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설원의 불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여전히 뼛속까지 시렸다.
강호의 중심에서 밀려나 북방의 끝자락, 거친 눈보라와 앙상한 자작나무만이 지키고 선 황폐한 설원 마을. 이곳은 십 년 전, 흑월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드리워졌던 장원의 잔해가 묻힌 곳이자, 서무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던 원죄의 고향이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그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차가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달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오히려 너무나 투명하고 시려서, 보는 이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설원의 고요를 갈랐다.
마을 어귀의 낡은 울타리가 폭발하듯 부서져 내렸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흑색 삿갓을 깊게 눌러쓴 검객, 서무현이었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혈흔이 하얀 눈밭 위에 툭툭 떨어져 붉은 매화꽃처럼 피어났다.
"크윽……!"
무현의 무릎이 한쪽으로 꺾였다. 그가 짚은 검의 끝이 눈밭을 깊게 파고들었다.
지독한 한기였다. 그것은 단순히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 안에서 요동치는 계약의 잔여물, 그리고 그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무력감이 온몸의 피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시야가 아득하게 흔들렸다. 눈앞에 환영처럼 십 년 전의 밤이 겹쳐졌다.
타오르는 불길,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살려달라 비명 지르던 이들의 목소리.
두 번째 장원의 불.
지독하게 반복되는 비극이었다. 흑월문이 무너지고 흑월의 채무자들이 하나둘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원에 남겨진 원죄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거세어져 이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을 중앙의 큰 가옥에서 시뻘건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 속에서, 은백색 도포를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무림맹주, 남궁청.
그의 얼굴에는 일그러진 자비와 광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하고 거대한 검은 책, ‘이름 장부’의 잔해가 들려 있었다. 책의 페이지가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금빛의 글자들이 비명처럼 흩어졌다.
남궁청이 차가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은 무현을 내려다보았다.
"장하다, 무현아. 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흑월문의 본단을 무너뜨리고, 내 대리인들을 처단하며 올라온 그 집념만큼은 칭찬해 마지않겠다."
남궁청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빙하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무현은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흑천월식검의 검신이 덜덜 떨렸다.
"남궁청…… 네가 노리는 건 장부가 아니다. 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기억이지."
"기억? 아니,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열쇠’다."
남궁청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
"설야, 그 여인이 남긴 설원의 비기(秘技)이자, 이 강호의 이름을 재편할 유일한 진실. 너는 그 여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면서도, 그 가치를 몰라. 멍청하게도 빚을 갚겠답시고 이곳을 기어들어 왔지."
남궁청이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공간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엄청난 중력의 파동이 무현을 향해 짓눌러 섰다.
쿠구구구궁—!
"크윽!"
무현이 검을 가로저어 흑천월식검의 참격을 날렸으나, 남궁청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의 검기(劍氣) 앞에 눈 녹듯 사라졌다.
압도적이었다. 격이 다른 무공의 차이.
남궁청은 단순한 무림맹주가 아니었다. 그는 십 년 전부터 흑월의 계약 이면에서 모든 것을 조율해 온 진짜 채권자이자, 이름을 탐하는 괴물이었다.
콰아아앙!
직격탄을 맞은 무현의 몸이 백여 미터를 미끄러지며 설원의 바위벽에 강하게 부딪쳤다. 바위가 산산조각 나며 무현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현 오라버니!"
멀리서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월소연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이 눈부신 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남궁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소연아, 오지 마!"
무현이 다급히 외쳤으나, 소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기가 서려 있었다. 십 년 전, 가족을 잃고 흑월의 살수로 길러졌던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오라비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다.
챙랑랑랑—!
소연의 명인이 남궁청의 장부를 향해 거침없이 내리꽂혔다. 금빛 검광과 남궁청의 기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섬광이 튀었다.
그러나 남궁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왼손을 들어 소연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을 뿐이다.
"기특하구나. 흑월이 키워낸 마지막 자식인가. 하지만 네 검으로는 내 장부의 무게를 베지 못한다."
"큭……!"
소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명인의 금빛이 남궁청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이름의 무게를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이 소연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무명병의 전조 증상인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때였다.
"거기까지다, 남궁청!"
쩌억, 쩍!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뛰어들었다.
붉은 가면은 벗겨져 있었고, 얼굴 전면에 십 년 전의 화상과 흉터가 그대로 드러난 남자—월소한이었다.
그의 손에는 칠흑 같은 대검이 들려 있었다. 대검의 무게만 수십 근에 달하는, 살수로서의 모든 업보가 담긴 검이었다.
"소한 오라버니!"
"물러서 있어, 소연아."
소한의 눈빛은 핏발이 서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는 십 년 전, 흑월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이 장원에 스스로 횃불을 던졌던 방화범이었다. 평생을 그 죄책감과 환청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던 그였다.
소한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지은 불이다. 내 손으로 끝낸다!"
소한이 괴성과 함께 대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지면이 통째로 갈라지며 엄청난 충격파가 남궁청을 향해 쇄도했다. 그 틈을 타 소한은 뒤로 몸을 날려, 불길에 휩싸인 마을 가옥의 문을 부수고 뛰어들었다.
안에는 피난 가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다.
십 년 전의 자신들처럼, 겁에 질려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불길 속에 갇혀 있었다.
"이쪽이다! 빨리 나와!"
소한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밖으로 던지듯 밀어냈다. 마을 아이들은 눈밭을 구르며 살기 위해 도망쳤다. 소한은 마지막 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낸 직후, 무너져 내리는 서까래 아래 홀로 남겨졌다.
쿵—!
"오라버니――!"
소연의 비명이 설원을 울렸다.
소한은 무너지는 나무 기둥에 깔린 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모양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드디어…… 빚을 갚았다.’
불길이 소한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십 년 전의 죄악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태우는 것으로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쓸데없는 자식."
남궁청은 소한의 최후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시 무현과 소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해꾼은 치웠다. 이제 네 차례다, 무현아."
남궁청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등 뒤로 수십 장의 금빛 장부가 공중에 떠올라 거대한 진(陣)을 형성했다. 장부마다 강호 수백 명의 이름이 붉고 검은 글자로 적혀 있었다. 그것은 강호 전체의 생사를 좌우하는 계약의 총합이었다.
남궁청이 그 장부를 무현을 향해 일제히 사출하려는 순간—
"내가 남의 장부를 그렇게 쉽게 쓰게 내버려 둘 줄 알았느냐?"
청명하고도 맑은 목소리가 설원의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지친 줄 알았던 무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어머니 설야로부터 물려받은 순수한 백색의 검광—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이었다.
무현이 일어섰다. 그의 등 뒤로 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기억, 이름, 그리고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찬란한 금빛과 백색의 오라로 피어올랐다.
"소연아!"
무현의 외침과 동시에, 소연이 정신을 차리고 명인을 높이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검이 하나로 겹쳐졌다. 흑과 백, 달과 빛의 합일.
"월륜(月輪)!"
콰아아아아아아궁—!
하늘의 보름달이 빛을 잃을 정도로 눈부신 참격이 폭발했다.
남궁청이 펼쳐낸 장부의 진(陣)이 소용돌이치는 검광 속에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크윽…… 이게 무슨 빛이지? 이건 계약이 아니다! 이건……!"
남궁청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그것은 빚이 아니라, 타인의 이름을 빼앗는 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온전한 자아의 무게’였다.
파지직, 파지직—!
남궁청이 손에 쥐고 있던 첫 번째 장부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소연의 명인이 남궁청의 어깨를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붉은 피가 튀었지만, 그것은 남궁청의 피가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빼앗아 온 타인들의 이름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크아아악……!"
남궁청이 뒤로 비틀거렸다. 그의 몸에서 강호의 이름들이 흩어지며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소멸은 아니었으나, 그가 지닌 권능의 절반 이상이 부서져 나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내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궁청은 이를 갈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백천월광검의 여파와 소연의 명인이 만들어낸 결계가 그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결국 남궁청은 피를 토하며 거대한 눈보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잔상을 남기며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절대자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쫓기는 패배자의 비참한 말로에 불과했다.
고요가 찾아왔다.
타오르던 불길은 소한이 남긴 희생과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설원의 차가운 바람이 다시 매섭게 몰아치며 남은 연기를 날려버렸다.
무현은 검을 거두며 비틀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더 이상 흑월의 저주에 사로잡힌 껍데기가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자신의 이름, ‘서무현’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달려와 무현을 부축했다. 그녀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멀리, 마을의 무너진 회관 앞.
십 년 전부터 이 마을을 지키며 묵묵히 늙어갔던 촌장이 쓰러져 있었다.
무현과 소연이 다급히 다가가 촌장의 상체를 일으켰다. 촌장은 주름진 손으로 무현의 뺨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그의 흐릿해진 눈동자에 무현의 얼굴이 담겼다.
"결국…… 해냈구나…… 무현아."
"촌장님, 정신 차리세요. 의원을 부를 겁니다."
"아니다…… 내 시간은 이미 다 되었다. 십 년 전 그날 밤부터, 나는 이 장원의 빚을 갚기 위해 살아왔을 뿐이야……."
촌장의 붉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이제…… 설원에 더 이상 불은 없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만 떠돌아거라……."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촌장의 손이 눈밭 위로 떨어졌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설원 위로, 그의 눈을 감겨주는 무현의 손이 조용히 떨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걷힌 밤하늘에는 달빛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비극의 땅, 설원의 불은 꺼졌다.
그러나 그 재 속에서 피어난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남은 장부: 맹주 6, 무현 1, 행방불명 5]
남겨진 장부의 숫자가 머릿속을 스쳤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현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는 소연의 손을 잡고, 눈보라가 치는 설원을 뒤로 한 채 새로운 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