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수배
잿빛 비가 내리는 강호의 밤은 깊고도 무겁다. 밤안개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운무루 객잔의 낡은 처마 끝을 휘감고 돌았다.
비린내가 났다. 철의 냄새이자, 가라앉지 않는 피의 냄새였다.
"서무현, 그 목의 현상금이 삼백 냥이라더군."
객잔의 부서진 문짝 너머로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녹슨 장도(長刀)를 질질 끄는 낭인 무리였다. 무림맹이 강호 전역에 뿌린 수배령. 십 년 전 청월장을 태운 불길의 주인이자, 흑월문의 금기인 '흑천월식검'을 익힌 죄인. 그 대가로 그의 목에는 엄청난 은전이 걸렸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목에 걸린 진짜 대가가 무엇인지.
무현의 시선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무명병의 증세였다.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쥐고 있는 검의 이름이 무엇인지, 간헐적으로 기억의 조각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오라버니.’
귓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쳤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다만 제 품에 안긴 작은 체온만이 그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현 오라버니, 저쪽이에요."
월소연이었다.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아 흑월의 살수로 길러졌으나, 지금은 그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혈육이자 동반자. 소연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이름칼이 밤안개를 갈라내며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챙—!
낭인 하나가 먼저 참격을 날렸다. 무식하게 힘만 실린 엉성한 도법. 무현이 반응하려 했으나, 오른팔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이름과 체온을 앗아가는 흑천월식검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소연의 검이 궤도를 그렸다.
스으읍, 툭.
금빛 궤적이 허공에 남으며 낭인의 도가 두 쪽으로 박살 났다. 소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거의 흑월 살수로서의 냉혹함과, 오라버니를 지키겠다는 집념이 엉켜 만들어낸 살기였다.
"비키세요."
소연이 낮게 읊조리며 비수를 뿌렸다. 영인비수진의 파편 같은 투척술이 낭인들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진흙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도망친다! 쫓아라!"
"잡아라! 무림맹에 넘기면 부귀영화가 보장된다!"
뒤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안개 낀 숲길로 몸을 던졌다. 빗방울이 삿갓을 두드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무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눈앞이 붉고 검은 암전으로 물들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개방(丐幫)의 분타로 지정된 낡은 폐사찰은 비를 피하기에 적당했다. 불상마저 목이 잘려나간 불결한 공간, 그 한켠에서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여깁니다. 더 이상 추격은 따돌렸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찰의 기둥에 기대어 있던 거친 체격의 남자였다.
얼굴 반쪽을 가린 붉은 가면, 그리고 그 곁에 비스듬히 세워진 거대하고 무식한 칠흑 대검. 월소한이었다.
소한은 무현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십 년 전, 흑월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청월장에 횃불을 던졌던 진짜 방화범. 그 죄책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미쳐버릴 듯한 광기를 품고 살아온 남자.
"형님……."
소한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는 무현이 자신을 향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원망? 아니, 원망조차 사치였다. 무현은 그저 흐릿해진 눈으로 소한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한."
무현의 입술이 바짝 말라 갈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악의도, 분노도 없었다. 다만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린 자의 공허함만이 묻어났다.
"네가…… 여기에 왜."
"형님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리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소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거칠게 던졌다.
덜컥.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낡고 두꺼운 가죽 장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면에는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기괴한 문자들로 가득했다.
소연이 경계 어린 눈으로 장부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게 뭐죠?"
소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피묻은 손으로 가죽 표면을 쓸어내렸다.
"대모(大母)의 마지막 유품이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직전, 내게 남긴 유언이기도 하지."
대모 월하. 남매의 생모이자 흑월의 진짜 채권자였으나, 결국 계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인간으로 돌아와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던 여인. 그녀가 남긴 유품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검은 달…… 그 계약의 실체가 바로 이 장부다."
소한의 말에 사찰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닥불의 탁탁 타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검은 달은 애초에 하나가 아니었어. 십 년 전, 장원이 불타던 그날 밤. 달은 깨졌다. 아니, 쪼개졌지."
소한이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페이지마다 금빛 글씨와 검은 먹물이 뒤섞여 있었다.
"흑월문이 쥐고 있던 계약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검은 달은 총 열두 개의 '이름 장부'로 쪼개져 강호 각지의 세력들에게 분산되어 흩어졌다. 무림맹주 남궁청이 혈안이 되어 우리를 쫓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남궁청이 왜?"
무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설원 무녀 '설야'의 흐릿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자는 장부를 모으고 있어. 열두 권의 장부를 모두 모으는 자는 검은 달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니까. 강호의 모든 이들의 '이름'과 '기억'을 손에 쥐고,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소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는 그걸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 장부는 이미 강호의 가장 깊은 곳들로 흘러들어 가 버렸으니까."
소연은 가만히 손에 쥐고 있던 명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품고 있던 작은 조각 역시 그 열두 권 중 하나의 파편이었던 것이다.
"그럼…… 첫 번째 장부는 어디에 있죠?"
소한이 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가면 너머로 비장한 광기가 빛났다.
"화산(華山)."
"화산파?"
"그렇다. 정마대전 이후 명문정파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화산파. 그곳의 장문인이 이미 검은 달과 첫 번째 계약을 맺었다."
소한이 말을 이었다.
"그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니, 어쩌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장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지."
무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삿갓 아래의 화상 흉터가 욱신거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장문인이…… 무엇을 잃었다는 거지?"
소한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자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 몸뚱이만 남은 채, 화산의 최고봉에서 달을 기다리는 허깨비가 되었지. 우리가 찾아야 할 첫 번째 장부가 바로 그자의 품에 있다."
비가 더욱 거세졌다. 사찰의 지붕을 뚫을 듯 내리치는 빗소리 속에서,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림맹의 수배령은 이미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들을 잡기 위한 복면대와 고수들이 화산으로 향하는 길목을 에워싸고 있을 터였다. 도망칠 곳은 없다. 남은 것은 오직 앞으로 나아가 검은 달의 심장을 부수거나, 혹은 자신들의 이름마저 완전히 먹히는 것뿐이었다.
무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허리에 찬 검에서 미세한 흑빛 파동이 일렁였다.
"화산으로 간다."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그 말과 동시에, 무현의 시야가 새하얗게 지워지며 자신이 십 년 전 객잔에 홀로 앉아 있던 기억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달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부를 향한 발걸음이, 비 내리는 강호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찰의 묵은 먼지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무덤 같은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화산(華山).
천하의 명산이자, 검의 진수를 논하는 정파의 최고 보루. 그곳의 장문인이 이미 이름을 잃고 검은 달의 허깨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문 이상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정마대전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매화검법의 본산이 어찌하여 흑월의 장부를 품게 되었단 말인가.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면…… 현 공(公) 명의 대종사(大宗師)가 아니더냐."
소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녀 역시 흑월의 살수로 자라며 강호의 굵직한 세력들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명의 대종사는 수십 년간 칼을 잡지 않고 도학(道學)에만 매진하여 강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계약을 맺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소한이 붉은 가면을 벗어 젖히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십 년 전 화마의 흔적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존경받는 고결한 선비일수록,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면 더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그 영감탱이가 무엇을 탐했는지, 혹은 무엇을 되살리려 했는지는 화산에 올라가 보면 알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소한이 칠흑 대검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었다.
"지금 화산으로 가는 길은 무림맹의 주력이 직접 틀어쥐고 있다. 맹주 남궁청은 우리가 장부를 찾아 움직일 것을 이미 알고 함정을 파두었어. 철면이 이끄는 집법당이 화산으로 향하는 모든 초소와 나루터를 봉쇄했다."
"봉쇄라……."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명병'의 한기가 다시금 척추를 타고 올랐다.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을 쥐어야 할 손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비되는 증세. 흑천월식검의 힘을 끌어다 쓸수록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억과 감정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만약 화산에 도착해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이름마저 완전히 달의 먹이로 바뀔지도 모른다.
‘오라버니…….’
또다시 소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니, 그것은 소연이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머릿속 깊은 곳, 태초의 기억 속에서 들려오는 어머니 설야의 음성이거나 혹은 무현 스스로가 잊어버린 본명(本名)의 잔재였다.
무현은 이를 악물었다. 화상 흉터가 욱신거리며 통증을 선사하자 오히려 흐릿했던 정신이 번뜩였다.
"피할 수 없다면 뚫어야 한다."
무현의 말에 소한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올라갔다.
"그래, 형님답군. 십 년 전 그 밤에도 형님은 늘 그렇게 앞장섰었지……."
과거의 회한이 섞인 소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세 사람은 폐사찰을 나섰다. 빗줄기는 여전히 사납게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산으로 향하는 옛 관도(官道).
강호의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산등성이 아래, 안개가 장막처럼 펼쳐진 협곡이 나타났다. 이곳은 속칭 '절명협(絶命峽)'이라 불리는 곳으로, 화산파의 영지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유일한 척후로였다.
과연 소한의 말대로 평온할 리 없었다.
협곡의 어귀, 거대한 바위 위에 복면을 쓴 무림맹 집법당의 정예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강철 사슬과 서슬 퍼런 제복도(製服刀)가 들려 있었고, 그 선두에는 칠흑 같은 철면(鐵面)을 뒤집어쓴 고위 고수가 가로막아 서 있었다.
철면 집법대주, 은사.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림맹의 집행자였다.
"서무현. 네놈이 이곳을 지나리라는 것은 맹주님께서 이미 예견하신 바다."
은사의 목소리는 철판을 긁는 것처럼 찢어지고 불길했다. 그의 등 뒤로 수십 명의 복면대원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장부를 품고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 목과 장부를 내려놓고 무림맹의 처분을 기다려라. 그리하면 최소한 고통 없이 자비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줄 테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협곡 전체에 살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낭떠러지와 복면대 사이의 좁은 길목.
무현은 천천히 삿갓을 치켜올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살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붉은 낙인처럼, 흑천월식검의 검신에서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린내 나는 빗방울이 무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이름을 찾아야 한다."
무현이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는 혼잣말이었다.
"그 장부가 어디에 있든, 내 기억을 갉아먹는 그 달의 새끼줄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면…… 화산의 정상이라도 베어버릴 것이다."
콰아아앙—!
무현의 발이 땅을 박차자마자, 협곡의 바위들이 짓눌리며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빛을 지우는 참격, 흑천월식검의 초식이 비 오는 협곡의 밤하늘을 일그러뜨렸다.
소연이 금빛 이름칼을 휘두르며 측면의 복면대를 파고들었고, 소한의 칠흑 대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며 진형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핏방울이 어둠 속에서 붉은 꽃처럼 피어올랐다.
혈전(血戰)이었다.
비바람과 비명, 그리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파열음이 협곡을 메웠다. 무현의 흑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무림맹의 정예들이 묵사발이 되어 나자빠졌지만, 그 대가로 무현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고 머릿속의 기억들은 한 조각씩 더 하얗게 지워져 갔다.
얼마나 베고 달렸을까.
집법당의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협곡의 끝, 구름 위로 솟아오른 화산의 거대한 암벽이 그들 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우뚝 솟은 화산의 제1봉, '조양봉(朝陽峰)'.
그 정상을 향해 뻗어 있는 천국의 계단 끝에는, 안개에 가려진 거대한 도관(道觀) 하나가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관의 문 앞.
빗속을 뚫고 서 있는 한 노인의 형상이 보였다.
화산파의 장문인, 명의 대종사.
하지만 그는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그의 등 뒤로는 칠흑 같은 검은 달의 기운이 흉측한 실뿌리처럼 얽혀 온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오직 매끄러운 살갗만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릴 뿐이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상실하고, 검은 달의 첫 번째 장부를 지키는 지독한 허깨비가 된 자.
노인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기괴한 음성이 무현의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왔느냐, 열두 번째 채무자여. 네놈의 이름 역시 이곳에 기록될 시간이다.—
무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무거워졌다.
화산의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그 순간, 무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장부는 단순히 과거의 진실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흑월의 채권자가 강호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한 영혼의 무덤이라는 것을.
달이 완전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첫 번째 장부를 향한 발걸음이, 이제 마지막 벼랑 끝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