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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29화목차

제29화 흑월곡

비는 그쳤으나 산길은 축축했다.

흑월곡으로 향하는 협곡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혀 있어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는 진흙 대신 굳어버린 핏자국이 엉켜 있었고, 음산한 풍문 속에서만 떠돌던 흑월문의 본거지가 비명을 지르듯 무거운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무현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품속에서 소연이 남기고 간 피 묻은 옥패가 은은하게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옥패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은 저주처럼 번져오는 기억의 공백을 간신히 메워주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검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명인(名刃)이 들려 있었다. 열다섯 해 전 장원이 불탈 때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듯, 소연의 눈동자에는 서늘한 살기와 함께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멈추지 마라."

무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의 손에 쥔 검은 칼자루는 이미 그의 체온을 잃은 지 오래였다.

"저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협곡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듯, 그들은 흑월곡의 심장부로 스며들었다.

흑월곡의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석벽에 매달린 횃불은 붉은빛 대신 탁하고 푸르스름한 인화(燐火)의 색을 띠고 있었다. 제단으로 향하는 넓은 광장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

숨소리도, 눈동자의 움직임도 없었다. 피부는 잿빛으로 말라비틀어졌고, 옷자락은 바스러질 듯 낡아 있었다. 흑월의 계약에 이름을 바친 이들, 즉 무명병(無名病)에 걸려 자아와 기억을 통째로 압수당한 채 껍데기만 남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다 우리가 알던 사람들이야?"

소연이 숨을 들이켰다. 제단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의 얼굴을 스치듯 본 그녀의 입이 잘게 떨렸다. 십 년 전 청월장에서 종적을 감췄던 무사들, 장주의 호위무사였던 이들, 그리고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과거의 동문들이 그곳에 인형처럼 박혀 있었다.

"아니다. 그들은 이미 지워졌다."

무현이 차갑게 일갈했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진 존재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약의 장부가 거둔 '이자의 찌꺼기'에 불과했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흑요석 제단이 치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하늘을 가리키는 거대한 철제 쇠사슬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계단 아래, 낯익은 등성이가 엎드려 있었다.

붉은 가면을 벗은 월소한은 더 이상 맹목적인 복수심에 찬 살수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짓눌린 듯 축 처져 있었고, 손에 쥐었던 칠흑 대검은 제멋대로 내던져져 있었다.

"소한 오라버니!"

소연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무현이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며 제지했다.

"기다려라. 아직 함정이 있다."

그 순간, 제단의 꼭대기에서 차갑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두가 제자리에 모이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이는 장주 서문 월청의 아내이자, 남매의 생모인 대모 월하(月下)였다. 그녀의 얼굴은 예의 그 오만한 흑월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기괴한 계약에 시달려 껍데기만 남은 마녀의 형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월하의 시선이 무현을 향했다.

"서무현. 아니, 설원 무녀의 사생아.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네놈의 이름을 채우기 위해 십 년 전 그 장원에 불을 지르고, 옥패를 쪼개어 강호에 뿌렸지."

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 이름…'

십 년 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계약의 담보였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쳤다.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월소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소연과 무현을 향했다. 소한은 말없이 손을 들어, 십 년 전 장원의 아이들만이 알던 은밀한 수신호를 그렸다. '도망쳐라. 저 달이 넘어가기 전에.'

소한의 손짓은 명백한 경고이자 위장 신호였다. 대모의 감시를 피해 남매에게 탈출을 종용하는 마지막 속죄의 몸짓이었다.

"오라버니, 저 짓을…"

소연이 이를 악물었다. 소한의 온몸은 이미 흑월의 계약력에 잠식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늦었다, 소한아."

월하가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콰두두둑—!

제단 주변에 박혀 있던 칠흑의 쇠사슬들이 일제히 살아 움직이며 소한의 팔다리를 칭칭 감아올렸다. 소한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삼키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네가 아무리 신호를 보낸들, 이 흑월곡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다. 계약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부는 채워져야 한다."

월하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기운이 흑월곡의 상공으로 치솟았다.

우당탕탕—!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협곡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떠돌던 구름이 순식간에 걷히고, 그 자리에 드러난 달은 이미 반쪽이 갉아먹힌 채 창백하고도 기괴한 핏빛 은색을 띠고 있었다.

개기월식(月蝕).

빛을 삼키는 달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보아라." 월하의 목소리가 협곡을 메웠다. "검은 달이 뜰 때, 빚을 진 자는 이름을 토해내고, 빚을 준 자는 그 영혼을 거두어간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계약의 마침표가 찍힐 것이다."

하늘의 달이 완전히 검게 물들어가는 순간, 흑월곡 전체의 인화(燐火)가 푸른빛에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빛이 사라진 공간에는 오직 중력장 같은 압박감만이 남았다.

무현은 흑천월식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의 초승달 참격이 바닥을 가르며 월하를 향해 나아갔다.

"방해하지 마라!"

무현의 일도가 월하의 앞을 가로막은 철제 쇠사슬을 두부 자르듯 베어냈다. 그러나 월하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서무현, 네 검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제물의 운명은 바꿀 수 없다."

"무슨 소리……."

무현의 고개가 훉어지듯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흑월의 쇠사슬이 어느새 소한을 넘어 소연의 발목을 칭칭 감아 옥죄고 있었다.

"소연아!"

무현이 경악하며 검을 내던지듯 달려갔지만, 사슬은 이미 빛의 속도로 수축하고 있었다. 소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제단의 중앙, 검은 달의 그림자가 가장 진하게 드리워진 곳으로 끌려갔다.

소연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무현을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오라버니, 기억해줘.

쾅—!

하늘의 검은 달이 완전히 닫히며, 세상의 모든 빛이 꺼졌다.

흑월곡의 한가운데, 계약의 마지막 제물로서 소연의 이름이 거대한 장부 위에 낙인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제단의 흑요석 바닥이 수천 조각의 거울처럼 갈라지며 그 틈새로 칠흑 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빛을 잃은 세상은 오직 검은 달이 토해내는 기괴한 핏빛 여광(餘光)으로만 겨우 윤곽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연아—!"

서무현의 목소리가 협곡의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흑천월식검은 이미 통제를 잃은 중력장처럼 사방의 공기를 짓누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삿갓이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이마에 깊게 패인 화상 흉터 위로 핏줄이 곤두서며 붉은빛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와 투기(鬪氣)도 흑월곡의 거대한 계약진(契約陣) 앞에선 한 줌의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제단 중앙에 매달린 소연의 몸 위로 굵은 쇠사슬이 얽혀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쇠가 아니었다. 십 년 동안 흑월문이 강호의 고수들로부터 빼앗아 온 '이름'의 무게가 응축된, 영혼의 족쇄였다. 쇠사슬이 조여들 때마다 소연의 입술 사이로 은은한 금빛 가루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품고 살아온 자아의 파편이자, 청월장 마지막 후계자의 이름이었다.

"오라버니……."

소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오직 무현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품속에서 흘러나온 피 묻은 옥패가 바닥에 떨어져 두 쪽으로 갈라졌다. 옥패가 깨지는 소리는 마치 영혼의 단선(斷線)처럼 귓가를 찢었다.

"안 돼……."

무현의 다리가 바닥을 박찼다. 흑천월식검의 초식을 전개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는 온몸의 혈맥을 억지로 쥐어짜며 제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칠흑빛 참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쿠구구구궁—!

제단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석주들이 무현의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돌가루가 폭풍처럼 휘날리고, 대모 월하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 미친 놈……! 계약의 무게를 정면으로 받으려 하다니!"

월하는 두 손을 매듭지으며 제단의 중앙으로 마력(魔力)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등 뒤로 수십 명의 무명병 환자들이 일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껍데기만 남은 자들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닫혀 있던 무덤의 문이 열리는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콰아아아앙!

무현의 검격이 월하의 방어벽을 강타했다. 엄청난 충격파가 흑월곡 전체를 뒤흔들며 사방에 박혀 있던 인화(燐火)를 완전히 꺼버렸다. 이제 남은 빛은 오직 제단 꼭대기에 걸린 검은 달의 핏빛 테두리뿐이었다.

그 찰나의 어둠 속에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월소한이 움직였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 피투성이가 된 소한은 칠흑 대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재처럼 고요하고도 단호한 눈빛이었다.

"어머니."

소한의 목소리가 협곡의 바람 소리를 뚫고 울렸다.

제단의 의식에 집중하던 월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한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네놈의 그 허황된 속죄로 이 거대한 계약을 막을 수 있을 줄 아느냐!"

"막으려는 게 아닙니다."

소한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단의 계단을 올랐다. 흑월의 사슬이 그의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지만, 소한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허리에 20년 세월의 한을 담은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시작한 일입니다. 십 년 전, 그 횃불을 집어 들었던 내 손으로 끝내야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월하가 손을 휘두르자 핏빛 쇄도가 소한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소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제단의 중심 기둥, 즉 검은 달의 계약진을 지탱하는 거대한 '이름 장부'의 철판을 움켜쥐었다.

두두두두두—!

장부의 표면에 새겨진 수천 개의 금빛 글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월문이 강호로부터 빼앗아 온 모든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장부의 심장이었다.

"소한 오라버니!"

제단 위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정신을 차리던 소연이 비명을 질렀다. 소한은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십 년 전 청월장의 마당에서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다정한 오빠의 얼굴 그대로였다.

"소연아, 무현아.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웅장한 지진음과 함께 소한의 몸에서 찬란한 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흑월문의 칠흑 같은 기운을 거부하는, 청월장 고유의 순수한 내력이자 마지막 남은 생명력의 불꽃이었다. 소한의 손이 장부의 결속을 강제로 뜯어내며 중앙의 핵을 향해 내리꽂혔다.

"안 돼! 이 미친 자식, 당장 끌어내려라!"

월하가 비명을 지르며 사슬을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소한의 몸이 장부의 핵과 함께 폭발하듯 얽혀들며, 검은 달의 의식진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궁—!

흑월곡의 지면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사방으로 뻗어 있던 핏빛 사슬들이 차례로 끊어져 나갔다. 제단 위로 쏟아지던 압박감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진 그 틈을 타, 무현이 전신경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내 검을 받아라!"

무현의 흑천월식검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집어삼킬 듯 칠흑의 초승달 참격으로 변해 월하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파지직—!

월하의 몸이 반으로 쪼개지듯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고, 눈앞의 흑월곡이 무너져 내리는 풍경 속에서 월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크하하…… 결국…… 이 이름의 빚은 끝내 다 갚지 못하는구나……."

그녀의 몸이 잿더미로 바스러지며 사방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대모의 소멸과 동시에 흑월곡을 지배하던 기괴한 계약진의 힘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한의 희생으로 장부의 핵은 흔들렸으나, 이미 발동된 월식의 마력은 제단 중앙에 매달린 소연의 이름을 여전히 갉아먹고 있었다. 소연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금빛 가루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하늘의 검은 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소연아!"

무현이 제단의 계단을 뛰어올라 쇠사슬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쾅, 하고 쇠사슬이 끊어졌지만, 이미 소연의 눈동자 속 빛은 눈에 띄게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무현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며, 손을 뻗어 그의 화상 흉터가 남은 뺨을 어루만졌다.

"오라버니……."

소연의 목소리는 은사처럼 가늘고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내 이름이……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오라버니를 기억하고 있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무현의 목이 메어왔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소연의 뺨을 적셨다. 십 년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검객의 눈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핏빛 눈물이었다. "내가 너를 기억한다. 그러니 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의 검은 달이 마지막 수축을 마쳤다.

세상의 모든 빛이 완전히 암전된 그 순간, 흑월곡의 한가운데서 거대한 종소리 같은 여운이 울려 퍼졌다.

계약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무현은 품에 안긴 소연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타인이 기억하는 한 이름은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 그것이 이 지옥 같은 강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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