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어머니의 계약>
잿더미가 된 정원 위로 차가운 달빛이 내리꽂혔다.
피비린내와 타다 남은 흑탄 냄새가 엉킨 공기 속에서, 흑월문의 대모(大母)라 불렸던 여인, 월하(月下)의 형체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핏빛 사슬들은 이미 부서져 흩어진 지 오래였다. 서무현이 쥔 흑천월식검의 끝에서 흘러내린 검은 빛은 밤안개처럼 흩어지며 그녀의 발치에 닿고 있었다. 그것은 참혹한 패배의 잔해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설켰던 저주가 비로소 풀려나가는 해원의 풍경에 가까웠다.
월하의 흐릿해진 눈동자가 무현의 얼굴에 박혔다.
화상 흉터가 얽힌 뺨, 삿갓 아래 감춰져 있던 흑백의 펜선 같은 눈빛. 그 눈빛은 십 년 전, 불길 속에서 제 살을 태우며 도망치던 아이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무현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월소연과 월소한 남매가 숨을 죽였다.
"……무현아."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가늘었지만, 정원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무현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흑천월식검의 날은 여전히 서늘한 살기를 품고 있었으나,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 단어는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허공의 구멍과도 같았다.
"네가 누구인지 안다."
월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그녀의 입가로 검붉은 피가 아니라 은빛 모래 같은 가루가 흩날렸다.
"네가 십 년 전, 내 품에서 울던 갓난아기였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너를 흑월문이라는 거대한 감옥의 문지기로 바쳤다는 것도."
소한의 숨이 턱 막혔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아이는…… 사부님의 제자이자, 우리와 함께 자란……."
소한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십 년 전, 사주받은 횃불을 들고 장원의 문을 직접 불태웠던 그 손으로, 그는 자신의 친동생과 다름없는 의오라비의 뿌리를 겨누고 있었던 셈이다.
월하는 소한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무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십 년 전이다."
월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쟁글거리며 울렸다. 마치 낡은 장부의 페이지가 강한 바람에 넘어가듯, 오래된 기억의 실루엣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네가 태어난 해, 우리 가문은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 아이…… 소한이의 몸속에는 선천적인 냉독(冷毒)이 흐르고 있었지. 의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내 핏줄을 내 손으로 땅에 묻어야 하는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월하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때 내게 손을 내민 것이 검은 달이었다. 달빛이 내는 목소리는 달콤했지.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대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 대가가…… 내 이름이었나."
무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렇다."
월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달의 계약은 등가교환이 아니야. 무언가를 얻으려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가치를 담보로 잡혀야 한다. 달이 요구한 것은 금은보화도, 무공의 비급도 아니었다. 이 장원에서 태어날 가장 순수한 영혼의 '이름'이었지."
월하의 손이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는 망설였다.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구의 핏줄인지 모를, 혹은 내 배로 낳았으나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아이의 이름을…… 검은 달의 장부에 적어 넣었다. 그 계약의 서판에 새겨진 첫 번째 이름이 바로 너였다. 서무현."
콰광-!
정원 구석에 처박혀 있던 흑월문주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반쯤 일그러져 있었고,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헛소리 마십시오, 대모! 그 계약은 우리 흑월문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문을 영원히 강호의 꼭대기에 올려놓을……!"
혁련오가 소리쳤으나, 월하는 그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위대한 유산? 웃기는 소리.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찌꺼기일 뿐이다, 혁련오. 너 또한 그 계약의 노예에 불과해."
월하가 시선을 다시 무현에게 돌렸다.
"장주였던 서문 월청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그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너를 구하려 했다오. 계약을 비틀고, 장부의 기록을 지우려 했지. 하지만 검은 달의 계약은 인간의 의지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 년 전의 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서문 월청이 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왜 밤마다 술에 취해 검을 쥐고 허공을 베었는지, 무현은 이제야 깨달았다. 양부이자 스승이었던 그이는 자신의 손으로 지켜주지 못한 아이의 이름을 품고 매일 밤 속죄했던 것이다.
"장주가 계약을 파기하려 발버둥 치자, 검은 달은 불로 집행을 내렸다."
월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계약을 어긴 자의 혈육이 가진 업보였지. 장원의 기둥에 불을 지른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었다. 계약의 룰을 어긴 대가로 장원 전체가 불타야만 했던 거다. 그리고……."
월하의 시선이 소한을 향했다. 소한의 얼굴에서 색기가 싹 가셨다.
"네가 든 횃불은, 네 손으로 직접 움직인 게 아니었다. 계약의 힘에 홀린 네 몸이, 스스로 불을 붙이도록 조종당했던 거다. 소한아. 너는 방화범이 아니라, 달이 부린 인형에 불과했어."
"아…… 아아……."
소한이 머리를 감싸쥐며 주저앉았다.
십 년 동안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던 죄책감. 내가 내 집을 태웠고, 내 동생과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지옥 같은 자책감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더 거대한 폭력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소한이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럼 왜…… 왜 나를 살려둔 거야? 차라리 그날 함께 태워버리지 그랬어!"
"살리고 싶어서 살린 게 아니다."
월하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검은 달은 장부를 완성해야 했다. 십 년 동안 너희 남매를 키우고, 흑월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두 마지막 장부를 채우기 위한 달의 의지였다. 혁련오 저 자는 그 달의 개가 되어 날뛰었던 것뿐이고."
혁련오가 비열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눈치가 빠르면 뭐하나! 대모, 당신이 이미 소모품이 된 이상, 이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내 것이다! 흑월문의 계약은 완성된다!"
혁련오가 전신을 뒤틀며 무현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흑천월식검의 원형에 가까운 참격이 밤안개를 찢어발기며 날아왔다.
그러나 무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잉크 같은 먹물들이 그의 발치에서 회오리처럼 감돌았다.
"내 이름이 빚이라고."
무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삿갓이 벗겨지며 그의 얼굴 전체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이마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 화상 흉터가 기괴하게 빛났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았다.
"그래. 태어날 때부터 달에 저당 잡힌 목숨이었다 치자. 십 년 동안 이름도 없이, 짐승처럼 쫓기며 살아왔지."
무현이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금빛 이름칼의 형상—명인(名刃)의 기운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타인이 기억하는 존재의 증거이자, 스스로 세운 자아의 벼리였다.
"하지만 그 빚은 네놈들이 정한 게 아니야. 그리고 내 이름은…… 너희들이 마음대로 삼킬 수 있는 찌꺼기도 아니다."
무현이 검을 휘둘렀다.
비명 같은 참격이 혁련오의 검광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콰아아앙—!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졌다.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정원의 바닥을 사방으로 갈라놓았다. 혁련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 색이 번졌다.
"말도 안 돼! 네놈도 계약의 힘을 썼을 터인데, 어째서 네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거지?!"
"지워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월하가 씁쓸하면서도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무현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월소연이 다리를 절뚝이며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도 미약하지만 눈부신 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한 역시 비틀거리며 일어설 준비를 했다.
"오라버니의 이름은 너희가 만든 장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소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피투성이가 된 형에 대한 원망과, 의오라비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내가 기억한다. 우리 오라버니의 이름을. 십 년 동안 그 잿더미 속에서 우리를 지켜준 사람의 이름을! 타인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계약도 그 이름을 완전히 집어삼킬 수 없어!"
"이…… 미친 년놈들……!"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물러섰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계약의 반작용이었다. 문주로서 사욕을 채우려던 그의 자아가 먼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대모!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이!"
혁련오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월하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러나 월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혁련오. 내 첫 번째 제자이자, 가장 어리석었던 아이야. 너는 끝내 달의 주인이 아니라, 달이 버린 사료가 되는구나."
월하가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검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 년 동안 대모의 몸속에 묶여 있던, 장원의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진 순수한 흙과 피의 기운이었다.
지진-!
정원 전체가 거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월문의 본단을 지탱하던 거대한 석벽들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서 핏빛 기둥들이 솟구치며 흑월문의 건물을 사방으로 얽어매었다.
"뭐 하는 짓이냐! 당장 멈춰라, 대모!"
혁련오가 발버둥 쳤으나, 월하의 손에서 뻗어 나온 핏빛 사슬이 그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빚을 갚을 시간이다."
월하의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이 장원의 주인이자, 계약의 집행자로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흑월문의 모든 빚을 청산한다."
"안 돼…… 안 돼에에에—!"
혁련오의 비명이 사방으로 찢어졌다. 월하의 손에 이끌린 혁련오의 몸은 그대로 본단 중앙의 거대한 제단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약의 진짜 채권자인 검은 달이, 마지막 제물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면이 무너지고, 하늘의 붉은 달이 핏빛 눈동자처럼 끔찍하게 수축했다.
무현은 검을 곧게 세운 채, 무너져 내리는 본단의 중심을 응시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지만 시작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계약이 불길 속으로 사르르 녹아내리는 동안, 무현의 귀에는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단 하나의 이름.
"서무현—!"
그 목소리가 짓밟힌 흑월문의 잿더미 위로 찬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본단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무너져 내렸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찢어지며, 억눌려 있던 밤의 대기가 소용돌이쳤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달의 눈동자가 점차 수축하더니, 이윽고 차가운 청백색의 원래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흑월문을 지배해 온 계약의 기운이 근본부터 뒤틀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라버니!"
월소연이 무너지는 돌더미를 밟고 뛰어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결연했다. 그 뒤를 이어 월소한 역시 이를 악물며 달려왔다. 십 년 동안 그를 짓누르던 방화범이라는 낙인, 그 지독한 환각의 잔재는 이제 완전히 걷혀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두려움에 찬 잿더미가 아니었다.
무현은 달려오는 남매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흑천월식검의 검신에서 요동치던 어둠이 사르르 가라앉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피어난 맑고 단단한 금빛 광채였다.
쿠구구구궁—!
대지의 심장부가 내려앉듯 흑월문의 거대한 본관 건물이 중앙으로 주저앉았다. 그 중심에는 마지막까지 악을 쓰며 발버둥 치는 혁련오와, 모든 것을 끝내려는 대모 월하가 있었다.
"대모! 날 살려라! 나는 이 문의 문주다! 날 버릴 수……!"
혁련오의 절규는 본단의 거대한 석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파묻혀 흩어졌다. 월하는 그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흩어져가는 형체는 이미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무현의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 외면당했던 핏줄의 연민도, 냉혹한 채권자의 미련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빚을 털어낸 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월하의 입술이 마지막 말을 남기듯 미세하게 달싹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현은 그 입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너는 이제 그 누구의 빚도 아니다.
콰광—!
대모의 소멸과 함께 제단이 완전히 함몰되었다. 검은 달의 계약서를 기록하던 열두 권의 '이름 장부'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새하얀 불꽃에 휩싸였다. 십 년 전 장원을 태웠던 그 흉악한 불길이 이번에는 역으로 계약의 서판들을 남김없이 태우고 있었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잉크 펜선 같은 먹물 파편들이 밤하늘로 치솟았다가 비처럼 흩뿌려졌다.
무현은 삿갓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화상 흉터가 드러난 그의 얼굴 위로, 마침내 구름을 뚫고 내려온 진정한 달빛이 환하게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흑월의 차가운 기운이 아니라, 비 그친 밤의 서늘하고도 맑은 기운이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마침내 무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소한 역시 그 뒤를 바짝 붙으며 무현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았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붕괴하는 흑월문의 잿더미 위로 하나로 길게 겹쳐졌다.
무현은 두 사람의 등을 감싸 안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체온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명의 증거였다. 이름도 없이, 누군가의 빚을 대신 갚는 껍데기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저 멀리 무너지는 본단 아래로 파묻히고 있었다.
계약은 깨졌다.
하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타인이 기억하고, 스스로 지켜낸 자아의 벼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올랐다.
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너지는 흑월문의 잔해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강호의 끝이자, 새로운 길의 시작점이었다. 비 그친 밤의 안개 속에서, 이름 없는 검객이 아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길목이 조용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