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사형과 사제
지하 수십 척 깊이의 무명옥(無名獄).
붉은 혈월(血月)의 빛이 차가운 철창살 사이로 찢겨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은 거무스름한 핏물과 짓이겨진 이름 장부의 재로 뒤덮여 있었다.
지독한 쇠붙이 냄새와 타버린 양피지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스으으으-.
서무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삿갓 아래로 흘러내린 검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고였다. 무명병의 잠식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십 년 전 장원의 이름, 스승의 얼굴,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손에 쥔 흑천월식검의 검신마저 실체 없이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눈앞의 적은 선명했다.
"……사형."
무현의 입술 사이로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앞에 무릎을 반쯤 꿇은 채, 가슴팍이 뻥 뚫린 자가 있었다. 혁련오. 흑월문의 문주이자, 한때 그가 ‘사형’이라 부르며 등에 업히기를 원했던 아이.
혁련오의 입가에서 검붉은 선지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이 비틀리며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사제……."
혁련오의 손에 쥐여 있던 칠흑 같은 대검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신에 새겨진 문양들이 사그라들며 재로 변해갔다. 그가 계약의 대가로 지불한 이름은 이미 반 이상 날아간 뒤였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지워지는 고통 속에서도 혁련오의 눈동자는 똑바로 무현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틀렸었다. 장주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 늙은이의 유서 한 조각에 눈이 멀어서……."
"……"
"네가 가졌어야 했다. 그 검도, 그 이름도……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어."
철컥, 철컥.
어둠 속에서 무거운 갑주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월문 본단을 장악한 무림맹의 집법당 고수, 철면(鐵面)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가린 차가운 쇳덩이 가면 위로 월식이 만들어낸 기괴한 핏빛 음영이 드리워졌다.
"혁련오. 대죄를 짓고도 목숨을 구걸하느냐."
철면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는 기계음 같았다. 그는 손에 든 거대한 집법도(執法刀)를 치켜들었다.
"배신자는 자격이 없다. 흑월문의 잔재들과 함께 그 아래로 꺼져라."
쿠구구구-!
철면의 검이 내리꽂히는 순간, 무명옥 전체가 요동쳤다. 사방의 돌벽이 무너지고, 짓누르는 듯한 중력장이 무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흑천월식검의 기운을 모방한 무림맹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무현은 눈을 감았다.
사라져 가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스승 서문 월청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현아. 검은 칼을 쥐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름을 잃은 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서다.-
스윽.
무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빛을 삼키는 초승달 참격이 칠흑의 궤적을 그리며 철면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크윽……!"
철면이 뒤로 밀려났다. 그가 쓰던 가면의 미간 부근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쩍 소리를 내며 반쪽이 쪼개져 나갔다. 가면 속의 얼굴은 놀랍게도 낯이 익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의 장원을 불태우던 밤에 보았던 맹주 직속의 밀정이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무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처럼 엮여 있음을 깨달은 자의 허탈함이었다.
"무림맹이 흑월문을 삼키려 한 게 아니야. 흑월문의 이름 장부를 이용해 강호 전체의 이름을 먹어치우려는 거지. 남궁청, 그 자가……."
철면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이미 늦었다. 맹주님께서는 이미 열두 권의 장부 중 마지막 장을 펼치셨다. 너희 부모가 남긴 그 저주받은 이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그 순간, 혁련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에서 기괴한 흑빛 화염이 피어올랐다. 계약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올린 자가 마지못해 터뜨리는 마지막 반발력이었다.
"사제."
혁련오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무현의 어깨를 쥐었다. 그의 손바닥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었다.
"사형이…… 길을 열어마. 네가 가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사형, 안 돼! 그 몸으로 계약을 더 쓰면 영혼까지 소멸한다!"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내 이름으로 산 적이 없으니까."
혁련오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눈, 코, 입의 윤곽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계약이 그의 존재를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혁련오가 흑천월식검의 자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가라, 무현아! 위층으로 올라가! 맹주의 숨통을 끊어라!"
콰아아아아-!
혁련오가 휘두른 검은 대검이 무명옥의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쳤다.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역으로 반전되며 천장을 완전히 박살 냈다. 돌덩이들이 쏟아지고, 무명옥 꼭대기로 향하는 벼락같은 통로가 뚫렸다.
"사형!"
무현이 손을 뻗었으나, 혁련오의 등 뒤로 거대한 흑월의 그림자가 내리누르고 있었다.
혁련오의 몸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살점이 흩어지고, 뼈가 빛의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마지막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 미안하다…….
소리 없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혁련오의 존재는 완전히 무어(無語)의 상태로 환원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바닥에 떨어진 닳아빠진 흑천월식검 한 자루뿐이었다.
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비린내가 터져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슈우우-.
무현의 몸이 흑빛 잔상을 남기며 무명옥의 부서진 천장 위로 사출(射出)되었다.
무명옥 최상층, 달빛이 가장 강하게 내리꽂히는 제단.
거대한 금빛 장부가 공중에 떠서 펄럭이고 있었다. 그 장부의 표지에는 굵직한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 『서무현(徐武玄)』
그리고 그 장부의 아래, 피비린내 나는 제단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희뿌연 도포를 걸치고, 손에 쥔 붓으로 장부의 마지막 장을 짓이기듯 써 내려가고 있는 남자.
남궁청. 무림의 맹주라 불리는 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무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달빛처럼 차갑고,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삼켜 괴물이 된 자의 눈이었다.
남궁청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명옥 전체를 울리며 메아리쳤다.
"잘 왔다, 무현아. 네 어머니가 남긴 그 마지막 빚을…… 이제 돌려받아야겠구나."
제단의 위로 붉은 달이 정점에 달했다.
진짜 검은 달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단 위에서 펄럭이는 금빛 장부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강호의 고수들이 흑월문과 거래하며 팔아넘긴 ‘자아’의 집합체이자, 남궁청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해 파놓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내 어머니라…….”
무현의 목소리가 짓눌린 철판처럼 긁혔다. 삿갓 아래 드러난 그의 턱선과 뺨의 화상 흉터가 붉은 달빛 아래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설원 무녀 설야. 갓난아기였던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혹은 그저 흑월의 계약에 속박되어 스러져갔던 어머니의 이름이 저 차가운 장부 귀퉁이에 적혀 있다는 말인가.
남궁청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피로 물든 붓을 천천히 제단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놀랄 일도 아니다, 무현아. 이십 년 전, 대모가 흑월문을 세우고 처음으로 검은 달의 계약을 맺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가 누구였겠느냐. 흑월문주 혁련오의 아비이기도 했고, 청월장 장주 서문 월청의 동문이기도 했던 자. 바로 나다.”
“네가…….”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흑월과 함께였다. 아니, 흑월을 만든 것은 나였다.”
남궁청의 도포 자락이 스산한 바람에 펄럭였다. 그의 뒤편으로 펼쳐진 금빛 장부들이 일제히 페이지를 넘기며 수천, 수만 명의 울음소리 같은 환청을 토해냈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비명, 기억을 도둑맞은 이들의 허탈한 한숨이 무명옥 최상층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강호는 너무 시끄러웠지. 의를 부르짖고, 복수를 속삭이며, 서로를 물어뜯는 이 짐승 같은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느냐? 바로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이름을 잊으면 고통도 없고, 과거도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이 흉측한 강호에 완벽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뿐이다.”
“미치광이 소리.”
무현이 흑천월식검을 정면으로 겨눴다. 검신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의 붉은 달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날카로운 초승달의 형상을 빚어냈다.
“그건 평화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다. 네가 삼키려는 건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 그 자체야!”
“삶이란 원래 부질없는 찌꺼기에 불과하다.”
남궁청의 손끝에서 기이한 금빛 섬광이 튀었다. 그가 허공을 가르자, 제단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결계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수십 개의 붉은 쇠사슬로 변해 무현을 향해 쇄도했다. 명부대쇄(冥府大鎖). 외눈과 쌍눈이 쓰던 사슬과는 격이 다른, 무림맹주가 직접 다루는 계약의 사슬이었다.
콰아아앙!
사슬이 부딪치는 자리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무현은 그 맹렬한 공세 속에서 몸을 비틀며 흑천월식검을 휘둘렀다.
챙기기-!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지만, 남궁청의 사슬은 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무현의 검신을 타고 올라와 그의 팔목을 칭칭 감아쥐었다.
“크윽……!”
피가 튀었다. 사슬에 박힌 가시 같은 금빛 글자들—남이 기억하는 한 조각의 이름들이 무현의 살점을 파고들며 그의 기억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서무현……’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지우려 구둣발로 짓밟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삿갓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마에 새겨진 흉터와 핏기 없는 얼굴이 붉은 달빛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지워져라. 네가 누구였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든 상관없다. 마지막 장부에 네 이름까지 적히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빚은 청산되고 완벽한 허무가 도래할 것이다.”
남궁청이 손을 치켜들자, 허공에 떠 있던 금빛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가 저절로 팔락이며 펼쳐졌다. 그 하얀 종이 위로 붉은 먹물이 뚝뚝 떨어지며 선명한 세 글자가 스스로 적히기 시작했다.
[ 서 · 무 · 현 ]
장부에 이름이 적히는 속도에 비례하여, 무현의 손에 쥐여 있던 흑천월식검이 흩어지듯 옅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강호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 끝부터 시작된 투명화는 이미 팔목을 넘어 어깨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끝이다.
십 년 전 장원에서 도망쳐 나온 순간부터, 피비린내 나는 객잔을 전전하며 칼을 갈아온 이유도, 사형과 스승의 유언을 품고 여기까지 온 목적도 전부 무가치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참이었다.
‘오라버니……!’
그 순간, 아득한 밑바닥에서부터 찢어질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청월장의 잿더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붙잡고 울던 소녀의 얼굴.
월소연.
‘죽지마, 오라버니! 살아남아서 내 이름을 불러줘!’
기억의 연못 속에서 꺼져가던 촛불들이 하나둘씩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남겼던 마지막 눈빛.
스승 서문 월청이 쥐여주었던 검의 무게.
그리고 어머니 설야가 차가운 설원 속에서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마지막 온기.
“내 이름은…….”
무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계약의 사슬을 향해, 오히려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져 갔다.
“남이 기억해 줘서가 아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내가 품은 칼끝이 증명한다.”
쿠구구구구구-!
무현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순백색에 가까운 찬란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흑월문의 흑천월식검이 아니었다. 설원 무녀의 혈통 속에서 잠들어 있던, 빛으로 이름을 되돌리는 백천월광검(白天月光劍)의 기운이었다.
두 개의 달이 공존할 수 없듯, 칠흑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핏빛 계약의 장부가 쩌억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건 빚이 아니다.”
무현의 눈동자가 금빛과 칠흑빛의 혼합 속에서 온전히 투명한 빛으로 반짝였다.
“……선물이다.”
퍼어어어엉-!
무현이 휘두른 일격이 남궁청의 제단을 정중앙부터 박살 냈다.
금빛 장부가 수만 조각의 빛의 파편으로 흩어지며 무명옥 최상층의 천장을 뚫고 밤하늘의 구름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남궁청이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가슴팍에 한 줄기의 핏선이 쫙 그어졌다.
“어떻게…… 네가 스스로 이름을 증명해 낸단 말이냐! 계약의 율법을 거스르는 자는 영원히 소멸할 터인데……!”
“소멸하는 건 네가 세운 허상이다, 남궁청.”
무현이 피투성이가 된 발걸음으로 제단 위를 걸어 올라갔다. 그의 등 뒤로, 흩어졌던 흑천월식검과 새롭게 피어난 백천월광검의 기운이 완벽하게 겹쳐지며 거대한 월륜(月輪)의 형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시즌1의 피날레를 알리는 진짜 검은 달의 밤, 그 가장 높은 곳에서 두 검객의 마지막 칼끝이 서로를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