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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31화목차

제31화 이름 없는 자

1

비는 그쳤으나, 진흙탕은 마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한 산길은 십 년 전 그날 밤을 닮아 있었다. 발소리가 먹먹하게 묻히는 진흙 위에 낡은 삿갓을 쓴 남자의 발자국이 찍혔다.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기억도, 지난날의 온기조차도.

서무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품 안에는 칠흑 같은 검집 하나가 덜렁거렸고, 뇌리에는 그저 흐릿한 잉크 자국 같은 형체만 둥둥 떠다녔다. 붉은 달이 떴던 밤, 모든 것을 태우고 검은 낙인처럼 남은 화상 흉터가 목덜미를 타고 턱밑까지 뻗어 있었다. 그것은 살과 뼈에 새겨진 문양이자, 세상에서 지워진 자의 낙인이었다.

"……."

무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길가에 쓰러진 늙은 사내가 눈을 치켜뜬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졌고, 고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내…… 내 이름이…… 뭐였더라."

사내가 무현의 바자락을 움켜쥐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가락이었다.

"내 이름을…… 돌려다오. 빚을 갚았잖아…… 전부 바쳤다고……."

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이 메말라버린 눈동자는 흑백으로 칠해진 수묵화처럼 깊고 차가웠다. 그는 사내의 손을 뿌리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다만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구지."

"……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내는 멍한 얼굴로 무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아. 내 아내의 얼굴도, 내 아이의 웃음소리도…… 다 지워졌어. 검은 달이…… 가져갔어. 그놈들이 내 이름을 가져갔단 말이다……!"

비명 같은 절규가 안개 낀 산길에 흩어졌다.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잃은 자였다. 타인이 불러주지 않으면 존재조차 증명할 수 없는 빈껍데기. 바람이 불면 흩어질 잿가루 같은 생명이 강호 전역을 떠돌고 있었다.

지나온 길목마다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병(病)이 아니었다. 상처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명병(無名病)'이라 불렸다.

검은 달의 계약이 흑월문이라는 거대한 요새가 무너짐과 동시에 해제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십 년간 묶여 있던 거대한 장부가 강호라는 거대한 호수에 잉크처럼 풀려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장부에 적힌 수많은 빚쟁이들, 흑월의 그늘 아래서 목숨을 부지하며 이름을 저당 잡혔던 자들의 자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삿갓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위로 차가운 이슬이 맺혔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걸었다. 걷다 보면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고도 희미한 본능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2

며칠 뒤, 또 다른 길목.

먼지 폴폴 날리는 황톳길을 걷는 한 소녀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월소연.

흑월문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 그녀의 손에는 낡은 검 한 자루와, 닳고 닳아 헤진 붉은 노리개가 들려 있었다.

소연의 얼굴은 반년 전보다 훨씬 핼쑥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은 촛불처럼 매섭고 단단했다. 흑월문주 혁련오의 목을 베고, 대모 월하가 잿더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그녀였다. 강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두려운 곳이 아니었다.

소연은 길가 주막의 늙은 주인이 남긴 말들을 떠올렸다.

“서쪽으로 갔어.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칠흑 같은 검을 멘 젊은 놈이야. 말수가 없고…… 눈빛이 사람 속을 텅 비워버리는 것 같았지.”

“정신이 나간 사람 같기도 했고,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한 도사 같기도 했고…….”

소연은 입술을 깰물었다.

피 흘리며 떠난 오라비. 모든 기억과 이름을 버린 채 강호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

"내가 찾아낼 거야."

소연은 중얼거리며 주머니 속의 금빛 명인(名刃) 조각을 매만졌다. 흑월의 문양이 새겨진 그 조각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름 없는 자들의 원한과 흩어진 빚의 파편들이 그녀의 예민한 감각에 걸려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당신이 나를 살렸듯이, 이번엔 내가 당신을 기억해 줄게."

소연은 바람을 가르며 서쪽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흑백의 잔상이 짙게 끌렸다.

3

강호의 중심, 중원과 북방의 경계에 위치한 객잔 '운무루(雲霧樓)'.

낡은 목재 간판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밤이면 어김없이 장객들의 발길이 끊기는 이 적막한 객잔은, 최근 들어 기묘한 소문으로 유명해졌다.

"거기 들었나? 남경에서부터 북해까지, 무림맹의 고수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고 하더군."

"무림맹이? 정파의 수호자들이 어째서?"

"정파라니 웃기는 소리! 그들이 찾는 건 따로 있어. 흑월문이 남긴 '장부'라더군. 십 년 전 검은 달과 계약을 맺었던 자들의 명단이 적힌 그 장부 말이야!"

구석 테이블에 앉은 객상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수군거렸다.

"흑월문은 무너졌잖아? 문주도 죽고, 본단도 불탔는데 무슨 장부가 남아 있다는 거야?"

"등신아, 꼬리가 잘려도 몸통은 남는 법이지. 흑월문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던 진짜 주인이 누구겠어? 무림맹이야! 그들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 검은 달의 계약을 가로채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던 삿갓 쓴 남자가 술잔을 기울였다.

서무현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탁자 위에 놓인 빈 술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술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기만 했다. 화상 흉터가 비친 물결이 일렁였다.

그때였다.

끼익-

객잔의 낡은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빗방울과 함께 밀려든 것은 차가운 살기였다.

탁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자들은 총 열 명. 하나같이 얼굴을 시커먼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고, 품에는 번뜩이는 도검을 품에 안고 있었다.

객잔 주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왔다.

"어, 어르신들…… 오늘은 이미 영업이 끝났는데요……."

복면대 중 선두에 선 사내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툭.

주인의 목이 잘려 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순식간에 튀어 오른 핏물이 낡은 천장에 붉은 점을 찍었을 뿐이다. 주인의 시신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객잔 안은 비명 대신 지독한 침묵에 잠겼다.

"이곳이다."

복면대의 우두머리가 낮고 쉰 목소리로 뱉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구석 테이블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던 무현이었다.

무현은 여전히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고 있었다.

"서무현."

우두머리가 칼을 뽑아 들었다. 칠흑 같은 도신 위로 붉은 달빛 대신 객잔의 희미한 등불빛이 번들거렸다.

"맹주님의 명이다. 네가 가진 그 껍데기를 반납해라."

4

1화의 객잔.

비가 내리고, 낡은 문이 열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칼을 뽑아 들던 그날 밤의 풍경이 거울처럼 겹쳐졌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날의 소년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스륵.

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마른 체구. 삿갓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의 화상 흉터가 붉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말이 많군."

무현의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그 속에는 어떠한 감정의 파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돌을 던진 것조차 메아리가 울리지 않는 듯한 공허함.

복면대의 우두머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독한 놈. 기억을 다 잃고도 그 검기는 여전하구나. 하지만 명심해라. 네가 삼킨 그 검은 달의 힘은 원래부터 우리 맹주님의 것이었다!"

"……."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찬 검집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콰아아아앙-

순간, 객잔 내부의 공기가 한순간에 무거워졌다.

빛이 삼켜졌다.

객잔을 밝히던 등불의 불꽃이 일제히 사그라들며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밤의 어둠이 아니었다. 중력 자체를 비틀어 빛마저 가두어버리는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잔재였다.

복면대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이, 이 자가……! 도망칠 틈을 주지 마라! 베어라!"

열 명의 고수들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들고 무현을 향해 쇄도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광이 어둠 속에서 십자 모양의 핏빛 궤적을 그리며 좁혀 들어왔다. 살기가 객잔의 목조 벽을 갈라놓고, 바닥의 널판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였을 뿐이다.

치익-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뽑는 동작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한 템포 멈춘 것 같기도 했고, 지나치게 빨라 눈에 담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초승달 모양의 칠흑빛 참격이 객잔의 공간을 가로질렀다.

콰창-창-!

열 명의 고수들이 그리던 검광이 단 한 번의 참격에 박살 났다. 그들의 몸이 정지했다. 허공에 떠 있던 빗방울마저 멈춰 선 것처럼 고요해진 순간, 복면대원들의 가슴팍에서 일제히 붉은 선이 그어졌다.

툭, 투두둑.

열구의 시신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칠흑 같은 검은, 다시 무현의 검집 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무현은 숨결 하나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쓰러진 우두머리의 시신 옆을 지나쳐 문가로 향했다.

5

문밖으로 나가려던 무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우두머리의 품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피범벅이 된 복면대 우두머리의 품 안에서 굴러 나온 것은 칠흑 같은 흑월의 문양이 새겨진 패와, 그 옆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또 다른 문양이었다.

비룡이 구름을 휘감고 있는 모양새.

무림맹(武林盟).

정파의 총본산이자, 강호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그들의 상징이 흑월문의 문양과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무현은 멍한 눈으로 그 패를 내려다보았다.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십 년 전, 장원을 태웠던 횃불의 냄새와, 그 불길 속에서 들리던 목소리들.

흑월문이 무너졌음에도 그 잔해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

채권자는 죽었으나, 빚을 거두어들이는 손은 바뀌었을 뿐이다.

"……."

무현은 패를 주워 들지 않았다. 다만 그 상징을 눈에 담은 채, 다시 어두운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강호의 밤은 깊어만 갔다.

머나먼 곳에서, 또 다른 검을 쥔 소녀가 그의 흔적을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6

객잔의 잔해 속, 스러져가는 등불 아래로 복면대의 시신들이 뒹굴었다.

그중 우두머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졌어야 마땅했으나, 품속에 숨겨둔 작은 비급 한 권이 그의 마지막 숨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장부의 파편이었다.

‘……맹주님께…… 알려야 한다…….’

사내는 피를 토하며 품에서 얇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어 쥐었다.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아랫줄, 아직 지워지지 않은 마지막 이름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서무현 ]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

검은 달은 진 적이 없었다. 다만 낮의 태양 뒤로 숨어, 더 거대한 어둠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객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림맹의 본대로부터 파견된 증원군이었다.

강호 전체가 거대한 장부의 감옥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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