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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0화목차

제40화 맹주의 얼굴

1. 무림맹 총단 공개 재판 — 무현을 '흑월 대마두'로

구름 한 점 없는 무림맹 본단 대광장.

햇살은 강렬했으나, 그 빛은 어쩐지 푸르스름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백 대의 거대한 청동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香煙)이 광장 전체를 자욱하게 메웠다.

광장 주변을 에워싼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과 각 문파의 고수들. 그들의 갑옷 위로 비치는 그림자는 유독 짙고 뚜렷했다.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새까만 붓으로 덧칠한 것처럼.

중앙의 높디높은 단상.

거기에 묶인 채 무릎 꿇린 남자가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검은 도포, 흩날리는 백발, 그리고 이마와 뺨을 타고 흐르는 핏물. 삿갓은 이미 오래전에 박살 나 뒹굴고 없었다. 서무현. 흑월문의 마지막 살수이자, 강호를 뒤흔든 대마두로 지목된 사내.

"바라보라! 저자가 바로 십 년 전 청월장을 불태우고, 최근까지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의 이름을 앗아간 흑월문의 잔당, 서무현이다!"

단상 위, 집법당의 고수 철면의 목소리가 내공을 타고 광장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 속에서 수백, 수천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저놈이 그 흉악한 흑월의 검객이라고?”

“이름을 먹는 도깨비 같은 놈이라더군.”

“살려두면 강호 전체가 파멸할 거야!”

날 선 비난과 혐오의 눈빛들이 무현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무현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무명병의 잠식. 흑월문의 계약을 너무 많이 휘두른 대가로, 그의 기억 속에서 소중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스승의 얼굴도, 십 년 전 그날의 불길도, 안개처럼 흩어져 간다. 타인이 기억해주지 않으면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는 검은 달의 계약. 지금 이 순간, 강호 전체가 그를 '대마두 서무현'으로 기억하고 저주하고 있기에, 그의 존재는 그 악의에 찬 시선들에 의해 오히려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형벌이었다.

단상 가장 높은 곳, 거대한 백옥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다.

희고 고결한 도포를 걸치고, 자애로운 미소를 띤 무림맹주, 남궁청.

그는 손에 쥔 금빛 장부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으나, 그 밑바닥은 칠흑보다 더 검은 무저갱(無底坑) 같았다.

"서무현."

남궁청이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면서도 광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청음(淸音)이었다.

"네가 저지른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다. 네가 삼킨 이름들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섬기는 그 '검은 달'의 정체는 무엇이냐. 자백하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나마 편히 잠들게 해줄 터이니."

위선으로 가득 찬 음성.

무현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궁청을 응시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맹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주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2. 소연과 소한이 군중 속에서 진실을 외친다

"거짓말 마라!"

찢어지듯 날카로운 고함이 광장의 침묵을 갈랐다.

군중의 무리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검은 장검을 짊어진 붉은 가면의 사나이, 월소한.

그리고 품에 수많은 명인을 품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 월소연.

"소한아! 소연아…!"

군중이 놀라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두 남매는 경계하는 무림맹 무사들의 칼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상 앞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저 자의 말에 속지 마라!"

월소한이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십 년 전 화상의 흉터가 붉게 도드라졌다.

"청월장을 불태운 건 저 무림맹주다! 십 년 전, 흑월문을 뒤에서 조종하고 우리를 이용해 장원을 태운 건 바로 남궁청, 저 늙은 위선자라고!"

소연 역시 칼을 빼 들며 단상을 향해 악을 썼다.

"우리 오라비는 흑월의 대마두가 아니야! 저자가, 무림맹주가 진짜 흑월의 주인이자 진짜 채권자야! 우리의 이름을 훔쳐가려는 도둑놈이라고!"

남매의 외침은 절박했다. 그것은 십 년간 짊어져 온 흑백의 굴레를 깨부수기 위한 마지막 목소리였다.

광장 안의 군중이 일순간 술렁였다.

“무림맹주가 흑월의 주인이라고?”

“말도 안 돼! 저 어린것들이 미쳐서 광기를 부리는 거야!”

“잡아들여라! 이단들의 망령이다!”

무림맹의 집법당 고수들이 칼을 뽑아 들고 남매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켜!"

월소한의 칠흑 대검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묵직한 검풍이 대기를 가르며 앞을 가로막는 무사들을 쓸어버렸다. 소연 역시 손끝에서 금빛 명인을 뿜어내며 실처럼 가늘고 매서운 검기로 무사들의 발목을 묶었다.

하지만 비록 두 사람의 무공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할지라도, 무림맹 전체의 병력과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크윽…!"

소한의 어깨에 칼날이 스치며 붉은 피가 튀었다. 소연이 숨을 헐떡이며 오빠의 등 뒤를 받쳤다.

단상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남궁청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가락 까딱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시끄러운 쥐새끼들. 어차피 버려진 이름들이 주제도 모르고 우는구나."

3. 남궁청이 장부 다섯 권으로 '백월진' 발동

남궁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가죽 책들이 한 권, 두 권, 세 권… 총 다섯 권의 장부가 튀어나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그것은 강호 수백 명의 이름과 기억, 그리고 영혼의 무게가 기록된 '이름 장부'였다.

남궁청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복잡한 인결을 맺었다.

슈우우우—!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백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색을 지워버리는 칠흑 같은 빛, 혹은 너무 눈이 부셔서 시력을 앗아가는 차가운 백광이었다.

‘백월진(白月陣)’

남궁청이 비장의 수로 숨겨둔 최강의 진법이 발동했다.

광장 전체의 바닥에서 은빛 진문이 붉은 혈관처럼 뻗어 나갔다. 진문이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군중의 몸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어…?"

"내 몸이… 왜 이러지…?"

광장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무림인들과 군중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기억이, 감정이, 자아가, 그리고 '이름'이 그들의 몸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떠 있는 다섯 권의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소한이 검을 짚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소연 역시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오빠… 나… 내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오빠가 누구지…?"

"소연아!"

무현이 절규했다.

자신의 몸이 지워지는 것보다,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잊고, 서로를 잊고, 껍데기만 남은 인형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더 끔찍했다.

남궁청은 허공에 떠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달의 환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달은 둥글지 않았다. 반쪽은 시뻘겋고, 반쪽은 시퍼런, 일그러진 '검은 월식'의 형상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아. 인간의 기억이란 원래가 허황된 짐일 뿐이다. 슬픔도, 고통도, 그리움도… 모두 내가 거두어주마. 이 강호의 모든 이름은 내 손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4. 강호 고수들이 이름을 잃고 맹주의 꼭두각시가 된다

광장은 지옥으로 변했다.

방금 전까지 무현을 향해 돌을 던지고 욕을 퍼붓던 군중이, 이제는 백지처럼 하얗게 멍한 눈을 한 채 일어섰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의지를 잃고, 오직 맹주의 손가락 하나에 움직이는 수천의 꼭두각시들.

철면을 비롯한 무림맹의 고수들마저 눈동자가 하얗게 풀린 채 무릎을 꿇고 남궁청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크… 크큭…”

남궁청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 피부가 미세하게 갈라지며, 그 틈새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현아, 보거라."

남궁청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꼭두각시가 된 수천의 무림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단상 위에 묶인 무현과, 그 아래 쓰러진 소한·소연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 쥔 칼끝이 일제히 번뜩였다.

"저들이 너를 기억하는 한, 너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이 너를 '적'이 아니라 '없애야 할 벌레'로 기억한다면… 너는 강호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네가 만든 인연들이, 네가 지키려던 아이들이, 직접 너를 도려낼 것이다. 이것이 네가 맞이할 최후다."

"남궁청… 이 미친 새끼…!"

무현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무명병이 목까지 차올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제압 속에서, 절망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여기서… 끝나는가.’

‘모든 것이… 지워지는가.’

스승의 유서도, 대모의 마지막 눈물도, 소연이의 울음소리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갔다.

5. 무현이 월식으로 진을 깨지만 큰 대가

그 순간, 무현의 귓속에서 아주 아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현아.

누구지?

스승이었나? 아니면…

-이름은 빚이 아니다. 선물이다.

-누군가 너를 기억하는 한, 너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나.

설원 무녀의 차갑고도 따스했던 품속의 온기가, 얼어붙은 심장 안쪽에서 미세한 불씨처럼 살아났다.

무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동공 속에서 푸른 백광과 칠흑의 어둠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 최종 초식, 월식(月蝕).’

금기 중의 금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이름과 기억을 태워서라도 계약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검강.

무현이 묶여 있던 굵은 쇠사슬이 단숨에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쿠구구구구궁—!

광장 바닥이 통째로 뒤집혔다.

하늘을 뒤덮은 백월진의 장부 다섯 권을 향해, 빛도 소리도 집어삼키는 칠흑 같은 초승달 참격이 쏘아 올려졌다.

파앗—!

천지를 가르는 검광.

남궁청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 녀석이! 미쳤느냐? 자신의 이름을 전부 태우고서도 이 진을 깨려 하다니!"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남궁청이 펼쳐 낸 백월진의 장부 중 두 권이 반으로 쪼개지며 공중에서 불타올랐다. 장부가 부서짐과 동시에, 꼭두각시가 되어 있던 군중의 눈에 돌아왔던 생기가 다시 꺼지며 땅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크아아아악—!"

무현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의 백발은 더 희어져 투명해졌고, 오른쪽 팔과 다리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며 반쯤 투명한 연기로 변해갔다. 자신의 이름을 너무 많이 태운 탓에, 그의 육신 자체가 강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라비…!"

소연이 기어와 무현의 투명해진 손을 붙잡았다.

"제발… 제발 나를 잊지 마… 오빠, 내 이름은 월소연이야… 오빠가 지어준 이름이잖아…!"

소연의 눈물방울이 무현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 따스한 눈물의 감촉 덕분에, 무현은 완전히 사라져 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6. 남궁청의 얼굴 뒤에 대모의 문양

남궁청은 충격을 입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품에서 반으로 쪼개진 장부들이 검은 재가 되어 날렸다. 맹주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고결한 위선의 가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기어코… 내 장부를…!"

남궁청이 이를 갈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혈광이 공중에서 모여 거대한 쇠사슬 형상을 이뤘다. 무현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한 최후의 일격이 내리꽂히려는 그 순간—

찌익—!

남궁청의 얼굴 피부가 완전히 갈라졌다.

마치 가면이 벗겨지듯, 무림맹주의 인자한 얼굴 표피가 찢어지며 그 밑에서 드러난 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 년 전 청월장을 불태웠던 흑월의 깊은 곳, 대모(월하)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은 ‘검은 달과 핏빛 거미의 문양’이었다.

남궁청의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지며, 전혀 다른, 늙고 지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큭… 잘 보았느냐, 서무현."

무현은 숨을 몰아쉬며 그 괴기스러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궁청— 아니, 그 속에서 그를 지배하던 진짜 흑월의 주인이 차갑게 웃으며 소리쳤다.

"네가 누구인지 아느냐? 네가 이 강호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무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 어머니는 내 약혼녀였다. 그리고 너는… 그 설원 무녀가 십 년 전, 내게 바친 첫 번째 '이름의 대가'이자… 내가 이 강호를 삼키기 위해 직접 빚어낸 가장 완벽한 계약서였다."

쾅—!

머릿속이 번개에 맞은 것처럼 하얗게 터졌다.

남궁청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십 년간 얽혀 있던 모든 떡밥의 근원이자, 무현이라는 존재의 뿌리 자체를 뒤흔드는 잔혹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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