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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36화목차

제36화 명부대쇄

빛이 바랜 지하 갱도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핏물과 흙먼지가 뒤섞인 비린내가 코를 찔렀고, 천장 곳곳에 박힌 청동 등불은 깜빡이며 죽어가는 심장처럼 불안정한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챙——! 콰아아앙—!

귀를 찢는 거대한 금속음이 동굴 벽을 때렸다. 쌍눈이 휘두르는 명부대쇄(冥府大鎖)는 그야말로 핏빛의 재앙이었다. 형제였던 외눈의 무기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하고 음산한 쇠사슬은 살아 움직이는 독사처럼 공간을 얽어맸다. 사슬 끝에 달린 거대한 추(錘)가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사방으로 돌가루와 시뻘건 귀화(鬼火)가 튀었다.

"크윽……!"

서무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의 삿갓은 이미 반쯤 찢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화상 흉터가 드러난 얼굴 위로 차가운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흑천월식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신을 감싸던 칠흑 같은 중력장은 이제 겨우 유지될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검은 달의 계약. 그 대가로 이름을 빚진 자의 운명은 잔인했다. 힘을 쓸수록 머릿속의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내가 누구였던가. 나는 왜 이 칼을 쥐고 있는가.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동생들의 얼굴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해졌다.

"형님!"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붉은 가면을 반쯤 깨트린 소한이 무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쌍눈의 사슬이 허공을 가르며 소한의 등 뒤를 덮쳤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소한은 자신의 등 뒤로 쏟아지는 죽음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제 뒤에 서 있는 어린 동생 소연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십 년 전, 흑월문의 거짓말에 속아 횃불을 들었던 죄책감. 그 지옥 같은 속죄의 길을 걷던 소한에게 이번만큼은 단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선이었다.

콰아아식—!

살을 찢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명부대쇄의 핏빛 사슬이 소한의 어깨를 관통하고 등짝을 꿰뚫었다. 선혈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오라버니……!"

소연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소연의 눈동자에서 핏물이 어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품에서 명인(名刃)을 뽑아 들며 사슬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쌍눈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남은 사슬 한 가닥을 가볍게 휘둘렀다.

챙그랑!

소연이 손에 쥔 금빛 이름칼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녀의 몸이 허공을 날아 암반에 강하게 부딪혔다.

"크흑……!"

소연 역시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쌍눈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제 무기에 꿰여 있는 소한을 사슬째 번쩍 들어 올리며 흉측하게 낄낄거렸다.

"흐흐흐, 흑월의 배신자 새끼들. 장주가 그렇게 아끼던 핏덩이들의 말로가 참혹하구나. 그 몸뚱이가 찢어지면 다음은 네 차례다, 검객."

쌍눈의 눈빛이 광기로 이글거렸다.

무현은 그 광경을 흐릿해지는 시야로 바라보았다.

기억이 무너진다.

눈앞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저 사내가 누구지? 내 동생…… 소한?

아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저 소년이 내게 무엇이었지? 함께 달빛 아래서 나눈 약속이 있었던가?

머릿속에서 커다란 지우개가 거칠게 문지르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계약의 장부가 자아를 집어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네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내놓아라.’

그 목소리가 영혼을 갉아먹었다. 이대로 가면 소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지워질 판이었다.

그 순간, 무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 같은 충동이 치솟았다.

기억이 지워진다면, 지워지게 두면 안 된다.

내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지만, 적어도 이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아니,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면.

무현은 이를 악물고 잇몸이 으스러져 피를 흘리면서도 흑천월식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입에서 간절하고도 처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을…… 가져가라. 대신, 저 아이의 이름을 남겨다오."

쿠구구구구궁—!

지하 갱도의 천장이 무너질 듯한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하늘에 달이 없었음에도, 무현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달의 환영이 핏빛 안개 속에서 떠올랐다. 그것은 계약의 집행자이자, 이름을 삼키는 절대적인 심판의 눈이었다.

검은 달의 표면에서 금빛 글자들이 모래바람처럼 흩어졌다.

무현의 머릿속에서 소한과 함께했던 십 년 전의 기억들이 빛을 잃고 바스러졌다. 눈앞에 쓰러진 소년이 누구인지 명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소한…….’

그 이름의 무게가 뇌리에서 지워지는 순간, 무현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하지만 그 대가였다.

무현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의 참격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를 지니게 되었다. 빛마저 집어삼키는 완전한 허무의 검강(劍罡).

화아아악—!

"이게…… 뭐지?"

쌍눈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이 스쳤다. 사슬을 당겨 방어벽을 치려 했지만, 무현의 참격은 핏빛 사슬을 마치 두부처럼 부드럽게 양단해 버렸다.

스걱!

"크아아악—!"

쌍눈의 몸이 정중앙부터 반으로 갈라졌다. 검은 불꽃이 그의 상처 부위를 타고 올라가며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도록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태워버렸다.

거대한 사슬을 휘두르던 쌍눈은 단 한 번의 베임에 허공의 핏빛 안개로 화해 흩어졌다.

쾅-!

쌍눈이 소멸하며 떨어뜨린 명부대쇄의 파편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동굴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오라버니……! 형님……!"

소연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기어와 소한의 부서진 몸을 끌어안았다. 소한의 호흡은 이미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있었고, 상처 부위에서는 검은 달의 저주가 피어올라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콜록…… 소연아……."

소한은 피를 토하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무현을 향했다.

하지만 무현은 그저 멍한 눈으로 칼을 쥔 채 서 있었다. 삿갓이 완전히 벗겨져 드러난 그의 얼굴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동생을 향한 애틋함도, 방금 전까지의 분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을 내어준 대가였다.

소한이 누구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 무현의 기억 속에서 그 파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있었다.

"형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소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피묻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현은 그 손을 잡지 못하고 그저 마비된 듯 서 있을 뿐이었다.

"크윽…… 흐윽, 오라버니! 제발 정신 차려요! 죽으면 안 돼……!"

소연의 절규가 지하 동굴을 무너뜨릴 듯 메어졌다. 그녀는 오빠의 상처를 막으려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감쌌지만, 흑월의 저주로 뒤틀린 상처는 인간의 손길 따위로 멎을 수준이 아니었다. 살이 썩어들어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붕괴된 동굴 입구의 먼지를 헤치며 한 무리의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낡은 약초 가방을 둘러멘 채, 기이할 정도로 맑은 눈을 한 노인이었다.

백초.

이름을 치료비로 받는다는 강호의 기인(奇人)이 횃불을 높이 들고 그 참혹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초는 피투성이가 된 소한을 한 번 훑어보고는, 힐끗 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쯧쯧, 벌써 계약의 반을 팔아넘겼군그래. 기억을 지불하고 얻은 검이라니, 참으로 어리석고도 처절하구먼."

소연이 고개를 들어 백초를 향해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우리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무엇이든 드릴 테니까……!"

백초는 품에서 빛바랜 약병을 꺼내 들며 차갑게 말했다.

"내 치료법은 간단하다. 뼈가 부러지면 뼈로 갚고, 피가 흐르면 피로 갚는 법. 하지만 이 상처는 보통의 의술로는 못 고친다."

백초가 소한의 검게 썩어가는 상처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이 상처는 오직 '이름'으로만 고친다."

그 말에 소연의 숨이 턱 막혔다.

이름을 치료비로 받는 의원. 그렇다면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선 또다시 누군가의 기억을, 혹은 자신의 이름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 검은 달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그들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이름……이라니요?"

소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하 갱도의 축축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백초는 낡은 약초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연민도, 자비도 없었다. 오직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자만이 지닌 냉소만이 서려 있었다.

"말 그대로다, 곪아 터진 계집애야. 흑월의 저주가 새겨진 상처는 평범한 침과 뜸으로는 멎지 않아. 그건 살과 뼈를 에는 고통 정도가 아니지. 이 사내가 입은 상처는 '존재의 소멸'을 뜻하는 계약의 파편이다. 그러니 그 상처를 덮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이름의 무게'를 지불해야만 해."

백초의 손가락이 소한의 피투성이가 된 가슴팍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여전히 뱀의 혓바닥처럼 기어 다니는 검은 달의 기운이 소한의 남은 생명력을 야금야금 과먹고 있었다. 살점이 검게 문드러지고, 피 대신 흘러내리는 흑기(黑氣)는 이미 그의 심장 부근까지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우리 오라버니가……!"

소연은 바닥에 엎드려 소한의 차가워진 손을 그러쥐었다.

방금 전, 무현이 자신의 이름을 바쳐 쌍눈을 베어버릴 때, 소한은 이미 그 대가로 무현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형님이라 불렀던 그 사내가 이제 자신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정도 떠올리지 못하는 텅 빈 눈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소한의 목숨마저 이름으로 저울질당해야 한다.

소연은 고개를 돌려 서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무현은 여전히 삿갓이 벗겨진 채, 화상 흉터가 드러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쥔 흑천월식검은 언제 다시 검은 불길을 토해낼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동생을 향한 애틋함도, 살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껍데기.

계약의 장부가 삼킨 자아의 빈자리는 차가운 허무로 가득 차 있었다.

"형님…… 나를…… 보아주세요……."

소한이 마지막 힘을 짜내며 토해내듯 신음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거품처럼 솟구쳤다.

무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그러졌지만, 거기까지였다. 머릿속의 커다란 지우개는 이미 소한이라는 존재의 뿌리까지 완벽하게 도려내고 있었다.

‘저 사내가 누구지? 왜 내 앞에 쓰러져 있는 거지?’

무현의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은 오직 차가운 바람뿐이었다.

"시간이 없다, 꼬마야."

백초가 품에서 빛바랜 양피지 조각과 작은 금침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빛났다.

"이 자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네가 가진 것을 내놓아라. 혹은…… 네 곁에 서 있는 그 껍데기 같은 검객이 남은 기억을 마저 내놓든가."

"내, 내 이름을 가져가세요!"

소연이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려 소한의 손등을 적셨다.

"제 이름을 가져가도 좋고, 제 영혼을 가져가도 좋아요! 그러니…… 우리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백초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 이름? 하! 그딴 어린애의 가벼운 이름 따위가 이 거대한 저주를 누를 수 있을 것 같으냐? 흑월의 계약은 등가교환이다. 목숨은 목숨으로, 이름은 이름으로만 채워진단 말이다."

백초의 시선이 다시 무현을 향했다.

"저 검객이 이미 반쪽짜리 계약을 치렀으니,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려면…… 아마 저 자의 남은 기억 전체, 혹은 이 자리에서 그가 가진 '검객'이라는 이름의 본질을 통째로 바쳐야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저 자는 영원히 칼을 쥘 수도, 누군가를 기억할 수도 없는 진정한 괴물이 되겠지."

쿵— 쿵—!

지하 갱도의 깊은 곳에서 다시금 거대한 심장박동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하늘 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달이 이 지독한 비극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연은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소한과 무현을 번갈아 보았다.

오빠를 살리려면 무현이 영원히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하지만 무현을 구하려면 오빠가 이 자리에서 숨이 넘어가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지옥이었다.

"아…… 아아……."

소연의 목이 메어왔다. 그녀가 품에 품고 있던 명인(名刃)의 칼날이 미세하게 울었다.

금빛으로 빛나야 할 칼날은 지금 두려움과 슬픔에 질려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우—!

아무 말도 없던 서무현의 몸에서 문득 차가운 칠흑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의도된 내력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반사였다. 기억은 지워졌고, 감정은 휘발되었지만, 그의 육신에 새겨진 '검객'으로서의 핏줄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던 것인가.

무현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그의 멍하던 눈동자에 문득 아주 가늘고 희미한 금빛 파문이 스쳤다.

"소…… 한……."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비록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 쓰러진 소년이 자신과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지만,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지독한 통증만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켜야 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을.

무현은 삿갓이 날아간 맨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갱도의 암반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는 칠흑 같은 밤하늘에 떠오른 검은 달이 선명하게 비치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더 가져가라."

무현의 목소리는 피에 젖어 낮고 쉰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일찍이 없던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지하 동굴의 바닥이 갈라지며 거대한 흑빛 소용돌이가 무현의 발밑에서 피어올랐다.

검은 달의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듯, 공중에서 수많은 금빛 문자들이 흩날리며 무현의 몸을 휘감았다.

"이 미친 녀석……! 정말로 남은 자아까지 전부 바치겠다는 거냐!"

백초조차 그 압도적인 계약의 기운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계약의 힘이 무현의 영혼을 겲겲이 찢어발기며 소한의 상처로 흘러 들어갔다.

화아아아악—!

소한의 어깨를 썩어들어가게 만들었던 검은 연기가 무현이 바친 이름의 대가 앞에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찢어진 살점이 오므라들고, 검게 변색되었던 피부가 원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콜록……! 허허읍……!"

소한이 눈을 크게 뜨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무현의 몸은 눈에 띄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서무현'이라는 존재의 흔적들이 강호의 바람 속으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형님……?"

소한이 비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무현은 더 이상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완전히 초점을 잃었고, 손에 쥐었던 흑천월식검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챙그랑 소리를 냈다.

스으으…… 흩어지는 핏빛 안개 속에서, 검은 달의 밤이 그 잔인한 서막을 마무리지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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