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화산의 매화
차갑고 매서운 화산(華山)의 바람이 조양봉(朝陽峰)의 벼랑 끝을 깎아내리듯 몰아치고 있었다. 회색빛 바위 면마다 엉겨 붙은 눈발은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서 마치 허연 짐승의 뼈마디처럼 기괴한 형상을 띠고 번뜩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멎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팽팽한 살기가 능선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월소연이 낮게 숨을 뱉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 — 금빛으로 이슬처럼 빛나는 이름칼의 검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하얀 뺨 위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거칠게 부딪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조양봉 정상의 거대한 평원,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일단의 무리였다.
화산의 상징인 만렙의 매화나무들은 이미 혹한 속에서 꽃잎을 잃고 비틀린 흑갈색 가지들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지들 사이로 수십 명의 무인들이 허리에 검을 찬 채, 철옹성 같은 진법을 이루며 서 있었다. 화산파의 비전(秘傳) 검진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절기.
매화검진(梅花劍陣).
진법의 최전방을 가로막고 선 이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검푸른 제복 위에 철갑을 덧댄 무림맹 집법당(執法堂)의 정예들이었다. 화산의 기와장 위에 무림맹의 깃발이 펄럭이는 광경은, 이 강호의 질서가 이미 어떻게 뒤틀려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흉측한 상처와도 같았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무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의 삿갓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채 창백했고, 이마의 흉터는 붉은 달빛을 받아 마치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기괴하게 도드라졌다. 허리에 찬 검집에서는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불길한 기운, 흑천월식검의 잔류 파문이 미세한 파동을 그리며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진법의 중앙에서 한 무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얼굴 전체를 철면(鐵面)으로 가린 채, 손에는 묵직한 강철 대검을 쥔 사나이. 무림맹 집법대주, 철면 은사(隱士)였다.
“서무현.”
철면의 목소리는 철판이 긁히는 듯 둔탁하고 차갑게 울렸다.
“네놈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흑월문의 잔당으로 전락해 강호를 뒤흔들던 광견(狂犬)이, 제 발로 무림맹의 성지나 다름없는 화산의 꼭대기에 기어오르다니. 그것도 스스로의 무덤을 파러 말이다.”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발걸음을 한 걸음 옮겼을 뿐이다. 그 단조로운 움직임 하나에 조양봉의 공기가 수십 겹으로 짓눌렸다.
‘기억이…… 또 지워진다.’
어금니를 악물자 잇몸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흑천월식검의 힘을 쓸수록 머릿속 한구석이 텅 빈 무덤처럼 허전해지는 감각. 십 년 전 청월장의 붉은 화염 속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스승의 얼굴이, 이제는 모래성처럼 바스러져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눈앞의 이 썩어빠진 강호의 구조를 부수고 내 이름을 되찾는다는 집념뿐이었다.
“오라버니, 저들은 단순한 화산의 제자가 아니야. 이미 껍데기뿐이야.”
소연이 낮게 경고하며 옆으로 미끄러지듯 나섰다. 그녀의 말대로 매화검진을 펼치고 있는 화산의 고수들은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그들의 피부는 팽팽하게 당겨져 마치 가면을 쓴 듯 매끄러웠고, 숨을 쉴 때마다 입김 대신 잿빛 먼지가 흩날렸다. 이름을 먹힌 자들. 무명병(無名病)에 걸려 자아를 상실한 채 흑월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허스키한 인형들에 불과했다.
“죽여서는 안 된다, 소연아.”
소한이 무현의 등 뒤에서 칠흑 대검을 땅에 꽂으며 낮게 말했다. 그의 한쪽 팔뚝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려 눈 쌓인 바위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절명협을 돌파하며 입은 상처가 깊었다.
“저들은 우리와 똑같은 피해자들일 뿐이야. 십 년 전의 그날 밤, 우리처럼…… 달의 계약에 목을 잡힌 채 영혼을 저당 잡힌 불쌍한 망령들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저들을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무현이 검병을 움켜쥐었다.
슈우우우—!
검신을 감싼 칠흑의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나갔다. 빛을 집어삼키는 중력장이 주변의 눈가루를 사방으로 빨아들였다가 단숨에 사방으로 튕겨냈다.
“가자.”
무현의 몸이 한 줄기 검은 잔상으로 변했다.
쾅—!
조양봉의 대지가 진동했다. 무현의 검이 매화검진의 최전방을 강타하는 순간, 수십 개의 검광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허공을 벌집처럼 찢어 놓았다. 화산의 비전인 ‘만화일검(萬花一劍)’의 진수.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강호의 정통 무학으로 군림해온 검진은 과연 매섭고도 화려했다. 검끝마다 매화 꽃잎 대신 날카로운 검기가 백색의 폭풍처럼 흩날리며 무현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 검기들은 무현의 흑천월식검에 닿는 순간 속절없이 부서져 내렸다. 빛을 거부하는 중력장이 검광을 삼켰고, 무현의 검세는 허공을 가르며 진법의 허리를 단번에 두동강 냈다.
“크윽……!”
화산의 장로급 고수들이 피를 토하며 나자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붉은 선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책장이 썩어 문드러진 듯한 검은 모래와 핏물의 혼합물이었다. 이름을 잃은 자들의 최후는 참혹했다. 그들은 쓰러지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으로 밤하늘의 붉은 달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설픈 검놀음이군.”
철면 은사가 그 광경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강철 대검 — 철벽검(鐵壁劍)이 허공을 가르자, 공기 중에 미세한 금속성 파문이 일어났다.
휭—!
철면이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음에도, 그가 내뿜는 내공의 압박만으로도 무현의 발밑에 깔린 바위들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무림맹 집법당의 최고수다운 무위였다.
“서무현, 네놈이 쓰는 그 흑천월식검은 본래 강호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흑월문주 혁련오 그 자가 미쳐서 풀어놓은 재앙의 씨앗이지. 네가 그것을 휘두를 때마다, 이 땅의 이름들은 더욱 빠르게 달의 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다면 네놈은 어째서 그 달의 밑에서 주인의 멍에를 메고 있는 거지?”
무현이 냉소하며 검을 겨눴다.
“무림맹주 남궁청. 그 자가 꾸미는 일이 무엇인지 모를 줄 알았나? 강호를 구하겠다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실상은 열두 개의 장부를 모아 스스로 새로운 흑월의 주인이 되려는 속셈이겠지.”
철면의 철면구 아래서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주인? 훗, 무식한 검객 같으니. 강호의 질서는 원래부터 비어 있는 자리다. 맹주님께서는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하시는 것뿐이야. 그리고……”
철면의 시선이 무현의 품속을 향했다.
“그 증거가 바로 네 품에 있지.”
“……!”
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면의 몸이 벼락처럼 비등했다.
쾅-! 쿠웅-!
철벽검이 무현의 흑천월식검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내공이 충돌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조양봉 정상의 앙상한 매화나무들을 일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두 사나이가 서로의 검을 맞댄 채 팽팽하게 대치했다. 철면의 팔뚝에 핏줄이 곤두서며 거대한 강기(罡氣)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윽……!”
무현의 무릎이 살짝 꺾였다. 최근 무명병으로 인해 체내의 내력이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 흑천월식검의 위력은 여전히 맹렬했으나, 그 대가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져 가는 고통은 육신의 상처보다 훨씬 컸다.
‘지금이다…… 월식(月蝕)을 써서 저놈을 베어버려야 해.’
무현의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며, 검신에 흐르던 칠흑의 빛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흑천월식검의 마지막 초식,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월식(月蝕)’의 문이 열리려던 그 찰나.
“오라버니, 안 돼!”
월소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슈우우웅—!
소연이 휘두른 명인의 금빛 검광이 무현과 철면의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며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콰아아앙!
충격에 밀려 무현이 뒤로 세 걸음 주춤거렸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왈칵 쏟아졌다. 월식을 쓰려던 무공의 반작용으로 인해 뇌리가 깨어지는 듯한 격통이 덮쳐왔다.
“소연아, 비켜라……! 저놈을 베지 않으면 우리가 먹힌다.”
“안 돼, 오라버니! 저 초식을 쓰면…… 오라버니의 이름은 영영 돌아오지 않아! 더 이상 기억을 잃지 마, 제발……!”
소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붉은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졌다. 그녀의 떨리는 손에서 명인이 눈부신 금빛을 발하며 무현의 흔들리는 자아를 가까스로 붙잡아주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철면은 검을 거두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의 철면구 위로 비치는 눈빛은 차가우면서도 묘한 여유를 품고 있었다.
“과연. 흑월문의 금기 무공을 완성한 자답군. 하지만 서무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철면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텅 소리와 함께 조양봉의 눈밭 위에 내동댕이쳐진 것은 낡은 가죽으로 엮인 거대한 장부였다. 표면에는 금니로 얽힌 흉측한 초승달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잿빛 기운은 사방의 공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소한이 칠흑 대검을 겨눈 채 낮게 물었다.
철면이 차갑게 비웃었다.
“화산파 장문인의 영혼을 담보로 회수한 첫 번째 장부다. 그리고……”
철면의 시선이 무현의 품속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네놈들이 지키려 애쓰는 나머지 장부들 역시, 이미 우리 맹주님의 손에 들어가거나 혹은 이곳으로 스스로 찾아오고 있지.”
“무슨 개소리를……”
“잘 들어라, 검객.”
철면의 목소리가 조양봉의 칼바람을 뚫고 선언처럼 내리꽂혔다.
“너희들은 착각하고 있다. 맹주님께서는 달을 원하시는 게 아니다.”
“……뭐라고?”
“달이 맹주님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십 년 전 청월장에 불을 지른 것은 우리가 아니야. 그날 밤, 그 장원을 태우기로 계약한 진짜 채권자는…… 바로 이 강호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자다.”
철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다.
푸드득—!
조양봉 상공을 뒤덮고 있던 붉은 달빛 속에서 수많은 검은 까마귀 떼가 울부짖으며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무현의 품속 — 십 년 동안 가슴 깊이 품고 있던 낡은 옥패와 찢어진 한 조각의 종이 쪼가리가 스스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욱—!
무현의 품에서 터져 나온 금빛과 칠흑빛의 기운이 뒤엉키며, 눈밭 위에 내동댕이쳐졌던 첫 번째 장부가 스스로 펼쳐졌다. 장부의 누런 페이지 위로 한 줄기 핏빛 글자가 스스로 떠올랐다.
[ 제1대 계약자: 서문 월청 (西門 月淸) ]
청월장 장주이자, 무현의 양부였던 이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의 자리에, 붉은 피로 쓰인 새로운 문장이 천천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열두 번째 채무자의 마지막 이름이 여기에 기록된다. ]
“……아.”
무현의 숨이 멎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순간, 십 년 전 그 불타는 장원 속에서 자신에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비로소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계약을 맺었던 자.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 날의 자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