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무명옥
차가운 돌바닥은 피비린내와 습기 대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지독한 무(無)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는 낯설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공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강제로 빼앗긴 기억과 이름의 잔해들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였다.
서무현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삿갓 아래로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떨어져 바닥의 붉은 핏자국 위로 스며들었다. 손에 쥔 흑천월식검의 검신은 밤하늘의 월식을 닮은 칠흑빛을 품은 채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진동은 검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무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점점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였더라.’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감각. 그것은 육체의 고통보다 훨씬 지독했다.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십 년 전 청월장의 장원이 불타던 날 자신을 감싸 안았던 손길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 날카로운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아려오는 갈증만은 선명했다.
빚을 받아야 한다. 그 빚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이 허전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는 저 깊은 지하, 무림맹의 가장 어두운 심장부로 내려가야만 했다.
무명옥(無名獄).
그 이름 그대로 이곳은 이름과 기억을 강제로 압수당한 이들이 수감되는 지옥이었다. 무림맹의 화려한 전각들 아래, 영원히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 수십 척에 파여진 거대한 감옥.
철컥, 덜그덕—!
무거운 철문이 열릴 때마다 쇳덩이와 뼈가 부딪치는 기괴한 소음이 울렸다. 무현의 곁에는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따르는 소한과,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비틀거리는 소연이 있었다. 소연의 눈동자는 가끔씩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현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오라버니… 여기가… 어디예요?”
소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녀가 흑월문에서 지불한 대가는 컸다. 기억의 상당 부분을 저당 잡힌 소연에게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차갑고 거대한 미로 같았다.
소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연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정신 바짝 차려라, 소연아. 다 왔다. 저 아래에… 모든 것의 원흉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철갑을 두른 무림맹의 수족들이었다. 맹주 남궁청의 직속 집법수호대. 그들은 얼굴에 철면을 쓴 채, 붉은 빛이 감도는 장검을 빼어 들고 무현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는 무림맹의 금지다. 더 이상 발을 들인다면, 그나마 남은 목숨마저 거두어 줄 것이다.”
수호대장의 목소리가 지하 감옥의 냉기를 타고 차갑게 흩어졌다. 하지만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삿갓을 조금 들어 올렸다. 흉터가 가득한 얼굴 위로, 흑월의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길을 비켜라.”
낮게 짓눌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중력이 담겨 있었다. 무현이 한 걸음 내딛자마자, 그의 발밑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쾅—!
흑천월식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빛이 삼켜졌다. 사방의 횃불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감옥 전체를 집어삼켰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수호대장의 철갑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피가 튀고, 철면이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말 한마디 나눌 여유도 없었다. 무현은 복도의 끝에 위치한 가장 깊은 감옥, 무명옥의 최하층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최하층의 감옥들은 철창이 아니라 두꺼운 강화 유리와 진기(眞氣)를 차단하는 특수한 결계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갇혀 있었다. 아니, 갇혀 있다기보다는 ‘방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초점이 없었고, 입은 벌어진 채 침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 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껍데기들.
무명병의 말기 환자들. 남궁청이 흑월의 계약을 통해 강호 고수들의 '이름'과 '내공'을 강제로 뽑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육하던 가축들인 셈이다.
“여기가… 인간이 살 곳인가.”
소한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의 칠흑 대검이 파르르 떨렸다. 십 년 전, 자신을 속여 청월장에 횃불을 들게 만들었던 흑월문의 비극도 지독했지만, 지금 무림맹이 벌이고 있는 짓은 그보다 더 거대하고 음흉한 악행이었다.
바로 그때, 가장 안쪽의 독방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냐.”
발소리도 없는 허우적거림. 철창 너머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 온몸을 휘감은 굵은 쇠사슬, 그리고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는 흉터.
혁련오.
십 년 전 청월장을 피로 물들였던 첫 번째 제자이자, 무현의 사형.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바로 이 무명옥의 최하층에 유폐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오만하던 흑월문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거의 다 빼앗긴 채, 기억의 파편만을 겨우 붙들고 살아가는 폐인에 가까워져 있었다.
혁련오가 핏발 선 눈동자로 철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소연과 소한을 지나, 맨 앞에 선 무현에게 닿았다.
“…사… 사제?”
혁련오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기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아직 안 죽었구나. 내 칼에 심장이 뚫렸을 텐데… 아니, 내가 그 짓을 했던가?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아.”
그는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남궁청은 그에게서 흑월의 비밀과 검술을 모두 빼앗은 뒤, 쓸모가 없어지자 이 지하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무현은 흑천월식검을 늘어뜨린 채 혁련오를 바라보았다. 분노여야 했다. 십 년 전의 원수이자,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있던 자. 베어버려야 마땅한 핏덩이 같은 사형.
하지만 무현의 가슴속에서는 이상하게도 차가운 허무함만이 밀려왔다.
“혁련오.”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혁련오가 쇠사슬을 흔들며 철창에 부딪쳤다.
“내 이름이 뭐였지? 흑월문주? 아니… 그건 내가 아니었어. 난… 난 그저 스승님의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남궁청 그 놈이… 그 놈이 내 귀에 속삭였다. 계약을 맺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혁련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제… 도망쳐라. 이 무림맹주는 괴물이다. 그는 이름을 모으고 있어. 강호 전체를 집어삼킬 계약의 장부를 완성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설야의 영혼을 강제로 붙잡아두려고… 크하하하!”
미친 듯이 웃던 혁련오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의 등 뒤에서 붉은 검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남궁청이 심어둔 감시의 장치이자, 배신자에 대한 처벌의 도구였다.
끼익— 쾅!
그 순간, 무명옥 전체의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붉은 화불들이 일제히 암전되며, 사방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몰려들었다.
“침입자 발견!”
“모두 사살하라!”
철면을 쓴 수호대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며 밀려들었다. 그 선두에 선 자는 서늘한 은빛 가면을 쓰고, 손에 기괴한 실타래를 쥔 남자— 집법당 고수, 철면이었다.
철면의 차가운 눈빛이 무현 일행을 훑었다.
“서무현. 네 놈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올 줄이야. 쥐새끼처럼 숨어 살 것이지, 기꺼이 묘실로 걸어 들어오는구나.”
철면의 손가락이 까딱이자,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명부혈쇄를 펼치며 사방을 포위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뒤에는 굳게 닫힌 무명옥의 결계가 있었고, 앞에는 무림맹의 정예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소연이 불안하게 떨며 무현의 옷자락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오라버니… 어떡해….”
소한이 칠흑 대검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뚫는다. 둘을 데리고 도망쳐라, 무현아.”
“아니.”
무현이 낮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흑천월식검의 검신에서 흘러나오는 칠흑 같은 어둠이 그의 그림자와 하나로 엉기기 시작했다. 이름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중력장은 오히려 더욱 무겁고 진해지고 있었다.
“여기서 끝을 낸다.”
무현이 검을 치켜들려는 그 순간이었다.
덜컥—!
철창 안쪽에 갇혀 있던 혁련오가 갑자기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그의 손바닥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났지만, 혁련오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힘을 주었다.
파지직—!
무명옥의 특수 결계가 그의 폭주하는 내력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혁련오가 철창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형?!”
소한이 경악하며 외쳤다. 혁련오의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고, 눈동자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무현이 아니었다.
혁련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철면과 집법수호대 앞을 가로막아 섰다.
“너희들… 내 사제를 건드리지 마라.”
혁련오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는 반쯤 지워진 기억 속에서도, 단 하나의 본능만을 붙들고 있었다.
십 년 전 자신이 망가뜨렸던 것. 자신이 직접 불을 지르고 파괴했던 그 모든 과오의 끝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제를 향한 마지막 속죄인지, 아니면 미쳐버린 자의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철면이 차갑게 눈을 가늘게 떴다.
“제정신이 아니군. 혁련오, 너 또한 처형 대상이다. 함께 베어라!”
“크아아아—!”
혁련오가 미친 듯이 포효하며 맨몸으로 철면의 검을 향해 뛰어들었다. 흑월문의 금기 무공인 흑천월식검의 잔재가 그의 주먹에서 터져 나왔다. 비록 완성되지 못한 엉터리 참격이었지만,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쾅—!
지하 감옥이 진동하며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철면의 검이 혁련오의 어깨를 관통했고, 혁련오의 피투성이 주먹은 철면의 갑주를 깊숙이 함몰시켰다.
혁련오의 몸이 털썩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피를 토하며, 흐려져 가는 눈으로 무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입 모양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도망쳐… 사제…….’
그것이 혁련오가 남긴 마지막 단어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존재 자체의 흔적이 완전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껍데기조차 남지 않는, 완전한 죽음.
“사형…….”
무현의 가슴속에서, 잊혀졌던 어떤 기억의 파편이 거칠게 요동쳤다.
아주 오래전, 달빛 아래서 함께 검을 맞추던 어린 날의 기억. 눈이 내리던 밤, 서로의 등을 기대며 웃었던 미소. 그 모든 기억이 흑월의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금빛으로 반짝였다가 스러져 갔다.
철면이 피를 닦아내며 차가운 시선으로 무현을 향해 걸어왔다.
“방해꾼 하나는 치웠다. 다음은 네 차례다, 서무현.”
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고 홀로 남은, 검은 달의 눈동자였다.
무현이 흑천월식검을 고쳐 잡았다. 검신에서 흘러나오는 칠흑빛이 지하 감옥의 모든 어둠을 흡수하며 거대한 초승달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는다.
빚을 갚을 시간이었다.
“……허튼짓을.”
철면의 목소리가 지하 감옥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의 은빛 가면 위로 감옥 천장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탁한 붉은빛이 번뜩였다. 혁련오가 남긴 시체는 이미 검은 연기로 화해 흔적조차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삶도, 흑월문주로서의 오만도, 모두 계약의 불길 속에 타들어가 먼지가 된 셈이다.
철면은 손에 쥔 명부혈쇄를 가볍게 휘둘렀다. 핏빛 사슬이 허공을 채찍처럼 후려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이름을 잃은 패배자 하나가 죽은 것뿐이다. 서무현, 네 놈의 결말 역시 저자와 다르지 않을 터. 무림맹의 심장부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 것을 후회하며 무릎을 꿇어라.”
철면의 뒤로 수십 명의 집법수호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신마다 남궁청이 집어삼킨 고수들의 내공이 검붉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사방을 압박해 오는 살기는 무명옥의 결계마저 잘게 부수고 있었다.
하지만 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두 발은 무명옥의 차가운 돌바닥에 깊숙이 박힌 듯 묵직했고, 손에 쥔 흑천월식검은 오히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린 것처럼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무명병의 통증이 순간적으로 아득해졌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십 년 전 그날 밤부터 이어진 지독한 빚의 연쇄뿐이었다.
“소연아, 소한아.”
무현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여기서부터는 내 싸움이다.”
“오라버니!”
소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함께, 또다시 소중한 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혼란이 서려 있었다. 소한은 치를 떨며 칠흑 대검을 고쳐 잡았지만, 무현이 던진 말의 무게를 깨닫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한은 소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 나가라, 무현아. 네가 죽으면, 우리가 진 빚은 영원히 갚을 수 없다.”
소한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무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철면과 집법수호대에게로 돌렸다.
쾅—!
무현의 발밑에서 폭음이 터졌다.
그것은 단순한 보법이 아니었다. 흑천월식검의 초식, 그 첫 번째 자락이 발끝의 진기를 통해 지면으로 파고든 것이다. 지반이 뒤틀리고, 감옥 벽의 강화 유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어림없다!”
철면이 명부혈쇄를 강하게 내지르며 최선두로 도약했다. 핏빛 사슬이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며 무현의 상반신을 옥죄어 들었다. 사슬이 스치는 자리마다 공기마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무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슈우우욱—!
무현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스치는 순간, 세상의 빛이 일시에 꺼졌다. 흑월의 중력장이 사방으로 확산하며 철면이 날린 핏빛 사슬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빛을 잃은 공간 속에서 오직 초승달 모양의 칠흑 참격만이 금빛 잔상을 남기며 뻗어 나갔다.
“이…… 이런 각……?!”
철면의 가면 아래서 경악 어린 단말마가 새어 나왔다.
그가 평생 갈고닦은 무림맹의 비기조차, 무현이 휘두르는 검의 중력 앞에서 솜사탕처럼 무력하게 찢겨 나갔다. 칠흑빛 참격은 철면의 어깨를 비스듬히 스치며 감옥의 두꺼운 철문을 종잇장처럼 양단했다.
투둑, 툭—!
철면의 은빛 가면이 반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피가 쏟아지기도 전에, 무현의 검신이 이미 철면의 목 겨드랑이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네가 모은 그 장부, 어디 있나.”
무현의 목소리는 지옥의 저승사자처럼 낮고 차가웠다.
철면은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렸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하…… 어리석은 놈. 장부를 찾았느냐? 이미 늦었다…… 맹주님께서는 이미…… 마지막 계약을 완성하기 위해…….”
철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감옥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명옥의 최상층, 무림맹 본전이 위치한 지면 위에서부터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하 감옥의 천장이 갈라지며 쏟아지는 먼지 사이로, 밤하늘의 달빛이 붉은색에서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진기한 풍경이 스며들었다.
검은 달의 완성.
월식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오라버니…… 저것 봐요……!”
소연이 공포에 찬 목소리로 허공을 가리켰다. 무명옥의 벽면을 타고 흐르던 금빛 글자들—남궁청이 강호 고수들에게서 빼앗아 온 수많은 '이름'의 장부들이 일제히 붉고 검은 화마에 휩싸인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궁청이 기다리던 순간이자, 십 년 전 장원을 태웠던 그 불길이 다시 한번 강호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깨어나는 신호였다.
무현은 철면을 향했던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삿갓 아래 감춰진 그의 눈동자 속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타오르는 금빛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남궁청.”
무현의 입에서 짓씹듯 흘러나온 이름은 지하 감옥의 공기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이 지하의 어둠을 지나, 이제는 강호의 정점에 도사린 진짜 채권자의 목을 베러 올라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