씩 겹쳐지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태운 자가, 이제 와서 새로운 질서를 논하겠다고?”
무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 달빛과 백색의 월광이 소용돌이치듯 엉켰다.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강탈이다. 인간의 기억과 자아를 담보로 잡고, 이 강호를 거대한 꼭두각시 극장으로 만들려는 짓거리일 뿐이지!”
마교주는 가면 너머로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자조와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래, 검객의 말이 맞다. 남궁청, 네가 아무리 장부를 모아 천마의 힘과 무림맹의 권력을 하나로 묶는들 바뀔 것은 없다. 검은 달은 우리 모두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니까.”
마교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다.
쾅-!
천장을 찌를 듯이 솟아있던 북방의 암벽 중턱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검은 달의 기운이 극에 달한 것인지, 밤하늘의 둥근 달이 마치 거대한 핏방울처럼 붉게 물들며 사방으로 기괴한 중력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호대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더 이상 말 따위는 필요 없다.”
남궁청이 은빛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찬혹한 투기가 대지를 가르며 무현을 향해 직격해 들어왔다. 동시에 무림맹의 집법당 고수들과 마교의 사대호법이 남은 전력을 짜내어 일제히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오라버니!”
월소연이 금빛 명인을 휘둘러 날아오는 비수를 쳐냈고, 월소한은 칠흑 대검을 땅에 박아 넣어 사방에서 몰아치는 중력장의 충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맹과 마가 연합한 고수들의 물결은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이었다.
“무현!”
소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협곡은 빛과 어둠이 뒤섞인 참혹한 혈투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무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든 장부를 품에 단단히 갈무리하고, 백천월광검의 기운을 영혼의 깊은 곳까지 끌어올렸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타인의 기억이 아닌 ‘나 자신의 의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슈우우우욱-!
무현의 검끝에서 터져 나온 백색의 광채가 사방을 뒤덮은 칠흑의 어둠을 정면으로 갈라놓았다. 빛과 어둠이 부딪치며 발생하는 폭풍이 협곡의 바위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내 이름의 무게다!”
무현의 외침과 함께, 설원의 무녀가 남긴 혈통의 기적과 십 년간 묵혀온 복수의 검식이 하나로 합쳐졌다.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맹·마 연합의 전열을 정중앙부터 두 쪽으로 갈라놓으며 남궁청의 코앞까지 치달았다.
남궁청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검을 맞받아쳤다.
“어리석은 놈!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친들, 검은 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느니라!”
두 개의 거대한 무공이 충돌하는 순간, 협곡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한 비명을 질렀다.
하늘 위 검은 달은 더욱 붉게 타올랐고, 강호의 운명을 건 최종 결전의 막이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참상 속에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