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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4화목차

제44화 달 속의 어머니

눈을 감자 눈앞이 번쩍였다.

세계는 색을 잃었다. 검은 먹물과 흰 종이의 경계처럼, 세상은 오직 음영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묵화(墨畵)로 환원되어 있었다. 귓가를 때리던 쟁투의 함성도, 칼날이 부딪치는 파열음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한기(寒氣)와, 사방을 압도하는 거대한 칠흑의 공허뿐이었다.

무현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밑은 단단한 대지가 아니었다. 투명하고 차가운 거울 같은 수면(水面) 위를 걷는 듯,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파문이 일었다.

――아들아.

환청인지, 아니면 영혼의 울림인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어야 할 공간에는 거대하고 붉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달의 표면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금빛 실처럼 얽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흑월문의 장부에서 보았던 그 부정한 문양들이 하늘을 가득 메운 채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는.”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애초에 가져본 적조차 없다고 믿었던 온전한 울림이었다.

문득 허리춤에서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설원 무녀의 일족이 건네준 백천월광검의 검병(劍柄)이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미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광휘가 무현의 발치를 감싸 안으며 칠흑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빛이 닿은 곳에서, 시공간이 겹쳐지듯 풍경이 왜곡되었다.

거대한 설산(雪山)의 정봉(頂峰).

매서운 눈보라가 온 세상을 하얗게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절벽 끝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사방으로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은 눈보라 속에서 짐승의 털처럼 흩날렸고, 온몸에는 흑월의 저주를 상징하는 붉은 문양이 뱀처럼 얽혀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갓난아기 하나가 안겨 있었다. 앙증맞은 손발을 버둥거리며 울음을 터뜨려야 할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잠든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이름은 이미 흑월의 장부에 기입될 운명이었기에, 그 존재 자체가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었다.

“설야(雪夜)님.”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벽 아래에서 올라온 것은 젊은 날의 서문 월청이었다. 청월장의 장주가 되기 전, 아직 눈빛에 슬픔과 야망이 공존하던 시절의 그였다. 서문 월청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붉은 장부를 쥔 채 설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와 죄책감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계약의 시간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바치지 않으면, 이 설원의 일족 전체가 흑월의 어둠 속에서 소멸할 것이다. 대모가 기다리고 있다.”

설야는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눈보라 속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작은 생명체.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눠 낳은 유일한 혈육.

여인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품 안의 아이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흑월의 계약은 무자비했다. 소원을 비는 자는 그 대가로 가장 소중한 것의 '이름'을 바쳐야 했다. 설야는 일족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저당 잡혔고, 이제는 마지막 남은 비장의 혈육마저 계약의 제물로 바쳐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월청.”

설야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눈보라 소리에 묻힐 듯 가늘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지는 칼날보다 예리했다.

“이 아이는 계약의 제물이 될 수 없다. 이 아이는…… 나의 ‘이름’을 이어받지 않았어.”

“무슨 소리인가! 장부에 이미 이 아이의 낙인이 찍혔다! 거부할 수 없어!”

“거부할 수 없다면, 내가 찢어버리겠다.”

설야가 기이한 형상의 단도를 꺼내어 자신의 심장 부근을 겨눴다.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으나, 그저 살기(殺氣)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모성(母性)의 불꽃이었다.

“내 이름을 더 바치마. 내 남은 생애의 모든 기억과, 타인이 나를 기억하는 모든 흔적을 이 장부에 다 써넣겠다. 그러니…… 이 아이의 이름만은 장부에서 지워다오.”

“설야! 미쳤느냐! 네가 네 존재 자체를 지우면, 너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게 돼! 이 아이조차 너를 어머니로 알 수 없단 말이다!”

“상관없다.”

설야의 입가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품 안의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의 피부에 닿은 그녀의 입술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이름은…… 빚이 아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을 뚫고 무현의 귓속으로 정확히 박혀들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저주가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건네는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축복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세상이 너를 잊어도 좋다. 다만 이 이름만은…… 네 영혼의 뿌리에 새겨져 끝까지 너를 지켜주기를.”

팟-!

설야의 손끝에서 눈부신 금빛 광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흑월의 붉은 달빛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찬란한 백색의 섬광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아와 기억을 쥐어짜 내어, 계약의 장부를 찢어발겼다. 흑월의 계약서 위로 금빛 글자들이 타오르며 흩날렸다.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던 자리에, 설야 자신의 존재가 대신 새겨졌다.

쿠구구구구궁―!

설산이 흔들리고, 거대한 붉은 초승달이 비명을 지르듯 일그러졌다.

서문 월청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고, 눈보라는 거짓말처럼 멎었다.

설야의 몸이 백색의 모래성처럼 허공으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품 안의 아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는 그 품에서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어머니의 체온을 마지막으로 가슴에 새겼다.

――서무현.

여인의 마지막 목소리가 영혼의 바닥을 울렸다.

――그것이 네 이름이다.

“……헉!”

무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확 밀려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핏빛 달과 묵화 같은 설산의 풍경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관자놀이가 징징 울리고, 시야가 핑 돌아 수초 동안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오라버니!”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작고 부드러운 손길이 무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월소연이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흑월의 검은 핏방울과 재가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그 눈동자만큼은 유독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현은 자신이 어디에 쓰러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무림맹의 거대한 성문 앞.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청의 거대한 압박감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그 전장(戰場)이었다.

“오라버니, 괜찮아? 정신이 들어?”

소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현의 손을 꼭 쥐었다. 놀랍게도, 그 손을 잡는 순간 무현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지독한 공허함이 거짓말처럼 걷혀 나갔다.

잃어버렸던 조각들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십 년 전 장원의 화염 속에서 아득하게 멀어져 갔던 기억, 스승 서문 월청이 남긴 유서의 의미, 그리고 흑월의 장부가 왜 그토록 자신의 목을 죄어왔는지. 모든 퍼즐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자신의 이름은 빚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온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담보로 걸어 잠근,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도 따스한 ‘선물’이었다.

“……소연아.”

무현이 낮게 불렀다.

소연이 눈을 동그란 채 떴다. 오랫동안 자신을 ‘검객’이라 부르며 이름을 잃은 자처럼 행동하던 이가, 온전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오라버니……?”

“눈물 닦아라.”

무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 쥐어진 백천월광검과 허리춤의 흑천월식검이 동시에 미세한 명음을 발했다. 검은 달의 칠흑과 하얀 달의 광휘가 더 이상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채 무현의 전신을 감쌌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그것은 빚을 갚기 위한 복수의 검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이름을 지키고, 어머니가 남겨준 축복을 완성하기 위한 검객의 발걸음이었다.

“가자.”

무현이 전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콰르릉―!

그 순간, 무림맹 본성의 거대한 정문이 안쪽에서부터 박살 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폭풍 같은 기압이 전장을 휩쓸었다.

자욱한 먼지와 잿더미 속에서, 거대한 금빛 장부를 품에 안은 채 걸어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궁청.

무림맹주이자, 강호 전체의 이름을 도둑질해 자신의 존재를 연명해 온 흉측한 패권자.

그의 얼굴은 이미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잃고 있었다. 반쪽은 남궁청의 얼굴이었으나, 다른 반쪽은 타인의 얼굴에서 강제로 뜯어낸 허물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그 틈새로 흑월의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무현.”

남궁청의 입에서 쇳소리가 섞인 흉측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놈이 마침내 내 마지막 장부를 찾아왔구나. 그 지독한 여인의 피가 흐르는 핏덩이. 네놈의 이름마저 삼키면, 내 자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남궁청의 손에서 거대한 혈쇄(血鎖)가 번개처럼 뻗어나와 무현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백천월광검을 뽑아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순백의 빛이 사방의 어둠을 순식간에 베어 가르며 남궁청을 향해 내달렸다.

달빛이 내리쬐는 밤, 진짜 검객의 칼끝이 마침내 그 본래의 이름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갑게 빛나는 백색의 검강(劍罡)이 혈쇄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강타했다.

챙강-!

찢어지는 듯한 금속음과 함께, 남궁청의 내력이 실린 핏빛 사슬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흩어졌다. 과거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압도적인 격돌이었으나, 지금의 무현에게서는 일그러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이름의 무게를 온전히 깨달은 영혼은, 그 어떤 저주나 핏빛 술법보다 단단하고 순수했기 때문이다.

“크윽……! 이게 무슨 빛이지바깥으로……?!”

남궁청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의 반쯤 일그러진 얼굴 위로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타인의 이름을 강탈하여 억지로 유지해 온 그의 가짜 자아는, 무현이 뿜어내는 순수한 ‘본명(本名)’의 광휘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장부 속에서 울부짖던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잦아들며, 붉은 달빛마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정화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서무현.”

무현이 낮게 읊조리며 검을 겨눴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가 훔쳐낸 허황된 빚 따위가 아니라, 내 어머니가 온 세상과 맞바꿔 내게 건넨 단 하나의 축복이다. 남의 이름을 탐하며 살아온 자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진짜 이름.”

“건방진 핏덩이 놈……!”

남궁청이 광오하게 소리치며 품에 안고 있던 금빛 장부를 강제로 펼쳐들었다. 장부의 페이지들이 미친 듯이 팔랑거렸다. 그 안에서 수천, 수만 개의 붉은 실들이 튀어나와 무현을 포위하려 들었다. 강호 전체를 집어삼켰던 흑월의 계약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맹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소연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오라버니, 내가 열어줄게!”

소연의 손끝에서 눈부신 명인(名刃)의 금빛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흑월의 살수로 길러졌던 과거의 아픔을 모두 밀어내고,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세웠다. 소녀의 검기가 남궁청의 장부를 향해 직격하자, 붉은 실들은 영혼의 빛에 닿은 서리처럼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장부의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 무현의 몸에서 흑과 백의 기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폭발했다.

흑천월식검과 백천월광검의 합일.

두 개의 달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욱―!

소리 없는 참격이 공간을 갈랐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덮쳐드는 검광 속에서 남궁청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훔쳐냈던 수많은 이름들이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듯 흩어지고, 남궁청의 육신은 거대한 백색의 광휘 속에서 서서히 잿더미로 화해 사라져 갔다.

“이럴 수가…… 내가…… 내 자아가…….”

남궁청의 마지막 마디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격전의 흔적만이 가득했던 무림맹 성문 앞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구름이 걷히고, 밤하늘의 붉은 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눈이 시리도록 청명하고 하얀 만월(滿月)이 떠올라 강호 전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무현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가슴속을 짓누르던 오랜 세월의 한기와 허전함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 자리에는, 온전한 자기 자신의 호흡만이 가득했다.

“오라버니.”

소연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그의 소매를 꾹 잡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맺힌 눈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무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소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더 이상 검객은 이름을 잃은 채 떠돌지 않았다.

비가 그친 밤, 낡은 객잔에서 시작되었던 기나긴 빚의 청산은 끝났다. 그것은 채무(債務)의 종결이 아닌, 비로소 시작된 진짜 삶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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