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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35화목차

제35화 스스로 펼쳐진 장부

차갑고 무거운 대기가 화산의 정점을 짓누르고 있었다.

매화검진의 잔해 위로 흩날리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시든 회색 재였다. 무명병에 잠식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화산파 제자들은 더 이상 검을 쥐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헐떡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얗게 질린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철면 은사가 던진 첫 번째 장부는 허공에서 멈춰 선 채 천천히,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스-윽, 스윽.

기괴한 소리가 정점의 고요를 깨웠다. 양피지나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피부가 모래 위를 끌리는 듯한, 둔탁하고도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었다.

장부의 겉표지가 완전히 젖혀지고, 붉은 피로 쓰인 듯한 첫 페이지의 이름들이 드러났다.

그 글자들은 허공에 떠오르며 금빛으로 변해 번뜩였다.

그리고 가장 선명하게, 다른 모든 이름들을 압도하며 떠오른 세 글자가 있었다.

『서무현(徐武賢)』

그 순간, 무현의 머릿속이 쩌렁하고 울렸다. 마치 벼락이 뇌수를 직격한 것 같은 충격이었다.

"크윽……!"

무현이 상체를 숙이며 무릎을 짚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손등에 솟아오른 핏줄이 검푸르게 부풀어 올랐다.

"오라버니!"

소연이 경악하며 달려와 무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소연은 허공에 떠 있는 장부의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의 잿더미 속에서 자신의 손으로 주워 담았던 이름들이 저곳에 있었다. 아니, 주워 담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쓰여 있던 것이다.

"이게…… 뭐야? 어째서 오라버니의 이름이 거기에 있는 거야?"

소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십 년 동안 믿어왔다. 이 빚은 복수해야 할 대상, 흑월문의 문주와 십 년 전 그 밤에 횃불을 들었던 이들에게 받아내야 할 살인과 파멸의 빚이라고.

하지만 장부에 적힌 이름은 흑월문의 누군가가 아니었다. 바로 무현, 그녀가 의오라비로 따르며 평생을 함께해 온 검객의 이름이었다.

소한 역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칠흑 같은 대검을 땅에 짚은 채,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현…… 형. 설마."

"……."

무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문이 억지로 열리며 쏟아지는 파편들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염.

피비린내.

그리고 눈이 멀 것 같이 시리던 하얀 설원.

비정상적으로 쏟아지던 눈발 속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얼어붙은 대지 위, 검은 달이 떠오르던 밤. 어떤 여인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피투성이가 된 채 눈밭을 달리고 있었다.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의 손목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고, 그 아기의 이름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찢겨 나간 장부의 첫 페이지에 낙인찍혀 있었다.

"아……."

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원 무녀 일족.

그것이 그의 뿌리였다. 흑월의 계약이 강호에 퍼지기 훨씬 전, 달과 계약을 맺어 비극의 문을 열었던 최초의 피붙이.

무현은 자신이 십 년 전 청월장에 흘러들어온 떠돌이 고아라고 믿고 있었다. 스승인 서문 월청이 거두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검을 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청월장에 거두어진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의 열쇠로서 바쳐진 것이었다.

"거짓말……."

무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모래처럼 부서졌다.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야."

철면 은사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가면 너머로 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쥔 검,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그 무공이 왜 하필 너에게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익혀졌다고 생각하나? 그건 배운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네 혈맥 속에 새겨져 있던 유전(遺傳)이니까. 흑월문이 네게 준 것이 아니야. 네가 바로 흑월문의 '시작'이다."

철면의 말은 무현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칼날과 같았다.

소연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허공에 떠 있는 금빛 장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명인의 빛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휘몰아쳤다.

"닥쳐라! 그런 소리 집어치워!"

소연이 소리치며 장부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장부를 태워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저 악랄한 이름이 적힌 종잇조각만 없애버리면, 오라버니가 지어낸 이 저주 같은 운명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안 돼, 소연아!"

무현이 급히 손을 뻗어 소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콰아아앙!

소연의 검기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장부를 감쌌지만, 장부는 스치기만 할 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어둠이 소연의 검기를 집어삼켰다.

"왜 막는 거야, 오라버니! 저딴 게 뭔데! 저게 오라버니를 삼키고 있잖아! 기억을 지우고, 자아를 부수고, 괴물로 만들고 있잖아!"

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십 년 전 부모를 잃고, 장원이 불타버렸을 때 흘렸던 눈물보다 더 뜨겁고 아픈 눈물이었다.

"태워야 해. 저 장부를 태우지 않으면, 오라버니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거야! 이름이 지워진 자가 어떻게 살아남아!"

"소연의 말이 맞다, 형."

소한이 무현의 다른 한쪽 팔을 붙잡으며 거들었다. 소한의 얼굴에도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가 십 년 동안 쫓아온 게 뭐야? 복수잖아. 이 따위 운명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칼을 갈아온 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네가 그 장부의 주인이라고? 네가 계약의 대가라고? 말도 안 돼. 형은 그냥 우리 형이야. 청월장의 수제자 서무현이야!"

두 동생의 절규가 무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며 지켜주려 하는 이 따스한 온기.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무현의 머릿속에서는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타인이 자신을 기억하고 불러줄수록 역설적으로 검은 달의 계약이 발동하여, 무현의 기억 속에서 '서무현'이라는 존재의 색채가 옅어지고 있었다.

이름은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역으로, 그 이름을 인식하는 순간 계약의 무게는 더욱 강하게 대상의 영혼을 짓누른다.

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터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소연아, 소한아. 물러서라."

"싫어! 못 물러서!"

"이건 내 빚이다."

무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짊어져야 할 빚이야. 십 년 전, 내가 이 장원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내가 이 칼을 쥘 수 있었던 이유…… 전부 이 장부와 연결되어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생모는 나를 살리기 위해 달과 거래를 했다고 했다. 내 이름을 담보로 잡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목숨을 얻은 거지. 그러니까 이 장부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무현이 허공에 떠 있는 금빛 장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건 나의 계약서이자, 나의 진짜 이름이다."

"안 돼!"

소연이 다시 한번 검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정점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짙어지며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슈우우우-!

기분 나쁜 바람 소리와 함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까까지 화산의 온화하던 봄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방 설원의 빙하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 살벌한 한기였다.

"……누구냐?"

소한이 즉시 칠흑 대검을 가로지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철면 은사 역시 가면 속의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안개 속을 응시했다.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쿵, 쿵.

발소리마다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보통 사람의 체구가 아니었다. 짐승의 탈을 뒤집어쓴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거대한 덩치였다.

그림자가 짙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양 끝에 묵직한 쇠사슬이 달린 거대한 철퇴를 들고 있었고, 상체는 웃통을 벗은 채 온몸에 붉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얼굴이었다.

한쪽 눈만 남아 있던 외눈 문지기.

그 문지기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흉터. 차이가 있다면 그 자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눈이 파여 있었다는 점이다.

"……네놈은."

무현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거대 남자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안에서 번뜩이는 은빛 송곳니가 드러났다.

"오랜만이네, 서무현. 아니, 계약의 첫 번째 열쇠."

남자가 묵직한 철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아아아궁!

바위가 산산조각 나며 붉은 핏빛 사슬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십 년 전 흑월문에서 무현이 상대했던 외눈 문지기의 '명부혈쇄'와는 격이 다른, 차원이 다른 살기였다.

사슬 전체가 피에 절어 검붉은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남자가 기괴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이 네 칼에 죽었다고 하더군. 뼈도 남지 않고 으깨졌다고."

남자가 철퇴를 어깨에 걸쳐 메며 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두 눈(하나는 파여 있었지만)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문지기는 내 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쌍둥이 형이지."

쉬익-

남자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붉은 사슬이 허공을 갈랐다.

명부혈쇄의 원형(原型)이자, 모든 사슬 무공의 시초라 불리는 살진.

『명부대쇄(冥府大鎖)』가 화산의 정점을 향해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무현을 향해 덮쳐들었다.

거대한 붉은 사슬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단순한 무기의 궤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방의 공간을 완전히 압착시키는 거대한 중력장의 울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쾅-!

무현이 급히 몸을 날려 피했지만, 쌍눈이 내리친 명부대쇄의 여파만으로도 단단한 화산의 바위 정점이 두부처럼 부서져 내렸다. 사방으로 튀는 돌무더기와 함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형!"

소연이 경악하며 명인의 빛을 두른 비수를 날리려 했으나, 쌍눈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거대한 철퇴를 휘둘러 검기를 단숨에 박살 냈다.

"끼어들지 마라, 계집. 네 녀석의 목숨은 나중에 장부에 기록될 테니까."

쌍눈의 얼굴에 떠오른 잔인한 미소는 죽은 외눈 문지기의 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짙고 깊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무현은 입술을 깨물며 흑천월식검을 고쳐 잡았다.

'명부대쇄…….'

외눈 문지기가 쓰던 혈쇄가 단순히 피의 기운을 담은 사슬이었다면, 쌍눈이 구사하는 대쇄는 그 피의 근원 자체를 태우는 주술적 살진이었다. 사슬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허공이 검게 짓무르며 썩어 들어갔고, 화산의 지맥을 타고 흐르는 정기마저 오염되고 있었다.

철면 은사는 이 광경을 한 걸음 물러서서 흥미롭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과연, 흑월의 원초적인 수호자답군. 계약의 장부가 펼쳐진 순간, 음지의 사냥개들도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고 기어 나오는가."

"철면, 네놈도 한통속이었나!"

소한이 칠흑 대검을 겨누며 철면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철면은 가면 너머로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한통속이라니, 실례되는 소리다. 나는 그저 진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찰자일 뿐. 그 장부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저 검객이 거부하든, 아니면 영혼이 찢겨 나가든 말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금빛 장부가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스-윽, 스윽-!

장부의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갈 때마다, 무현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파편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두운 밀실, 핏자국이 가득한 제단, 그리고 자신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하얀 옷의 여인—— 설원 무녀 설야.

그녀의 얼굴이 기억날 듯 말 듯 흐릿하게 흩어지며, 무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무현이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땅에 박았다.

흑천월식검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칠흑 같은 빛이 요동치며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이름과 자아가 지워진다는 금기의 규칙이 지금 그의 영혼을 조각내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달려와 무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무현의 등 뒤로 전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연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할수록, 허공의 장부는 더욱 선명한 금빛으로 빛나며 무현의 자아를 장부 속으로 끌어당겼다.

"소연아…… 물러서라……."

무현의 목소리가 쉰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서 인간의 온기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에 텅 빈 허무함과 차가운 달빛만이 차올랐다.

"안 돼! 내가 왜 물러서야 해! 오라버니가 없으면 나도 없어!"

소연의 눈에서 터진 눈물이 무현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소연의 눈물이 무현의 뺨을 적시자마자, 허공에 떠 있던 장부의 금빛 글자 중 일부가 잠시 빛을 잃었다.

'타인이 진심으로 기억하고 눈물 흘릴 때, 이름은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

그것은 이 거대한 비극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구원의 실낱같은 끈이었다.

무현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붙잡고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피에 절은 철퇴를 겨누며 다가오는 쌍눈이 있었다.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다. 계약의 첫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자는, 결국 마지막 달이 뜨는 밤에 그 본모습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쌍눈이 비웃음을 흘리며 명부대쇄를 다시 한번 거칠게 휘둘렀다.

수십 갈래의 붉은 사슬이 화산의 정점을 완전히 뒤덮으며 무현과 소연, 소한을 향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피비린내 나는 살진의 기운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 검신을 적셨고, 칠흑 초승달의 참격이 어둠을 가르며 피어올랐다.

비록 기억이 지워지고 이름이 빚으로 삼켜진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제 두 동생을 지키기 위해, 검객은 다시 한번 검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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