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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3화목차

제43화 이름을 꿰매는 실

바람이 멈춘 적막 속에서 마을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초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앉는 가옥들의 지붕 위로, 형체를 알 수 없는 은빛 실들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가늘고 질긴 그 실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즉시 영혼의 뼈아픈 부식을 불러일으키는 가혹한 무공, 봉명사(封名絲)였다.

가장 먼저 그 참혹한 광경을 마주한 것은 서무현이었다.

"……."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삿갓 아래 드러난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우물가. 그곳에는 촌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허공을 응시한 채 굳어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고, 더 끔찍한 것은 입술이었다. 가느다란 은실이 그들의 입술을 위아래로 촘촘하게 꿰매고 있었다.

말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자아와 기억, 그리고 삶의 흔적 그 자체가 그 실 한 가닥에 의해 칭칭 감겨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 자식……."

뒤를 따라오던 월소연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의 칼끝에서 금빛 잔광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친오빠인 월소한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마을 입구의 돌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단순한 학살보다 더 잔인했다. 육체를 베는 대신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무림맹 집법당의 수법.

그때, 마을 중심부의 당산나무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왔나."

달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 속에서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면을 벗어던진 은사(銀絲)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림맹주 남궁청의 딸, 남궁설이었다. 차가운 미색 도포를 걸치고 손가락마다 은빛 실을 칭칭 감은 그녀의 눈동자는 생기가 아니라 기괴한 집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여. 너희는 이미 강호에서 지워져야 마땅한 찌꺼기일 뿐이다."

은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딱였다.

그러자 우물가에 서 있던 촌장의 입술을 꿰맨 봉명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툭― 뚝―.

살점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촌장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희뿌연 안개 같은 형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가 평생 동안 살아오며 품었던 기억의 파편이자, 그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이름의 무게였다.

"크윽……!"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도 토하지 못한 채 고통으로 무너져 내렸다. 은사는 그들의 이름과 기억을 실에 감아 자신의 손목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흑월문이 십 년 전 검은 달의 계약으로 벌였던 짓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약탈이었다. 아니, 겉포장만 바꾼 더 악랄한 수탈이었다.

무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어둠을 삼키는 중력장이 피어올랐다. 흑천월식검의 검압이 대지를 내리누르며 바닥의 돌무더기를 잘게 부쉈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 쥔 검신 위로는 설원 무녀의 혈통에서 비롯된 순백의 광채, 백천월광검의 빛이 서서히 얽혀들었다.

검은 달의 칠흑과, 하얀 달의 설광.

어둠과 빛, 파괴와 정화가 하나의 검신 위에서 기이하게 공존하기 시작했다.

"네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무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름을 빼앗고, 기억을 짓밟아 쌓아 올린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것은 강호가 아니라 거대한 무덤에 불과하다."

"무덤이라도 상관없다!"

은사의 얼굴에 광기가 스쳤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수천 갈래의 봉명사가 폭발하듯 뻗어나왔다.

슈우우웅―!

사방의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은빛 실들은 단순한 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아를 포박하고 강제로 타락시키는 저주였다. 실이 닿는 곳마다 땅이 파이고, 집들의 목재가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마을 전체가 통째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붕이 무너지고, 담장이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충격파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라비!"

소연이 소리치며 명인을 휘둘러 날아오는 봉명사들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의 실은 금빛 칼날마저 칭칭 휘감으며 그녀의 움직임을 옭아매려 들었다.

바로 그때.

무현의 몸이 사라졌다.

콰아아앙!

검은 중력장이 폭발하며 은사의 실무리를 단숨에 밀어붙였다. 흑천월식검의 참격이 공간을 반으로 갈랐고, 그 틈새를 백천월광검의 눈부신 빛이 채우며 실들을 정화해 나갔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몰아치는 그 압도적인 무공 앞에, 은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럴 수가……! 어떻게 두 가지 극단의 힘을 동시에 다룬단 말인가!"

"내 이름은 내가 정한다. 네놈들의 장부에 빚진 적 없다."

무현이 은사의 코앞으로 파고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무현의 검신이 은사의 목덜미를 겨누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은실의 결속을 정중앙에서 강렬하게 내리쳤다.

파지지직―!

"크아아악!"

은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수십 권의 이름 장부 파편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철면이 깨져나간 그녀의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연과 소한이 다가와 무현의 양옆을 지켰다. 마을은 이미 반쯤 폐허로 변해 있었지만, 더 이상 은사의 실에 속박되어 숨이 넘어가던 사람들의 입술은 풀려나 있었다. 그들은 땅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살아난 것이다.

은사는 부서진 손목을 감싸쥔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무현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굴욕감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

"……웃기지 마라, 서무현."

은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너는 네 이름을 되찾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야."

"……."

"남궁청. 그자 역시 너처럼 이름을 찾으려고 발악하고 있어. 하지만 그 대가가 뭔 줄 아나? 아버지는 이미 자기 자신의 기억조차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모으는 장부는 강호를 삼키기 위한 게 아니야……."

은사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자조적인 웃음으로 변했다.

"그는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남의 이름을 훔치고 있는 거라고! 그자 역시 검은 달의 첫 번째 계약자니까!"

그 말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굳어졌다.

무림맹주 남궁청. 강호의 꼭대기에 서서 정기를 수호한다는 그 대협이, 사실은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남들의 이름을 도둑질하고 있는 몰락한 계약자에 불과하다는 진실.

"아버지도 이름을 잃어가고 있다. 너희가 그를 찾아간들, 남은 건 서로의 이름을 뜯어먹는 짐승들의 싸움뿐일 것이다."

은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미세한 은사들이 다시 엉기기 시작했다.

"설령 네가 그곳에 닿는다 해도, 남궁청의 손에 쥐어진 마지막 장부가 모든 걸 끝낼 거다."

"놓치지 않는다!"

소연이 칼을 치켜들며 달려들었으나, 은사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바닥에 내던졌다.

콰르릉―!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은빛 연막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켰다.

중력장과 검기로 연막을 걷어냈을 때, 은사가 서 있던 자리에는 깊게 파인 크레이터와 함께 찢어진 도포 자락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하나.

붉은 끈으로 묶인 낡은 가죽 장부 한 권.

그 표면에는 금빛 글씨로 희미하게 남궁청의 혈족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은사가 스스로 흘리고 간 것인지, 아니면 탈출 과정에서 떨구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자 다음 전장을 향한 초대장이었다.

무현은 말없이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집어들었다.

장부를 쥔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종이의 감촉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지워진 이름과 울음이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무거운 계약의 무게였다.

소연이 다가와 무현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오라비……."

"가자."

무현이 장부를 품에 넣으며 삿갓의 고삐를 바로잡았다. 그의 등 뒤로, 서서히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하는 거대한 달이 설원의 끝자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적의 진영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궁청과의 마지막 결전, 그리고 검은 달의 계약을 완전히 끊어내기 위한 여정이 비로소 진짜 시작을 고하고 있었다.

품에 안긴 낡은 가죽 장부의 표면은 서늘했다. 그것은 종이의 감촉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기억과 생명이 강제로 압착되어 만들어진 껍데기의 서늘함이었다. 무현은 더 이상 그 장부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고 품 깊숙이 갈무리했다.

"오라비, 이 장부는……."

소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현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치열했던 사투의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은사가 남기고 간 경고와 붉은 장부의 무게를 직시하고 있었다.

"덫일지도 모른다."

대답한 것은 월소한이었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다가온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장부가 떨어졌던 자리를 응시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덫이지. 그 여자의 말이 진심이든, 혹은 남궁청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간계이든 상관없다. 남궁청 그 자가 검은 달의 첫 번째 계약자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은사가 남기고 간 말은 강호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폭탄이었다. 무림맹주. 칭송받는 정파의 수호자이자, 흑월문의 잔재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강호를 쥐락펴락하던 그 손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공포 속에서 남의 이름을 도둑질하고 있던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진실.

그것은 단순히 악을 단죄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존재의 소멸을 막기 위해 이름을 탐하는 자들과,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고 계약의 사슬을 끊으려는 자들 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마지막 싸움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무현이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마을은 반쯤 파괴되었으나, 봉명사의 구속에서 풀려난 주민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어르신", "어머니", "내 아들아". 비록 삶의 터전은 망가졌을지언정,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 할 '이름'만큼은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무현은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가자, 무림맹으로."

무림맹의 본거지가 위치한 중원 북부의 대지는 이미 평온을 잃은 지 오래였다.

거대한 성벽과 철갑을 두른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 정중앙에 자리한 맹주성(盟主城) 내부의 공기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무겁고 정적에 잠겨 있었다.

맹주성의 가장 깊은 곳, 햇살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밀실.

그곳에서 남궁청은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

정면에 비친 거울 속의 얼굴은 완벽한 무림맹주의 위엄을 띠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반백의 관모, 강호인들이 경외해 마지않는 그 장엄한 풍모.

그러나 남궁청의 손끝이 자신의 뺨을 스칠 때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한순간, 형체를 알 수 없는 회색빛 껍데기로 일그러졌다.

"크윽……!"

남궁청이 이를 악물며 거울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대리석으로 된 거울 틀이 금이 갔으나, 그의 손바닥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피가 흘러야 할 자리에는 오직 굳어버린 회색빛 탁류만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이름을 너무 많이 썼다.

강호를 호령하고, 무림맹을 거머쥐고, 검은 달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담보로 잡고 삼켜왔다. 타인의 이름을 흡수할수록 자신의 자아는 일시적으로 지탱되었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계약의 본질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남의 이름을 취할수록, 본래의 자신이라는 존재는 서서히 강호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갔다.

"내가…… 누구지?"

남궁청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십 년 전, 설원 무녀 설야의 손을 잡고 첫 번째 계약을 맺던 그날의 기억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 거대한 성을 쌓았는지, 누구를 위해 검은 달의 장부를 모으고 있었는지조차 아스라한 안개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껍데기뿐인 집념만이 그의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쾅―!

밀실의 무거운 철문이 찢어지듯 열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들이닥친 것은 피비린내였다.

"맹주님!"

급하게 밀실로 뛰어들어온 집법당 고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인가."

남궁청은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갑고 위엄 있는 목소리를 되찾았다. 거울 속의 균열을 감추듯, 그는 소매를 툭 털고 일어섰다.

"말해라. 집법당의 후임인 은사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닙니다! 은사 님께서 당하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돌아오긴 하였으나……."

"돌아왔는데 어째서 그 모양이냐."

"마을에서 서무현 일행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었고, 가지고 있던 장부의 절반을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집법당 고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밀실의 어둠 속에서 은사, 즉 남궁설이 천 걸음 물러나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철면은 이미 완전히 박살 나 있었고, 입가에는 마르지 않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버지를 향한 경외가 아니라, 깊고 차가운 실망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남궁청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 딸아."

남궁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 자를 과소평가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그놈이 어디까지 오든, 이 무림맹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으니."

"아버지."

남궁설의 목소리가 밀실의 공기를 차갑게 베었다. 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우리가 이 강호의 주인이요, 정의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 겁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거울을 보십시오."

남궁설이 손가락으로 밀실의 깨진 거울을 가리켰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이름을 잃었습니다. 저를 알아보는 것조차 버거워하면서, 강호 전체를 삼키면 자신의 이름이 돌아올 거라 믿고 있겠지. 하지만 틀렸습니다. 그 자가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내가 정한다'고."

남궁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내면에서 억누르고 있던 흑천의 중력장이 밀실의 공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주로서의 위엄이 깨지고, 계약의 저주에 짓눌린 괴물의 형상이 그 가죽 아래서 꿈틀거렸다.

"설아……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나는 비록 아버지의 방식을 따랐지만, 적어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장부는 구원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저주라는 것을요."

남궁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

그것은 그녀가 탈출하며 끝까지 지켜낸 마지막 장부이자, 남궁청이 가장 집착하던 흑월의 원초적인 기록이었다. 장부의 표면에서 금빛 글씨가 불길하게 타오르듯 반짝였다.

"그 자가 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 껍데기를 완전히 찢어버리기 위해."

남궁청은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밀실 안의 공기가 완전히 멎었다. 흑월의 그림자가 성벽을 넘어 밀려들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흑·백의 검기를 동시에 품은 검객이 서 있었다.

마침내, 모든 장부가 하나의 끝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거대한 달이 핏빛에서 완전히 백색으로 바뀌기 직전의 밤, 강호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사투가 무림맹의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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