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남해의 배
[원고]
제48화. 남해의 배
1
바다는 칠흑이었다.
하늘에 걸린 달이 피처럼 붉어질 때면,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오는 파도마저 잿빛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렸다. 남해(南海)의 밤바다는 살기를 품은 안개로 가득했다. 시야를 삼키는 짙은 해무 속에서 거대한 목선 한 척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남해 해적왕, 철무신(鐵武神).
그는 자신의 기함인 ‘흑상어호(黑鮫號)’의 선창 깊은 곳에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두꺼운 가죽 장부를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크흐흐…… 이게 대체 얼마짜리 물건인가.”
철무신의 한쪽 눈은 오래전 강호의 난투에서 잃어버려 흉측한 흉터로 덮여 있었고, 나머지 한쪽 눈은 탐욕과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장부의 표면에 새겨진 금빛 글자들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남해의 악귀들이나 삼킬 법한 저주받은 이름들이었다.
이름을 빚지고, 영혼을 저당 잡힌 자들의 기록.
흑월문이 강호 뒤편에서 모으던 ‘이름 장부’ 중 제칠권과 제팔권이 바로 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문주 놈이 죽었다고 하니, 이제 이 남해 바다에선 내가 곧 법이다. 이 장부만 있으면 무림맹의 늙은이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큭큭……!”
철무신이 장부를 품에 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려던 그때였다.
쾅—!
배의 선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기함의 갑판 위가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 전체가 위아래로 거칠게 곤두박질쳤다.
“뭐야?! 적습이냐!”
철무신이 허리춤의 거대한 장도를 빼 들며 선창 문을 박차고 나갔다.
2
갑판 위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해적들이 칼을 뽑아 들고 우왕좌왕했지만, 그들의 상대는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괴물들이었다.
콰아아앙—!
공중으로 솟구친 검객의 검끝에서 칠흑 같은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뿜어져 나왔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거대한 해일을 양쪽으로 갈라놓았다. 물보라가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무현이었다.
그의 삿갓 밑으로 드러난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손에 쥔 검에는 핏빛 잔광이 서려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저놈을 난도질해!”
해적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지만, 무현이 검을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폭풍 같은 검압이 몰아치며 수십 명의 해적들을 바다로 날려버렸다. 빛을 지우는 검격은 남해의 밤바다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칠흑 대검을 든 붉은 가면의 남자, 월소한이 거친 숨을 내쉬며 갑판에 착지했다. 그의 대검이 바닥을 내리찍자, 단단한 철갑으로 보강된 갑판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철무신, 네놈의 장난질도 여기까지다.”
소한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쩍 갈라져 있었다.
그는 눈앞의 거대한 해적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이 불탈 때, 잿더미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철무신은 그 시절, 흑월문과 손을 잡고 남해의 밀항로를 열어주던 뒷골목의 도둑놈이었다.
“크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흑월문의 미친 개, 월소한 아니냐!”
철무신이 거대한 장도를 끌며 갑판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놈이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문주가 죽었다고 해서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나? 넌 그저 버려진 개새끼일 뿐이야!”
철무신이 칼을 치켜들며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남해의 강풍이 그의 흉측한 흉터를 스치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3
소한이 검을 겨누려던 순간, 무현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현의 시선이 철무신이 아니라, 그가 품에 품고 있는 두꺼운 가죽 장부를 향했다.
“소한.”
무현의 낮은 목소리에 소한이 멈칫했다.
철무신은 두 사람의 기세에 잠시 침을 꼴깍 삼켰지만,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왜, 그 장부가 네놈들의 목을 죄고 있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도 되냐? 크흐흐, 아쉽게도 이 장부는 이미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걸 무림맹에 넘기든, 마교에 팔아넘기든 내 마음이지!”
“……철무신.”
소한이 가면 속에서 낮게 신음했다.
그는 철무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십 년 전, 흑월문의 그늘 아래에서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하던 하수인. 그 시절, 소한 역시 그들과 어울려 칼을 휘둘렀던 적이 있었다. 비록 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횃불을 들었을지라도, 강호의 어둠 속에서 이름 없는 시체로 뒹굴던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들이 그곳에 있었다.
“기억하나, 철무신.”
소한이 천천히 가면을 위로 밀어 올렸다.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화상과 검흔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벼려진 검처럼 예리했다.
“십 년 전, 흑월곡의 지하실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술잔을. 네가 내게 그랬지. 언젠가 이 지독한 어둠을 벗어나면, 우리도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철무신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외눈이 크게 흔들렸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월소한! 옛날 일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강호는 힘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름을 팔아먹든, 영혼을 팔아먹든 살아남는 놈이 왕이야!”
철무신이 악을 쓰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한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기운이 철무신을 압박해 들어갔다.
“네가 이름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이유를 안다, 철무신. 너 역시 무명병이 도지고 있지 않나. 네가 누구였는지, 네가 왜 이 바다로 도망쳐 왔는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잖아.”
“입 다물어……!”
“그 장부 속에는 네가 잃어버린 이름의 조각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걸 품에 안고 있어 봤자, 너는 결국 껍데기가 될 뿐이야. 흑월문이 네게 준 것은 구원이 아니라, 영원히 깨지지 않는 족쇄였다.”
소한의 말은 독화살처럼 철무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철무신은 숨을 헐떡이며 품속의 장부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금빛 글자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운 듯 철무신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큭…… 크아아악!”
4
철무신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장부가 뿜어내는 저주가 그의 남은 자아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장부를 넘겨라, 철무신.”
무현이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무현의 검끝이 철무신의 목덜미에 닿았다.
철무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무현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들은…… 모른다…… 이 이름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지옥이 어떤지……!”
“알고 있다.”
무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렸던 자였다. 낙가암의 암흑 속에서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 하나에 겨우 자아를 붙들어 맸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빚은 여기서 끊어야 한다.”
무현이 손을 내밀었다.
철무신은 몸을 바르르 떨며 품속에서 두꺼운 가죽 장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쿵.
장부가 갑판 위에 떨어지며 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철무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름을 빚진 대가로 자아가 부서져 가는 징후였다.
소한이 바닥에 떨어진 장부 제칠권과 제팔권을 집어 들었다.
손에 쥐어지는 순간, 장부의 글자들이 소한의 손등을 타고 흐르려 했으나, 소한은 이를 악물고 내력으로 그 저주를 눌러 담았다.
“……두 권을 더 확보했다.”
소한이 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마교(魔敎)의 수중에 있는 장부뿐이다.”
강호 전체를 삼키려는 검은 달의 계약.
그 마지막 조각을 찾기 위해,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5
바람이 거세졌다.
흑상어호의 난간가에서 숨을 고르던 두 사람의 뒤로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두 사람.”
청초한 목소리였다.
남궁설이었다.
그녀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갑판 위에서도 하얀 옷자락을 더럽히지 않은 채, 차분한 눈빛으로 무현과 소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은실, 봉명사(封名絲)가 부드럽게 감겨 있었다.
무현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
“남궁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라.”
남궁설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곳 따위는 없어요, 무현 씨. 아버지는…… 무림맹주는 이미 내게 기대하는 걸 멈추셨으니까요.”
소한은 그녀를 불신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건 칭찬해주마. 덕분에 장부 두 권을 손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네 속내를 아직 다 믿은 건 아니다.”
“의심하는 건 자유예요.”
남궁설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소한이 손에 쥐고 있던 장부 쪽으로 걸어갔다.
무현이 경계하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던 그 순간, 남궁설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봉명사가 빛을 발하며 날카로운 실의 군단으로 변해 소한의 목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뭐 하는 짓이냐!”
소한이 대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봉명사는 소한의 사지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었다.
동시에, 남궁설의 품속에서 은빛 부적이 터져 나오며 사방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기함의 사방에서 매복해 있던 무림맹의 정예 고수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무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설아……!”
무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남궁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남궁설의 얼굴에는 냉혹함 대신,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소한의 손에서 방금 확보한 장부 제칠권과 제팔권을 가로채 품에 안았다.
6
“미안해요, 무현 씨.”
남궁설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혀 떨렸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흘렀다.
“내가 이걸 가져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 않아요. 장부의 힘이 필요해요. 강호의 질서를 지키려면…… 흑월문의 계약을 무림맹이 통제해야만 한다고요.”
“그게 네가 말하던 정의인가.”
무현의 목소리는 지옥의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손에서 흑천월식검이 칠흑 같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중력장이 폭발할 기세를 보였다.
남궁설은 그 압도적인 살기 앞에서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 안은 두 권의 장부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용서하지 말아요. 나를 원망해도 좋아요.”
남궁설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그녀의 퇴로를 에워싸며 방어막을 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버지가…… 무림맹주가……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니까요.”
남궁설의 마지막 말과 함께, 무림맹의 연막탄이 터지며 갑판 위가 짙은 백색 연기로 뒤덮였다.
연기가 걷혔을 때, 남궁설과 무림맹의 정예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갑판 위에 남은 것은 쓰러진 해적들과,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는 무현,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사슬을 끊어내는 소한뿐이었다.
붉은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강호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