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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1화목차

제41화 설원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무현의 뺨을 스쳤다. 그러나 그것이 살을 으깨는 추위인지, 아니면 피가 흐르지 않는 껍데기의 감각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눈앞에 서 있어야 할 소연의 얼굴이 물에 번진 먹물처럼 흩어졌다.

"오라버니!"

멀리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연이었다. 그녀의 손이 무현의 소매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무현의 손끝은 이미 달빛 아래서 투명하게 바스라지고 있었다. 이름의 반쪽이 타버린 자리에 남은 것은 거대한 공백이었다.

내가 누구였더라?

머릿속을 헤집어도 기억의 파편은 흩어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스승이었던 서문 월청의 얼굴도, 십 년 전 청월장을 집어삼키던 붉은 횃불도, 심지어 자신이 왜 이 검을 쥐고 있는지조차 희미한 안개 너머로 멀어져 갔다.

남궁청이 남긴 마지막 일격, 그리고 백월진의 부스러기가 남긴 저주였다. 흑천월식검의 힘을 억지로 끌어다 쓴 대가는 혹독했다. 그것은 단순히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서무현'이라는 존재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과정이었다.

"물러서라, 소연."

가신(假信)처럼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현의 곁을 지키던 소한이 칠흑 같은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 가면을 벗어던진 소한의 얼굴은 참혹했다. 십 년 전 방화범이었다는 죄책감,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의오라비마저 소멸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절망이 그의 눈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형은 완전히 사라져. 껍데기만 남아서... 달에게 모든 걸 빼앗긴다고."

"방법이 없다. 빚은 갚아야지."

"빚? 그 자식들의 거짓말에 왜 네가 네 삶을 통째로 내줘야 해!"

"내 삶이... 내 것이었나."

무현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입술 사이로 검은 핏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땅에 닿기도 전에 피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때였다. 소한의 등 뒤, 남쪽의 추격자들을 따돌린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나타난 것은 남궁설이었다. 봉명사를 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추격대가 붙었어요. 무림맹주... 아니, 그 괴물의 명을 받은 놈들이 여기까지 추적해 오고 있어요. 이대로는 공멸해요."

"어디로 가지?" 소연이 울컥 치솟는 눈물을 삼키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 쥔 명인이 은은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 역시 위태롭게 흔들렸다. "오라버니를 이대로 둘 순 없어. 백초 영감도 지쳤고, 우리는 갈 곳이 없어."

무현은 흐릿해지는 눈으로 북쪽을 바라보았다.

대지 끝,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유독 하얗고 시린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지평선이 있었다.

강호의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곳.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죽음의 땅.

"북쪽으로 간다."

"...설원?"

소한이 눈을 크게 떴다.

"거기는..."

"거기에 내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다."

무현의 가슴속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뼈에 새겨진 본능에 가까웠다. 남궁청의 가면이 찢어지며 드러났던 대모의 문양,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 '너는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설원의 무녀가 네 첫 번째 이름으로 계약을 산 대가니까.'

모든 비극의 시작. 십 년 전 장원의 빚, 그리고 검은 달의 계약이 아직 풀리지 않은 실타마처럼 엉겨 있는 곳. 그 원초적인 해답이 북쪽 끝, 눈의 제국에 있었다.

풍경은 급격히 메말라갔다.

풀 한 줄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를 지나자, 대기는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입김을 내뱉을 때마다 얼어붙은 결정이 공중에서 바스러졌다.

설원의 무녀 일족이 사는 마을.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블엔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 있는 거야?"

소연이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사방을 둘러싼 것은 거대한 얼음기둥과 끝없는 설산뿐이었다. 하지만 마을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무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기묘한 기운이었다.

살아 있는 자의 기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자의 음산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 자체였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 속에서 몇 명의 주민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짐을 든 사내,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 그들의 행색은 평범한 백성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무현 일행을 발견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본 소연이 숨을 멈췄다.

"...저 사람들, 눈이..."

주민들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정확히는, 눈빛이 담겨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백지처럼 하얗게 바래 있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분명 존재하지만, 누군가 지우개로 그어버린 것처럼 표정도, 이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명병..."

소한이 이를 악물었다. 무림맹에서 보았던, 기억을 잃어버린 꼭두각시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달랐다. 이곳의 사람들은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이름을 바치고, 껍데기만 남은 채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여기에 온 걸 환영하진 않는다만."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의 가장 안쪽, 거대한 얼음 동굴의 입구에서 한 노파가 걸어 나왔다. 등은 굽었고, 손에는 앙상한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그녀가 걸어올 때마다 사방의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듯 잦아들었다.

노파의 눈 역시 하얗게 바래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눈동자 너머로, 기이할 정도로 날카로운 달빛 같은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설원의 무녀 일족은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들었다."

무현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의 반쯤 투명해진 손이 덜덜 떨렸다.

"네가 이 일족의 남은 자인가."

노파는 지팡이를 짚은 채 멈춰 서서, 무현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했다. 하얗게 바란 눈동자가 무현의 화상 흉터와, 그 아래 숨겨진 미세한 투명함을 훑어내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람 소리마저 멎은 그 정적 속에서, 노파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윽고 기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찾아왔군그래. 그 지독한 불길의 냄새를 풍기면서."

"내 출생을 묻겠다. 그리고... 이 계약의 끝이 무엇인지."

"출생?"

노파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지팡이로 단단히 얼어붙은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서문 월청의 양자? 청월장의 검객? 아니면 복수를 위해 칼을 겨누던 불쌍한 죄인?"

"..."

"틀렸다. 너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야."

노파의 목소리가 설원의 공기를 갈랐다.

"십 년 전이 아니다. 삼십 년 전, 이 설원에서 거대한 월식이 있던 날 밤. 네 어머니는 하늘의 문을 열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지. 그것은 금도 아니었고, 목숨도 아니었다."

노파가 지팡이를 들어 무현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이름이다. 네 어머니는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먼저 달에게 팔아넘겼어. 그 대가로 흑월문의 문을 열고, 이 땅의 모든 저주를 끌어안았지. 너는 처음부터 이름 없는 자로 태어났고, 네가 누렸던 '서무현'이라는 이름은 남이 쓰다 버린 껍데기를 빌려 입은 것에 불과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소연이 창백해진 얼굴로 무현을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무현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지워지는 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채워져 있지 않던 구멍 속으로, 차가운 진실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걸어온 모든 길, 내가 쥐었던 검까지 전부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그럼..." 무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누구지?"

"설야(雪夜)."

노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칼날보다 시리게 무현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네 첫 번째 이름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달의 계약을 이 세상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남궁청이라는 괴물을 빚어낸 장본인이기도 하지. 무림맹주가 왜 그렇게 네게 집착하는 줄 아느냐? 너는 그 계약의 '열쇠'이자, 그가 삼키지 못한 마지막 조각이기 때문이다."

노파가 흉측하게 일그러진 입꼬리를 올리며 무현에게 다가왔다.

"너는 네 손으로 그 계약을 끊으려 했다지? 흑천월식검의 마지막 초식으로 모든 것을 태우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네 뿌리 자체가 달과 얽혀 있는데, 어떻게 네 몸을 태워 계약을 부수겠다는 거냐. 너는 자살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럼 방법은 없단 말인가."

무현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절망이 묻어났다. 투명해지던 어깨가 더욱 옅어졌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판이었다.

노파는 그런 무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방법이 없진 않지. 달의 힘을 끊어내려면, 달을 직접 부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순수한 빛으로 네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순수한 빛?"

"그래. 우리 일족이 대대로 봉인해 온, 흑월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검법."

노파의 손이 낡은 품속을 뒤져 차갑게 얼어붙은 쇠 뭉치 하나를 꺼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녹슨 검집이었다. 그저 평범한 쇳덩이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주변의 눈꽃들이 일제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

노파가 중얼거렸다.

"흑월이 어둠으로 이름을 삼킨다면, 백천은 빛으로 이름을 되돌린다. 하지만 그 검을 쥐는 자 역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흑월이 기억을 지운다면, 백천은 너무 많은 기억을 강제로 떠먹여 미치게 만들 테니까."

노파는 지팡이를 거두며 얼음 동굴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며 일행을 에워쌌다.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소한과 소연이 무현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버텨야 해." 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다 이내 얼어붙었다. "우리가 있잖아. 우리가 너를 기억하고 있어. 네 이름이 지워지면, 우리가 몇 번이고 다시 불러줄게."

무현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낡은 검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쇳덩이가 손바닥에 닿자, 머릿속에서 끊어졌던 기억의 잔해들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의 냄새, 스승의 유서, 그리고 달빛 아래서 자신을 안아주던 한 여인의 품속.

그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빛이었다.

무현은 고개를 들어 북쪽의 끝, 구름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설산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정중앙, 밤하늘에 박힌 달은 유독 붉고 거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파가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 네 어미는 아직 달 속에 있다.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며, 네가 오기를 수없이 빌고 또 빌었지.

검은 달의 검객, 서무현은 마침내 자신의 뿌리가 박힌 진짜 전장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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