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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16화목차

제16화 빚칼이 피를 흘리다

1

검은 달은 운무 속에 잠겨 있었다.

빛을 잃은 하늘은 썩은 멍처럼 잿빛으로 뭉개졌고, 그 아래 펼쳐진 흑월문 본단의 연환전(連環殿)은 이미 반쪽이 무너져 내린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차가운 바람에 실려 바닥을 굴렀다. 그 파열음 사이로 툭, 툭, 떨어지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렸다.

피였다.

혁련오(赫連梧)의 오른손에서 흘러내린 피는 대리석 바닥을 검붉게 적시며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피가 아니었다. 끈적한 점성을 지닌 점액 같은 핏물 속에서는 수많은 금빛 글자들이 모래알처럼 꿈틀거리며 명멸하고 있었다.

십 년 동안 흑월문주라는 왕좌를 탐하며 쌓아 올린 탐욕, 타인의 기억을 저당 잡히고 강탈하여 빚으로 삼았던 계약의 잔재들이 그의 육신을 안쪽부터 파먹고 있었다. 혁련오의 얼굴은 이미 반쪽이 형체를 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눈구멍 속에서는 눈동자 대신 칠흑 같은 어둠과 붉은 실핏줄만이 엉겨 있었다.

"후…… 후우……."

혁련오의 입김이 허공에서 하얀 서리로 부서졌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쥐인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타인의 '이름'과 '기억'을 농축하여 칼날의 형상으로 굳혀 놓은 비틀린 사념의 응어리, 즉 '빚칼'이었다.

빛을 거부하고 타인의 비명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 이 검은 흉기는 진정한 의미의 무기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저주였고, 채무의 증서였으며, 계약의 족쇄였다.

"서무현……."

혁련오의 목소리는 갈라진 쇳소리 같았다. 뼈가 갈리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 연환전의 잔해 속을 울렸다.

"너는 모른다. 이 칼이 무엇을 삼켜서 만들어졌는지. 이 문(門)의 기틀이 누구의 눈물로 다져졌는지. 스승님이 너를 양자로 들인 그날부터, 아니, 네가 설원의 눈밭에서 버려진 채 이 문턱을 넘은 그 순간부터 너는 이미 이 칼의 날에 베여 있었다."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에 눌러쓴 삿갓의 그늘 아래로 깊은 화상 흉터가 얼룩졌다. 품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던 맥박이 진정되고 있었다. 귓가를 맴돌던 환청—십 년 전 장원을 삼키던 횃불의 타오르는 소리와 아우성—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그것은 그가 강해져서가 아니었다.

오른쪽, 그의 허리춤에 바짝 붙어 선 소녀의 체온 때문이었다.

월소연(月小娟).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아 흑월의 살수로 길러졌으나, 결국 피와 눈물 속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아낸 아이. 소연의 자그마한 손이 무현의 거친 소매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미열이 무현의 심장에 단단한 닻을 내리게 했다.

오라버니, 흔들리지 마세요. 저 자의 말은 전부 빚의 잔해일 뿐이에요.

말은 없었으나, 닿은 체온을 통해 완벽한 교감이 이루어졌다. 소연의 반대손에는 십 년간 감춰져 있던 장원의 비전(秘傳), '명인(名刃)'의 기운이 어스름한 금빛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흑월문의 어둠을 찢는 태고의 빛이 아니었다. 타인이 지워버린 기억 속에서 기꺼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맹세한 자들만이 피워낼 수 있는, 가장 작고도 단단한 이름의 칼이었다.

무현이 천천히 허리에 찼던 검집을 밀어 올렸다.

철컥, 하고 차갑고 건조한 쇳소리가 밤안개를 갈랐다.

2

"네 이름은 내 것이 아니다."

무현의 입술이 열렸다. 낮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십 년 동안 짓눌려 있던 빚의 무게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서슬 퍼런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혁련오의 일그러진 얼굴이 한 치 더 뒤틀렸다.

"오만한 놈! 네가 가진 무공, 네가 디디고 선 이 땅, 심지어 네가 숨을 쉬는 그 순간조차 모두 흑월에 진 빚이다! 계약의 장부에 네 이름이 새겨진 이상, 너는 내 손바닥 안의 껍데기에 불과해!"

"장부?"

무현이 피식, 실소했다. 그 흉터 진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한 잔인함을 자아냈다.

"그 썩어 빠진 종이 쪼가리에 적힌 게 내 이름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그건 네가 빼앗은 타인의 유품일 뿐이다. 내 이름은……."

무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그의 낡은 짚신 코를 적셨다.

"네가 훔치기 전에 이미 내 어머니가 눈밭에 묻어두었고, 스승님이 마지막 유언으로 지켜낸 것이다. 네놈이 채권자 행세를 하며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콰아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현의 발밑에서 폭음이 터졌고, 그의 몸이 연무를 찢으며 쏘아져 나갔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빛을 삼키는 중력장이 무현의 검끝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칠흑 같은 초승달 참격이 혁련오의 정면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비상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압도적인 중압감이 연환전의 남은 기둥들을 짓이기며 으스러뜨렸다.

혁련오의 눈이 핏빛으로 번뜩였다.

"방랑하는 껍데기 주제에! 죽어라!"

혁련오가 팔을 치켜들자, 그가 쥔 '빚칼'이 역방향으로 꺾였다.

일반적인 검의 궤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베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리와 이치를 거꾸로 뒤집는 듯한 기괴한 참격이었다.

3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혁련오의 빚칼이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글자였다.

강호의 무림인들이 부르짖는 정정당당한 초식의 이름 따위는 없었다. 그 참격은 흑월문의 거대한 지하 밀실에서 수십 년간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도려낼 때 사용된 계약서의 문장들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차(借)—빌릴 차(借).’

허공에 뒤집힌 채 새겨진 거대한 금빛 글자가 핏빛 빛을 발하며 무현을 내리쳤다. 그 글자가 허공에 머무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희박해졌다. 무현의 어깨를 짓누르던 중력이 몇 배로 불어나며 그의 무릎이 미세하게 꺾였다.

공간에 새겨진 글자가 실체화되어 날카로운 빗살처럼 쏟아졌다.

"오라버니!"

소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금빛 명인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챙-! 챙강강강!

명인의 칼끝이 빚칼의 파편과 부딪칠 때마다 허공에서 불꽃이 아니라 시퍼런 잉크 같은 잔상과 피비린내가 터져 나왔다. 소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빚칼의 공격은 단순한 내공의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기억'을 직접 타격하여 자아를 붕괴시키는 지독한 주술적 침식이었다.

"큭……!"

소연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지키려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십 년 전 그 밤, 불타는 장원에서 자신과 오빠를 살리기 위해 묵묵히 등을 내주었던 의오라비, 무현의 존재 자체였다. 만약 저 빚칼의 글자가 무현의 머릿속에 박히면, 무현은 영원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흑월문의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혁련오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래, 발버둥 쳐라! 발버둥 치면 칠수록 네 안의 이름은 더욱 짙게 물들 것이다. 너희 남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빚의 연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혁련오의 등 뒤로 거대한 흑월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것은 달이 아니었다. 거대한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는 듯한, 핏빛으로 충혈된 흑천의 공극(孔隙)이었다. 그 공극에서 쏟아지는 검은 안개가 혁련오의 빚칼을 더욱 거대하게 부풀렸다.

칼날의 길이가 배로 늘어났다. 그 안에서는 십 년 전 죽어간 무림맹의 고수들, 이름 없는 살수들, 그리고 청월장의 무사들이 지르던 비명이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빚은…… 네 심장을 빌려 산다!"

혁련오가 도약했다. 그의 몸이 흑색의 회오리와 하나가 되어 무현과 소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오직 채무자들만의 허울로 채우겠다는 흑월문의 궁극적인 참격이었다.

4

무현은 눈을 감았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 속에서, 역겨운 핏비린내 속에서, 그는 반대로 가장 고요한 내면으로 침잠했다.

십 년 전의 밤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 서문 월청이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밀어내며 던졌던 마지막 눈빛.

‘무현아, 네가 네 이름을 쥐고 있는 한, 흑월은 너를 삼킬 수 없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언제나 자신을 향해 따스한 온기를 건네주던 작은 소녀의 손길.

무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홍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칠흑의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칠흑을 완전히 뚫고 나오는, 지독하게 순수한 금빛의 명인(名刃)이었다.

"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사형."

무현의 목소리가 연환전의 잔해를 부드럽게 감쌌다.

"빚이라는 건 말이다. 갚아야 끝나는 게 아니다."

"……뭐라고?"

"처음부터 빌린 적이 없다면, 애초에 갚을 필요도 없지."

무현과 소연, 두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졌다.

더 이상 검객의 무공과 살수의 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지워졌던 두 개의 이름이 서로를 인지하고 증명하는 순간 탄생한, 완벽한 합일의 참격이었다.

월륜(月輪)의 초식, 그 첫 번째.

백천(白天)과 흑천(黑天)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이름의 칼.

"오라버니!"

"소연아."

동시에 발을 구른 두 사람의 검이 혁련오를 향해 교차했다.

수천의 비수가 흩어지듯 날카로운 금빛 선들이 혁련오의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흑월문의 금기 무공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그 안의 마기를 해체하는 정화의 궤적이기도 했다.

5

카아아아앙—!

세상 모든 소음이 단 하나의 파열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환전의 거대한 바닥이 중앙부터 사방으로 갈라지며 거미줄 같은 균열이 뻗어 나갔다. 검은 안개와 금빛 섬광이 충돌한 자리에서 사방으로 튀긴 충격파가 남은 벽들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혁련오의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빚칼이—정중앙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지직, 지지직―!

"크…… 윽……?!"

혁련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모았던 빚의 잔해, 타인의 기억으로 단단하게 다져졌던 그 거대한 사념의 검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칼날의 표면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금빛·흑빛 글자들이 유리조각처럼 깨져 흩어졌다.

"이럴 리가……! 내 계약은 완벽했다! 흑월의 문주는 영원히 채권자로 남아야 한다! 어째서…… 어째서 이 칼이 부러진단 말이냐!"

"네가 본 것은 채권자의 장부가 아니야."

무현이 혁련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검끝은 이미 혁련오의 가슴팍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네가 보았던 건, 남의 이름을 빼앗아 자신의 공백을 채우려던 네 자신의 굶주린 영혼뿐이지."

소연이 무현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와 혁련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손에 쥐인 작은 명인칼에서 흘러내린 금빛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흑월의 살수가 아니야, 혁련오."

소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네가 우리에게 준 것은 빚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이름을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였다."

탁.

무현의 검이 혁련오의 가슴을 짓누르던 마지막 방어선을 완벽하게 관통했다.

6

스으으읍―.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혁련오의 가슴에 박힌 검끝에서 푸르스름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피는 대지에 닿기도 전에 투명한 금빛 증기로 화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혁련오의 몸속에 남아 있던 타인의 '이름'들이 비로소 원래의 주인을 찾아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혁련오의 얼굴에서 흉터가, 그리고 그를 지탱하던 흑월의 기운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하얗게 새어버렸고, 눈빛은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갔다.

"……이게…… 내……."

혁련오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였으나,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이미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빈 주머니와 같았다.

툭.

그의 손에서 완전히 부서진 빚칼의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부서진 빚칼의 조각들이 땅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튀긴 피와 잉크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엉겨 붙었다. 그것은 단순히 무기가 깨진 것이 아니었다. 빚칼 자신이 고통을 느끼듯, 붉고 검은 피의 파문이 연환전 바닥을 타고 맹렬하게 퍼져 나갔다.

이름이 베이면 빚도 피 흘린다.

혁련오의 소멸과 동시에, 흑월문 본단 전체에 박혀 있던 수천 개의 계약 팻말들이 일제히 균열을 일으키며 붉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지하 깊은 곳, 누군가의 봉인이 풀리는 듯한 거대한 지진음이 울렸다.

무현은 그 피의 파문 속에서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그의 손에 쥐인 검은 아직 차갑게 식지 않았다.

"끝난 게 아니야."

무현의 나지막한 혼잣말 뒤로, 연환전 너머 흑월곡의 깊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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