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핏빛 달 — 대모의 이름
흑월문 본단의 천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거대한 종이 찢어지는 듯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묵은 먼지와 기둥의 잔해가 어둠 속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그 난류 속에서 서무현의 검끝은 여전히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챙―!
두 갈래로 쪼개진 흑색 장부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며 불꽃을 튀겼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수천, 수만 명의 인간이 남몰래 간직했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 대가로 바친 이름들이 응축된 저주의 서판이었다. 장부가 쪼개지는 순간, 본단의 공기는 기이하게 뒤틀렸다.
바람이 멎었다.
아니, 바람뿐만 아니라 소리마저 통째로 삼켜진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무현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흑백의 묵화(墨畵)였다. 잉크가 번진 것처럼 사방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그 묵직한 채색의 중심에서 유독 한 가지 색채만이 맹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붉은색.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검은 달의 둥근 테두리부터 서서히 핏빛 피막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이 통째로 선혈을 뒤집어쓴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달빛이 아니라 살점의 파편처럼 끈적한 붉은 광선이 무너진 본단의 잔해 위로 쏟아졌다.
"이럴 수가……."
바닥에 처박혀 있던 흑월문주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반쯤 짓무르고 있었고, 한때 강호를 주름잡던 문주의 권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부터 투명하게 바스러져 검은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내가 장부를 지키는 자였다. 나는 채권자였어…… 그런데, 어째서……."
혁련오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사그라들었다. 그는 자신 역시 진정한 채권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자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거느렸던 흑월문, 그가 집행했던 수많은 빚—그 모든 것은 단지 거대한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이름을 수집하기 위한 하부 조직에 불과했던 것이다.
혁련오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부서진 장부의 심장부를 올려다보며 무릎을 꺾었다.
쿠구구구―!
땅이 갈라졌다. 갈라진 지층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뜨거운 용암이 아니라, 차갑고 끈적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사각.
마치 죽은 자가 산자의 땅을 밟는 듯한 불길하고도 정제된 발소리였다.
무현은 삿갓 아래로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쥔 검에서 희미한 백색 광망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광마저도 새로이 밀려드는 핏빛 파도 앞에선 스러질 듯 위태로웠다.
발소리의 주인이 어둠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낡고 해진 검은 휘갑을 두르고 있었으나, 그 자태는 기이할 정도로 우아했다. 얼굴은 반투명한 너울로 가려져 있어 이목구비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너울 너머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주위에 있던 모든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 사부님…… 아니, 대모님……!"
혁련오가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비명에 가까운 쉰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몸은 공포로 인해 경련하고 있었다.
대모.
흑월문의 진짜 주인, 그리고 계약의 서판을 관장하는 채권자.
그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모 월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서 있는 두 남매, 월소연과 월소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무현의 삿갓을 향해 멈췄다.
너울이 살짝 흔들렸다. 그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기이하게 익숙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십 년 전이다."
대모 월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희가 장원을 태우고, 스스로의 이름을 담보로 잡힌 채 살겠다고 맹세했던 그 밤으로부터 정확히 십 년이 흘렀지."
소연의 가슴에 품고 있던 옥패가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지이잉―! 귓가를 찢는 듯한 고주파와 함께 옥패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연은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대모를 응시했다.
"오…… 라버니……."
소연이 떨리는 손으로 무현의 옷자락을 쥐었다. 무현의 등 뒤에서 소한은 칠흑 대검을 겨우 지지대 삼아 일어섰지만, 그의 다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대모가 천천히 너울을 위로 밀어 올렸다.
달빛이, 아니 핏빛으로 물든 달의 기운이 그녀의 얼굴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무현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그의 화상 흉터가 욱신거리며 타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과 그 사이에 쌓인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형태의 이목구비였다.
"어머니……?"
소한이 먼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의 흙먼지를 적셨다.
소연 역시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파편들이 맹렬한 속도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잿더미가 되기 전의 기억, 따스했던 손길, 그리고 어느 날 밤 홀연히 사라졌던 등불의 그림자.
대모 월하, 그녀는 죽은 줄 알았던 남매의 생모였다.
"어머니가 아니란다, 소한아."
대모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처연해서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이기 전에, 이 강호가 만든 첫 번째 채무자였지. 병들어 죽어가던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이 버려진 아이들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나는 내 이름의 전부를 흑월의 계약에 바쳤다."
대모의 시선이 무현을 향해 고정되었다.
무현은 자신이 잡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스승인 서문 월청의 유언과, 십 년 전 화염 속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겹쳐졌다.
『무현아, 네 이름은 네가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빚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가 긁히는 것처럼 낮고 갈라져 있었다. "십 년 전 장원에 불을 지르고, 내게서 이름을 지운 것도 당신인가."
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울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빛 달빛이 그녀의 은백색 머리칼을 물들였다.
"그래.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법이지. 계약의 기한이 되었을 때, 나는 채무의 집행자로서 그 장원에 불을 질렀다. 너희를 살리기 위해, 너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바로 '이름'과 '기억'을 담보로 가져와야만 했으니까."
대모가 걸음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사각.
그녀의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면에 새겨진 검은 균열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서무현, 아니… 열세 번째 장부의 첫 번째 페이지에 적힌 이름이여. 너는 네 스승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기어왔다. 하지만 그건 연기에 불과해. 빚을 진 자가 채무를 면할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대모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기운이 거대한 사슬의 형상을 이루며 무현을 향해 겨누어졌다. 명부혈쇄보다 몇 배는 더 짙고, 몇 배는 더 무거운 계약의 사슬이었다.
"너 자신을 지우고, 나의 온전한 대리인이 되어라. 그러면 이 아이들과 강호 전체에 내린 계약의 저주를 멈춰주마."
"안 돼……!"
소연이 소리치며 무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명인(名刃)은 은은한 금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연의 옥패가 완전히 부서지며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마지막 조각의 기억이 흘러나왔다.
"오빠는… 우리 오빠는 아무것도 빚진 게 없어! 그건 어머니가 우리를 살리려고 스스로 짊어진 거잖아! 왜 우리에게 또 이름을 빼앗아가려고 해!"
소한 역시 비틀거리며 일어나 무현의 반대편 측면을 지켰다. 칠흑 대검의 끝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였고, 과거의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지만, 두 남매의 등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십 년 전의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선 채권의 거부자들이었다.
무현은 두 남매의 등을 보았다.
작고 떨리던 어깨가 어느새 자신과 나란히 서서 거대한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스승이 남긴 유언.
어머니가 입은 십 년의 상처.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모든 비참한 길.
무현은 눈을 감았다.
삿갓 아래로 흘러내린 핏빛 달빛이 그의 화상 흉터 위로 스며들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빌려온 빚인가, 아니면 타인이 기억해 주는 선물인가.
만약 그 이름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저주라면, 그리고 그 저주를 끊기 위해 자신이 다시금 무명(無名)의 껍데기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백색 광망이 순식간에 칠흑과 같은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찬란한 금빛의 선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마지막 초식.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검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붕괴하는 본단의 소음 속에서도 모든 이의 귀에 명확하게 박혀들었다.
"누구에게 빌린 적도, 누구에게 바친 적도 없다."
무현의 검끝이 대모 월하를 향해 똑바로 겨누어졌다.
하늘 위에서 핏빛으로 울부짖던 검은 달이, 마침내 두 갈래로 쪼개질 듯 거대한 진동을 시작했다.
"어리석구나."
대모 월하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얼어붙어 있던 빙하가 깨어지는 듯한, 처절하리만치 차가운 선고였다.
콰아아앙―!
대모가 뻗어 올린 손끝에서 폭발적인 핏빛 사슬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명부혈쇄와는 차원이 다른, 흑월의 근원 그 자체인 계약의 철쇄였다. 사슬은 허공을 찢으며 무현을 향해 쇄도했고, 그 압력만으로도 무너져 내리던 본단의 잔해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오라버니!"
소연이 경악하며 금빛 명인을 치켜들었다. 소한 역시 칠흑 대검을 비틀어 거친 검강을 일으켰다. 남매가 동시에 무현의 앞을 막아서며 검과 칼날을 교차시켰다.
챙기기긱―!
파직!
단 한 번의 충돌이었다.
소연과 소한이 뿜어낸 검강이 대모의 사슬에 닿는 순간,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남매의 입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충격파가 그들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무현이 재빨리 몸을 날려 두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바닥에 착지했지만, 미끄러진 발밑에서 돌무더기가 비명을 질렀다.
"소연아! 소한아!"
무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찢어졌다.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삿갓이 충격에 벗겨지며, 반쯤 흉터로 일그러진 얼굴과 칠흑 같은 머리칼이 핏빛 달빛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본 대모 월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너울 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현아."
대모의 입술 새에서 새어나온 그 이름은, 십 년 전 불타는 장원 안에서 부서졌던 목소리와 정확히 닮아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이름을 저당 잡히고, 남매를 살리기 위해 마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여인의 목소리.
"너는… 살아남았어야 했다."
대모가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바닥에 새겨진 계약의 문양들이 붉은 피처럼 끓어올랐다.
"네가 그 이름을 지키려 할수록, 이 강호의 모든 채무는 너를 조여올 것이다. 네 스승이 그러했고, 혁련오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게로 오거라, 무현아. 그 짐을 더 이상 혼자 지게 두지 않겠다."
"짐이 아니야."
무현이 일어섰다.
그의 등 뒤에서 소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소연은 부서진 옥패의 파편을 꽉 움켜쥐어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핏빛 달빛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틀렸어요."
소연이 목을 놓아 외쳤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단호하게 올라가 있었다.
"오빠가 가진 이름은 빚이 아니에요. 스승님이 남겨준 것도, 어머니가 바친 희생의 대가도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이 강호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예요!"
"증거……?" 대모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름 따위가 뭐라고. 기억 따위가 뭐라고 그 지독한 고통을 견디겠다는 거냐."
"내가 기억하니까요."
무현이 검을 바로잡았다.
검신을 타고 흐르던 칠흑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백색의 광망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흑천월식검의 파멸과 백천월광검의 구원이 완벽하게 맞물린, 단 하나의 빛이었다.
"소연이가 나를 기억하고, 소한이가 내 등 뒤를 지키고, 스승님이 내게 검을 쥐여주었다. 타인이 나를 기억하는 한, 내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무현의 눈동자가 대모 월하를 직시했다.
그것은 채무자의 눈이 아니었다. 채권을 거부하고, 계약의 서판을 찢어버린 자의 오롯한 자아였다.
"그러니 어머니. 이제 그 빚을 끝내겠습니다."
쿠우우구우웅―!
무현이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핏빛 달이 중앙부터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붉은 피막이 벗겨지고, 그 너머로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순백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강호 전체를 짓누르던 검은 달의 계약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대모 월하의 몸이 서서히 투명하게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짓눌려 있던 짐을 내려놓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옅고도 편안한 미소였다.
"그래……."
대모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지듯 잦아들었다.
"너는 내 아들이 맞구나.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가장 찬란한 이름이여."
빛과 어둠이 뒤섞인 폭풍 속에서, 대모의 형체가 완전히 흩어져 핏빛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흑월문 본단의 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 비로소 구름을 뚫고 나온 진짜 달빛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무현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무너진 잔해 속에서 서로를 부축하며 일어나는 남매를 돌아보았다.
강호를 삼키려 했던 검은 달은 깨어졌고, 십 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은 마침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