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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24화목차

제24화 문주의 마지막

잿더미가 비처럼 내렸다.

검은 달 아래에서 십 년의 세월 동안 영원할 것만 같았던 흑월문의 본단은, 단 한 밤의 참화 속에서 거대한 무덤처럼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타다 만 대들보는 고공에서 기괴한 뼈대처럼 꺾였고, 공기 중에는 피 냄새와 그을린 먹물의 아린 향이 엉겨 붙어 코를 찔렀다.

묵직한 돌덩이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 바닥을 질질 끌리는 무언가의 둔탁한 마찰음이 울렸다.

"크윽……!"

피비린내 밴 바닥을 기는 것은 흑월문의 문주, 혁련오였다. 그의 화려했던 검은 비단 도포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드러난 상반신은 끔찍한 화상과 붉은 핏멍으로 엉망이었다. 그의 목덜미와 허리춤에는 붉은 생명력을 머금은 채 꿈틀거리는 사슬, 대모 월하의 명부혈쇄가 잔해처럼 감겨 있었다.

대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업보는 혁련오의 육신을 옭아맨 채, 그를 잔해의 밑바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 참혹한 풍경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서무현이었다.

삿갓을 벗은 그의 얼굴 위로, 찢어진 구름 사이로 흘러나온 붉은 달빛이 스며들었다. 화상 흉터가 드리워진 뺨은 차가운 흑백의 음영 속에서 고요한 묵화(墨畵)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사형."

무현의 입술 사이로 낮고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혁련오가 바닥에 엎드린 채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검붉은 피가 거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때 강호의 음지를 틀어쥐고 절대적인 권력자를 참칭하던 흑월문의 주인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눈동자에는 헛헛한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혁련오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칠흑 같은 장검은 이미 반 토막이 나 있었고, 날에는 이가 빠져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무현아……."

혁련오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모래가 긁히는 듯했다.

"보았느냐? 이것이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십 년 전의 진실이고, 내가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흑월의 바닥이다."

혁련오가 피투성이가 된 입을 비틀며 웃었다. 그것은 광기 어린 미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부서진 자가 짓는 허탈한 조소에 가까웠다.

"너는 묻고 싶겠지. 대체 어째서 그랬냐고. 장원을 불태우고, 아이들의 이름을 지우고, 이 거대한 지옥의 문을 열어젖힌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가느다란 금빛 핏줄기가 흘러내릴 뿐이었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사제."

혁련오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열등감과 비루한 욕망이 엉켜 있었다.

"너는 스승님의 부름을 받고 태어날 때부터 검의 천재로 인정받았다. 소한이와 소연이 그 피를 이어받아 찬란한 명인을 각성할 때, 나는 그저 그들 뒤에서 먹물을 갈고 서류를 나르는 시종에 불과했지. 흑월문의 문주 자리에 올랐으나, 그것은 진짜 힘이 아니었다. 나는 껍데기뿐인 군주였어. 검은 달이 나에게 속삭였다. 네 이름과 영혼을 담보로 바치면, 이 강호를 삼킬 수 있는 진짜 '힘'을 주겠다고."

혁련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등 뒤로 무너져 내리는 전각의 기둥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장주의 자리를 원했을 뿐이다. 그 누구도 나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 위에서 명령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힘을 원했어. 그것이 잘못되었느냐? 어째서 나만, 나 혼자만 그 굴레 속에서 평생을 발버둥 쳐야만 했단 말인가!"

"그것이 네가 십 년 전 밤, 수많은 아이들의 기억과 이름을 불태운 이유인가."

무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함 속에는 분노조차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허탈한 연민과 끝없는 차가움뿐이었다.

"이름을 잃고 껍데기가 된 자들이 강호를 떠돌며 괴물이 되는 동안, 너는 그 위에 군림하여 무엇을 얻었지? 비참한 고독과, 결국 계약의 사슬에 묶여 소모되는 흉물스러운 자아뿐이지 않은가."

"크하하하……! 맞다! 맞아, 사제! 네 말이 다 맞어!"

혁련오가 미치광이처럼 웃어젖혔다. 피를 토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광채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 이 검은 달의 계약은 단순한 빚이 아니야. 한 번 얽힌 인연은 그 끝을 보기 전에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너 역시 그 빚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잖아? 네 본명이 불리는 순간, 너 또한 나처럼……."

퍼억-!

그 순간, 혁련오의 말을 끊어내는 거대한 충격음이 울렸다.

본단의 무너진 정문 쪽에서 지면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핏빛 쇠사슬이 채찍처럼 날아와 혁련오의 발목을 낚아채었다.

"크윽!"

"문주님. 그만 짖으십시오."

낮고 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월문의 외눈 문지기. 온몸에 피투성이 갑주를 걸치고, 한쪽 눈을 가린 채 거대한 대형 철퇴를 질질 끌며 걸어오는 사내가 나타났다. 십 년 전 흑월문의 철문을 지키던 그 괴물이었다. 이미 무현의 검에 한 차례 패배하여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였으나, 본단이 붕괴하는 마지막 순간에 계약의 집행력에 이끌려 다시 기어 나온 것이다.

외눈 문지기의 눈에는 이성은 없었다. 오직 계약의 잔재가 시키는 대로, 침입자를 배격하고 문주를 지키겠다는 맹목적인 살기만이 들끓고 있었다.

"네놈이……."

무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외눈 문지기의 등 뒤로는 본단의 유일한 탈출로인 붕괴 직전의 협곡 통로가 가로막혀 있었다. 퇴로가 차단된 것이다.

그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혁련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열등감이나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처연한 냉소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사제."

혁련오가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은 공격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과거 청월장의 마당에서 사제가 사형에게 검을 배우던 시절의 투박한 기식(起式)이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베풀어 줄 수 있겠나. 용서냐? 아니면 동정인가? 그 어느 것도 나는 필요 없다."

혁련오의 손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갈구해 마지않았던 금기의 무공, 흑천월식검의 잔재였다.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그의 부러진 검끝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다. 받아라, 사제. 네가 완성하지 못한 그 검의 끝을!"

슈우우웅-!

혁련오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전진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사방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칠흑 같은 초승달 참격이 폭발하듯 뻗어나갔다. 그것은 완벽하지도 않았고, 이전처럼 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검식 속에는 혁련오가 평생 동안 품어왔던 비뚤어진 집념과, 마지막 남은 모든 생명력이 남김없이 응축되어 있었다.

"사형!"

멀리서 월소연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소연과 소한 남매가 무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나, 무너지는 잔해와 튀어 오르는 파편들에 가로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이내 번뜩이는 금빛으로 빛나는 동공을 치켜떴다.

스으으강-.

무현의 손에 쥐인 검이 허공을 갈랐다. 복잡하고 화려한 초식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달빛을 가르는 한 줄기 묵직한 선(線)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선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흑천월식검의 소용돌이가 거짓말처럼 멈춰 섰고, 공간을 뒤덮던 어둠이 반으로 쪼개졌다.

지익-!

"크흑……!"

혁련오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가슴팍을 가로질러 얇고 선명한 핏줄기가 뻗어 나갔다. 검은 달의 계약이 만들어낸 껍데기의 육신이, 마침내 본래의 죗값을 치르듯 서서히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현의 검은 혁련오의 치명타를 비껴갔다. 그가 베어낸 것은 혁련오의 목숨이 아니라, 그를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계약의 사슬이었다.

"어째서…… 나를 베지 않는 것이냐, 사제."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부러진 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너를 베어봤자, 십 년 전의 밤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살아남아 속죄해야 한다. 이 잿더미 위에서, 네가 무엇을 부쉈는지 똑똑히 지켜보면서 말이야."

"크하하…… 어리석은 놈. 이미 늦었다……."

혁련오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외눈 문지기가 거대한 철퇴를 치켜들며 무현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왔다. 쩌렁쩌렁한 금속성 소리와 함께 명부혈쇄가 무현의 사방을 포위하듯 얽혀 들었다.

"오라버니!"

소연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외눈 문지기의 폭주를 막기 위해 무현이 검을 들어 반격하려는 찰나, 혁련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일어나 외눈 문지기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뭐 하는 짓이냐, 문주……!"

외눈 문지기가 당황한 듯 거친 목소리를 냈으나, 이미 늦었다. 혁련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흑천월식검의 잔여 에너지가 폭주하며 균형을 잃은 거대한 전각의 중앙 기둥을 강타했다.

쿠구구구궁-!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수십 톤에 달하는 돌더미와 불타는 대들보가 쏟아지며 무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사형!"

무현이 손을 뻗었으나, 그 사이로 거대한 흙먼지와 어둠이 가로막아섰다.

붕괴하는 잔해의 밑바닥,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와 핏빛 사슬에 뒤엉킨 채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혁련오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더 이상 어둠에 사로잡힌 껍데기가 아니었다.

혁련오가 떨어져 내리며 마지막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짙은 먹구름이 걷히고 난 후의 흉측하고 거대한 붉은 달이 차갑게 불타고 있었다.

쾅-!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흑월문의 본단 중앙이 완전히 함몰되었다.

자욱한 잿더미와 먼지 폭풍 속에서, 무현은 칼을 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형은 사라졌고, 흑월문의 중심은 무너졌다.

하지만 계약의 끝에서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붕괴한 잔해의 틈새 사이로, 강호 전역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검은 달의 서늘한 기운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핏빛으로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삿갓 없는 그의 얼굴 위로, 이제는 지워지지 않을 진짜 자신의 이름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거대한 잔해가 가로막은 협곡의 통로는 더 이상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마지막 대들보가 무너지며 흑월문의 본단은 완전히 지하의 무덤으로 파묻혔다. 사방을 뒤덮은 자욱한 회색 먼지와 매캐한 그을음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흐렸다. 잿더미와 흙먼지가 뒤섞인 폭풍 속에서, 무현은 여전히 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검을 쥔 채 굳건히 서 있었다.

"오라버니!"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검광을 두른 소녀가 먼지를 뚫고 달려왔다. 월소연이었다. 그녀의 양손에 쥐인 명인(名刃)은 여전히 찬란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그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칠흑 대검을 쥔 소한 또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소한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남매는 무현의 상처 입은 어깨와 찢어진 옷자락을 확인하며 다급히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다."

무현은 낮게 속삭이며 검을 거두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격전의 여파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무너진 잔해를 향해 있었다. 그곳은 사형 혁련오와 외눈 문지기가 함께 파묻힌 자리였다.

사형을 베지 못했다. 아니, 베지 않았다.

그것은 자비였을까, 혹은 또 다른 미련이었을까. 무현은 품속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십 년 전 청월장의 잿더미 속에서 도망쳤던 소년이, 이제는 모든 빚의 원흉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은 채 이 폐허에 서 있었다.

"문주는……?"

소연이 무너진 본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슬픔보다는 헛헛한 공허함이 배어 있었다.

"파묻혔다. 스스로 선택한 결말이겠지."

무현은 더 이상 그곳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흑월문의 본단은 무너졌고, 계약의 장부는 불탔다. 십 년 동안 그들을 옭아매었던 검은 달의 그늘은 일단 한풀 꺾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미세한 한기와, 여전히 강호의 밤하늘을 무겁게 짓누르는 붉은 기운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 있었다.

"가자."

무현이 뒤를 돌았다.

"이곳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잿더미가 아니야."

남매는 무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흑월문의 무너진 정문을 빠져나와 안개 낀 산길로 발걸음을 옮길 때, 등 뒤로 거대한 달빛이 문득 서늘하게 번뜩였다.

장부는 타올랐으나, 맺힌 인연은 아직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다.

강호의 진짜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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