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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2화목차

제42화 백천월광검

끝없는 설원 위로 눈보라가 유리 조각처럼 휘날렸다.

세상은 온통 시린 백색(白色)과 먹물 같은 칠흑(漆黑)의 대비뿐이었다. 그 지독한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서무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던 손끝에 미세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투명하게 비치며 사라지던 살갗이 원래의 색을 되찾는 듯 미세한 결이 살아났다. 흑천월식검을 쓸 때마다 육신과 함께 마모되던 존재감이, 눈앞에 놓인 낡고 투박한 검집 하나로 인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

빛으로 이름을 되돌린다는 설원 무녀 일족의 비전. 그것은 흑천월식검이 가진 저주와 파멸의 중력장에 정확히 반대되는 힘이었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 단지 그 투박한 검집을 품에 안고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뇌리에 박힌 쇠못처럼 아프던 기억의 파편들이 제 주인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휴."

무현의 입김이 하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잊고 싶었던 십 년 전 잿더미의 냄새, 피비린내, 그리고 문주가 지었던 잔인한 미소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잊혀서는 안 될 것들도 함께 밀려왔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왜 이 칼을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뚜렷한 자각.

"오라버니."

낮고 청아한 목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월소연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금빛 이름칼, 명인이 희미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십 년간 흑월의 살수로 길러져 감정을 잃었던 소녀. 하지만 지금 소연의 눈동자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 대신, 온전한 사람의 생기가 담겨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이상하군."

무현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사라졌던 감각이 돌아오고 있어. 내가 지불했던 빚의 일부가…… 이 검집을 통해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다."

"그것은 빚을 갚는 게 아니에요."

소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뺨 위로 하얀 눈꽃이 내려앉았다가 녹아내렸다.

"할머니가 그러셨죠. 이름은 빚이 아니라 선물이라고요. 오라버니가 잊어버린 건 오라버니의 잘못이 아니에요. 달이 강제로 빼앗아 간 거지."

"선물……."

무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이 선물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의 피를 대가로 치렀지."

"그 피는 흑월이 흘리게 한 거예요. 오라버니가 아니라."

소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무현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의남매로 묶인 세월. 그 구구절절한 사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팽팽한 긴장 대신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신뢰와 연대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랑이나 연정이라는 가벼운 이름표로는 담아낼 수 없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뼈저린 동질감.

"소연아."

"네, 오라버니."

"너는 두렵지 않나? 우리가 마주해야 할 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 설원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소연은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십 년 전 청월장의 작은 소녀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잖아요. 오라버니도 있고, 저 앞을 막아선 저 사람도 있으니까요."

소연이 턱짓으로 가리킨 설원의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살기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콰아아앙-!

설원의 눈보라를 찢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크으으윽……!"

수십 마리의 설원 대랑(大狼)들이 피를 흩뿌리며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눈꽃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날리는 그 중심에, 거대한 칠흑 대검을 쥔 월소한이 서 있었다.

붉은 가면은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십 년 전 흑월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장원에 횃불을 던졌던 소년. 그 원죄를 짊어진 채 속죄의 검을 휘둘러온 소한의 전신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맹수보다 사납고, 얼음보다 차가웠다.

크르릉……!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설원 늑대 떼가 사방을 에워싸고 그를 노려보았다. 일반적인 짐승이 아니었다. 흑월의 기운이 스며들어 마수(魔獸)로 변한 괴물들이었다.

소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대검을 땅에 꽂았다. 쇳소리가 설원을 울렸다.

"오냐. 끝까지 물고 늘어질 테면 와봐라."

소한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짓의 무게를 알기에, 이 설원의 추위와 짐승들의 이빨 따위는 그저 속죄의 과정일 뿐이었다. 소한은 검을 다시 뽑아들며 전신으로 투기를 끌어올렸다.

콰아아아-!

칠흑 같은 검강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며 늑대 떼의 선두를 그대로 쓸어버렸다. 피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시뻘건 피와 새하얀 눈의 대비. 그것은 이 세계의 잔혹한 섭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소한의 안광이 문득 차갑게 가라앉았다.

짐승들의 기척 너머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통의 고수가 아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철저하게 죽여진 살기.

"……나왔느냐."

소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투우우웅-!

눈보라 속에서 수십 갈래의 은빛 실들이 사방으로 뻗어나왔다.

빛조차 삼킬 듯한 설원의 폭풍 속에서, 그 실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독사처럼 소한의 사지를 향해 쇄도했다.

"큭!"

소한이 급히 대검을 들어 막아섰지만, 은빛 실은 검신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그의 어깨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살점을 파고드는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결합을 억지로 끊어내는 듯한 기묘한 마비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건……?"

소한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보라의 장막이 걷히며 한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백색의 무림맹 복장에, 얼굴에는 냉혹한 철면(鐵面)을 대신한 은빛 가면을 쓴 자. 품위 있으면서도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무림맹 집법당의 새로운 고수.

철면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임, 은사(銀絲)였다.

"월소한."

은사의 목소리는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 같았다. 그는 손가락 끝에 미세하게 걸린 은빛 실들을 가볍게 당겼다.

피릭-!

소한의 피부가 미세하게 찢어지며 붉은 선이 그어졌다.

"맹주님께서 명하셨다. 네놈의 목숨이 아니라, 네가 가진 기억과 이름을 회수하라고."

"……무림맹의 개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었나."

소한은 피를 토하며 비웃었다.

"남궁청 그 영감이 그렇게 조급하던가? 달의 계약을 완성하겠다고 이 춥고 썩어빠진 설원까지 처기어올 정도로?"

"남궁청 맹주님의 뜻은 대의를 위한 것이다."

은사는 차갑게 답하며 양손을 펼쳤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빛나는 은빛 실들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 관계, 그리고 이름을 엮고 끊어내는 금기의 무공. 봉명사(封名絲)의 변형이자, 상위격인 살진(殺陣)이었다.

"네놈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달의 장부는 결국 맹주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무현, 그 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은사의 손가락이 스르륵 움직였다.

타다다다닥-!

설원 위로 수만 가닥의 은빛 실이 거미줄처럼 펼쳐지며 공간을 완전히 봉쇄했다. 그 실들의 끝은 허공을 향해 있었고, 그 허공 너머에는 거대한 붉은 달이 음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한은 이를 악물었다. 몸이 마비되어 대검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실에 묶여 기억을 뽑히고, 영혼 없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오라버니!"

멀리서 소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소연이 명인을 치켜들며 달려오려 했지만, 은사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왼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슈우우웅-!

수천 갈래의 은빛 실이 소연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거대한 방벽을 세웠다.

"방해하지 마라. 오늘은 여기서, 흑월의 잔재들과 그 빚을 모두 청산할 것이니."

은사의 목소리가 눈보라 속에 파묻혔다.

설원의 찬 공기 속에서 은빛 실들이 허공을 가르며 소한의 목을 향해 미끄러져 내렸다. 이름을 꿰매고, 결국엔 지워버리는 죽음의 실사(絲)가 0.1각의 간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크윽!"

은빛 실이 다가오는 그 찰나의 순간, 소한은 이를 악물고 전신의 내력을 폭발시켰다.

쾅-!

눈밭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비록 마비 독과 같은 기묘한 실의 기운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타고난 투지와 짐승 같은 감각이 그의 목숨을 겨우 건져냈다. 은사의 실이 소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며 붉은 핏방울을 허공에 뿌렸다.

하지만 은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피아노를 치듯 허공에서 유연하게 움직였고, 스쳐 지나간 실들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궤도를 바꾸어 다시 소한의 등 뒤를 노렸다.

"끝이 없다……."

소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상대의 무공은 단순한 살인술이 아니었다. 사람의 '존재'를 옭아매고, 기억의 실뿌리를 잘라내는 괴이한 비기술(秘技術)이었다.

바로 그때, 눈보라를 찢고 검붉은 섬광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지면이 반으로 갈라지며 은사의 실무리를 단숨에 쳐내는 충격파가 일었다.

"소한."

낮고 묵직한 목소리.

서무현이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백천월광검의 검집을 단단히 쥐고, 소한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흐릿한 공허함이 없었다. 오히려 설원의 백색과 맞닿은 듯 서늘하고도 맑은 금빛 섬광이 희미하게 어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었다.

무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눈앞의 은사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백광이 주위의 매서운 추위와 은사의 살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무림맹의 개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무현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남궁청이 그렇게 급하더냐? 내가 가진 빚이 네놈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는 증거겠지."

은사는 가면 너머로 서늘한 눈빛을 빛내며 손가락을 멈추었다. 허공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수만 가닥의 은빛 실들이 일제히 웅장한 울림을 토해냈다.

"서무현. 넌 몰리었다. 그 검집 하나로 네가 잃어버린 이름을 전부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나?"

은사의 음성이 빙판을 긁는 듯 쇳소리를 냈다.

"달의 계약은 절대적이다. 십 년 전 그 밤, 설원의 무녀가 네 첫 번째 이름을 담보로 걸었을 때부터 너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맹주님은 그 완벽한 장부를 완성하여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으실 것이다. 네놈은 그저 제자리에 돌려져야 할 마지막 조각일 뿐."

"마지막 조각……?"

무현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

"남궁청 그 늙은이가 원하던 게 그것이었나. 내 이름을 제물 삼아 그 스스로가 달의 주인이 되겠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틀렸다."

무현이 천천히 백천월광검의 검집을 들어 올렸다.

"이름은 빚이 아니라 했다. 내 어머니가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네놈들이 함부로 뺏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콰르릉-!

무현의 말과 동시에,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달의 환영이 일렁였다.

과거 흑천월식검을 쓸 때마다 세상을 집어삼키던 칠흑의 중력장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만물의 어둠을 걷어내고 기억의 본질을 비추는 순수한 백색의 광채였다.

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

빛으로 이름을 되돌리는 검.

무현이 검집을 살짝 비틀어 뽑아내자, 검신조차 없는 투명한 빛의 칼날이 허공에 드러났다. 그 순간, 설원을 뒤덮고 있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소거된 듯 정적만이 감돌았다.

"잡아라!"

은사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후우우웅-!

은사의 손가락이 격렬하게 튕겨지며, 공간을 가득 채운 봉명사(封名絲)가 일제히 무현을 향해 쇄도했다. 수천 갈래의 실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과 인연을 베어내어 영혼의 껍데기로 만드는 저주받은 실이었다.

타다다다닥!

수만 가닥의 실이 무현의 전신을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무현은 눈을 감은 채, 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파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라버니!"

소연이 경악하며 외쳤지만, 이미 늦지 않았다.

투명한 백광의 검날이 허공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을 때, 세상이 한 차례 번쩍였다.

챙기기기긱-!

금속성 소리가 아니라,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은사가 사정없이 튕겨낸 은빛 실들이 무현의 옷자락을 스치기도 전에, 백광의 파장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하얗게 녹아내리며 흩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힘이……!"

은사의 가면 아래로 처음으로 경악 어린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봉명사는 사람의 이름을 옭아매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무현이 뿜어내는 빛은 그 실들이 묶으려 했던 '이름의 근원' 자체를 정화하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이 빛의 입자가 되어 무현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이 돌아온다.

갓난아기 시절 어머니의 품속에서 들었던 자장가.

불타는 장원에서 스승이 마지막으로 건네주었던 눈물 어린 시선.

그리고 흑월의 어둠 속에서 홀로 칼을 갈며 버텨왔던 수많은 밤들.

"내 이름은……."

무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것은 단순히 불리는 이름이 아니었다. 타인이 기억하고, 스스로가 증명해 내는 온전한 자아의 무게였다.

"서무현이다."

쿵-!

무현이 발을 구르는 순간, 설원의 지면이 수십 장 아래로 꺼질 듯한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백광의 검기가 한 줄기의 유성처럼 은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피할 수 없는 빛의 참격이었다. 은사는 급히 양손을 교차시켜 수만 가닥의 실로 거대한 방벽을 세웠지만, 그 방벽은 백광 앞에 눈사람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카아아아악-!

"크으윽……!"

은사의 몸이 그대로 백광에 휩싸이며 설원 바닥을 구렀다. 그의 얼굴에 붙어 있던 은빛 가면이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철면의 후임으로 무림맹의 음지를 누비던 고수의 얼굴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무현은 천천히 걸어가 쓰러진 은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백천월광검이 은은한 빛을 머금은 채 들려 있었다.

"남궁청에게 전해라."

무현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내가 가고 있다. 십 년 전 그 밤에 시작된 빚의 정산을 끝내러, 그 썩어빠진 무림맹의 왕좌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은사는 피를 토하며 이를 악물었지만,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무현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그의 기가 완전히 꺾여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소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무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안도와 감격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가자."

무현은 멀리 설원의 끝, 구름 너머에서 붉은빛을 토해내며 떠오르는 거대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한, 그리고 모든 계약의 원흉과 마주하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비로소 진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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