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둘이서 하나의 칼
찢어진 밤하늘 아래로 검은 낙숫물 같은 빗방울이 가늘게 흩날렸다.
스산한 바람이 청월장 본단 폐허의 잔해 사이를 스칠 때마다, 불에 타 재가 된 서까래가 툭,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대지의 심장처럼 쿵쾅거리던 흑천월식검의 중력장은 이미 멎은 지 오래였다. 그 거대한 공포가 물러간 자리에 남은 것은 비릿한 피비린내와 타다 남은 목재의 퀴퀴한 냄새뿐이었다.
무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낡은 자루를 움켜쥔 손가락 마디를 적셨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흑천월식검의 금기 초식을 강제로 끌어다 쓴 대가는 가혹했다. 단단하게 뭉쳐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내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문득 밀려온 아득한 공포에 무현이 이를 악물었다. 시야가 핑 돌며 흑백으로 바스러졌다.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땅으로 고꾸라지려던 그때였다.
"오라버니."
작고 단단한 손 한쪽이 무현의 오른손 등 위로 겹쳐졌다.
체온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바위처럼 묵직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무현이 고개를 비틀어 옆을 내려다보았다.
핏자국과 먼지가 뒤섞여 엉망이 된 얼굴.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월소연. 십 년 전 그 지옥 같은 장원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아, 흑월문의 칼로 길러졌던 소녀. 그녀가 무현의 떨리는 손아귀를 단단히 움켜쥐며 칼자루를 함께 쥐었다.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소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무현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삿갓은 반쯤 부서졌고, 얼굴의 화상 흉터는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하지만 소연은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서부터 묘한 열기가 흘러나와 무현의 마비된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검은 달의 그늘 아래, 두 사람의 손이 하나의 검병(劍柄)을 공유했다.
의남매가 같은 손잡이를 쥔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슈우우우——.
공기 중에 남아 있던 검은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두 사람의 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소연이 허리춤에서 뽑아 든 낡은 단검의 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컥컥!
녹슨 철판이 벗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의 밋밋한 회색 강철면 위로 찬란한 금빛의 문양들이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자였다. 잊힌 기억의 조각이자, 타인이 불어넣어 준 이름들의 파편. 장원의 비전(秘傳) 속에서만 전해 내려오던, 오직 목숨을 건 자들만이 피어낼 수 있다는 절기.
금빛 이름칼, 명인(名刃)의 각성이었다.
"크…… 흣……!"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금빛 광채가 소연의 얼굴을 환히 밝혔다. 그녀의 눈썹이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지만, 손아귀는 더욱 단단히 힘을 주어 검병을 조였다. 칼날이 길게 늘어나며 거대한 백병(白兵)의 형상을 빚어냈다. 무현의 묵직한 흑천월식검과 소연의 눈부신 금빛 명인이 기묘하게 얽혀,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와 빛의 칼날을 완성해 낸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가 있었다.
"……하, 하하하……."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흑월문주, 혁련오였다.
그의 가슴팍은 아까 무현의 일격에 의해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심장이 뛰어야 할 자리는 뻥 뚫린 대형(大洞)처럼 파여 있었고, 그 균열 사이로 붉은 피 대신 검고 탁한 진액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흑월의 계약에 영혼을 저당 잡힌 자는 심장이 멎어도 계약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완전히 소멸할 수 없었기에. 혁련오는 찢어진 입술을 비틀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바로 그거다. 무현아. 그리고…… 소연아."
혁련오의 목소리가 쉰 목소리로 갈라져 울렸다. 그의 벌어진 가슴 틈새로, 징그러운 검은 실타래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것은 그동안 흑월문이 강호의 고수들에게서 빼앗아 모아둔 '이름'들의 잔해였다.
비틀린 욕망과 짓밟힌 기억들이 얽히고설킨 흉물스러운 형상. 혁련오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올리며 그 파편들을 향해 쉰 소리를 뱉었다.
"보아라. 저것들이 네놈들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 네가 지키려는 그 아이의 이름이, 네가 잃어버린 그 기억의 조각들이 다 저 장부 속에 있다. 내게 항복해라. 이 계약의 문을 다시 열어라. 그러면…… 모든 것을 돌려주마."
문주의 목소리는 달콤한 유혹의 독주와 같았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과 흑빛의 글자 무더기들이 공중에 떠올라 거대한 회오리를 그리며 두 남매를 에워쌌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너는 누구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기억을 다오. 대가를 치러라. 이름을 바쳐라.
수천, 수만 명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후벼 파듯 울렸다. 무현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흑천월식검의 반작용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자아의 성벽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삿갓 아래로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무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소연의 온기가 단단한 닻처럼 그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소리 마라."
무현의 입에서 낮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문주를 향한 대답이자,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다.
"빚은 죽지 않는다 했다."
무현이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그건 네 녀석이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남의 기억을 빼앗아 배를 불린 찌꺼기들이 뭘 안다고 지껄여."
소연이 그의 말에 호응하듯 입술을 깨물며 검병을 비틀었다.
두 사람의 힘이 합쳐지자, 흑천월식검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영롱한 금빛 섬광이 폭발하듯 뻗어나갔다. 빛과 어둠이 하나로 융합된 기이한 참격, 흑백의 쌍도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청월장의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빚은…… 우리가 돌려받겠다."
휘리릭—!
두 사람이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그것은 두 개의 검이 아니었다. 십 년 전 불타버린 장원의 비전과, 십 년 동안 지옥에서 살아남은 남매의 원한이 엮어낸 단 하나의 거대한 궤적이었다.
빛의 잔상과 어둠의 중력이 소용돌이치며 혁련오를 향해 직진했다.
문주의 눈동자가 공포로 커졌다. 그가 급히 두 손을 모아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붕괴된 육신은 그 거대한 압력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슈우우욱— 콰아아앙!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져 나가는 폭음과 함께, 백색과 흑색의 교차가 혁련오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혁련오가 뻣뻣하게 굳은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스걱.
소리가 나기도 전에, 문주의 오른팔이 어깨 부근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단한 무공으로 다져진 고수의 육신이 두 사람의 합공 앞에 두부처럼 잘려 나간 것이다. 하지만 더 기괴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잘려 나간 문주의 오른팔 절단면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는 대신 찬란하고도 서늘한 금빛 글자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고, 잊혀졌던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금빛 글자들이 밤하늘의 잿더미를 채색하며 기이한 장관을 연출했다.
혁련오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잘린 팔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이…… 이건…… 내 몸이…… 아니……?"
그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시작된 금빛 글자들의 침식이 그의 목을 타고 위로, 얼굴을 타고 눈꺼풀 위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현과 소연은 숨을 고르며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쥔 칼끝에서 은은한 온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검은 달의 그늘 아래, 마침내 빚의 장부가 열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혁련오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억울한 울부짖음과 잊힌 이름들이 뒤섞인 거대한 소음 덩어리였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금빛 글자들은 파도처럼 요동치며 그의 자아를 갉아먹었다.
이름을 빼앗는 자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무현은 그 끔찍한 광경을 담담한 눈으로 응시했다.
손아귀에 전해지는 소연의 체온이 아니었다면, 저 문주와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흑월의 심판대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오라버니."
소연이 낮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전방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둘이서 하나의 칼을 쥔 손에 다시 한번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흑천월식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던 칠흑 같은 어둠과, 소연의 단검에서 피어오른 찬란한 금빛 이름칼의 빛이 서로를 감싸 안듯 융합되었다.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 그리고 빚과 선물.
강호 전체를 뒤흔들던 검은 달의 계약이 비틀린 균열 속에서 조금씩 그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끝내자."
무현의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이 동시에 발을 디뎠다.
쿵!
폐허의 바닥이 갈라지며 일대로 엄청난 풍압이 몰아쳤다.
두 개의 영혼이 하나의 의지로 엮인 참격이 혁련오를 향해 쇄도했다.
더 이상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십 년 전 그 불타는 장원에서 도망쳐야만 했던 아이들의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되찾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콰아아아아궁——!
청월장 본단의 남은 전각마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폭음 속에서, 검은 달의 밤은 깊어 갔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서, 마침내 흑월문의 절대적인 권력이었던 혁련오의 육신이 금빛 글자들 사이로 완전히 부서져 흩어졌다. 흩날리는 파편들 너머로,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칠흑 같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었다.
돌려받아야 할 빚들이, 비로소 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작이었다.
허공에 흩뿌려진 금빛 글자들은 마치 수은처럼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유영했다.
혁련오가 소멸한 자리에는 덩그러니 낡은 장부 한 권만이 남았다. 표지가 없는 칠흑의 가죽으로 묶인 그 물건은 십 년 전 청월장을 집어삼켰던 잿더미의 열기를 고스란히 품은 것처럼 기묘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소연이 숨을 몰아쉬며 칼끝을 떨구었다.
명인(名刃)의 각성이 끝나자, 단검의 금빛은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다시 녹슨 줏대만이 남았다. 하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은 선명했다. 그것은 쇠붙이를 쥔 온기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손바닥이 포개어졌던 묵직한 결속이었다.
무현은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부서진 돌더미를 밟을 때마다 툭툭, 잿가루가 날렸다. 그의 삿갓 밑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 끝을 적셨지만, 더 이상 현기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흑천월식검의 잔여 중력장이 소연의 체온과 섞이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칠흑의 장부를 집어 들었다.
스으윽—
가죽 표면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장부의 첫장이 저절로 팔락이며 넘겨졌다. 그 안에는 정갈하고도 섬뜩한 글씨체로 수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어떤 것은 붉은 핏자국으로, 어떤 것은 마른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이름들.
그중 가장 첫 페이지, 가장 깊고 진하게 파인 글자 하나가 무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무현(徐武賢).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의 기둥 아래서 버려졌던 아이.
그리고 흑월문의 계약서 맨 위에 새겨졌어야 할 최초의 채무자.
그 이름의 밑줄은 잉크가 아니라 마른 피로 그어져 있었다. 무현의 손끝이 그 글자 위로 스쳤다. 순간, 머릿속에서 끊어졌던 기억의 실타래가 거칠게 당겨졌다. 타오르는 붉은 화염, 어린 소연을 업고 달리던 스승 서문 월청의 피투성이 등지느러미, 그리고 검은 달 아래서 가면을 벗던 사형의 눈동자.
“이름은 빚이 아니다, 무현아.”
문득 귓가에 스승의 유령 같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타인이 너를 기억해 주는 유일한 증표이자, 네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가장 완벽한 선물이다.”
"오라버니."
소연이 다가와 무현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장부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고스란히 담겼다. 구름이 걷힌 밤하늘에는 더 이상 붉은 핏빛의 검은 달만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주변을 에워싸듯, 은은하고 청명한 하얀빛의 달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백천월광검의 기운.
아직 배우지 않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설원의 비전이 두 남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현은 장부를 덮었다.
그리고 그 가죽 표면을 칼끝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타앙—!
맑고도 단단한 금속음이 폐허의 밤공기를 가르며 멀리 퍼져 나갔다. 장부가 부서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져 있던 흑월의 인장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얽혀 있던 저주의 사슬이 풀려나는 기이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가자."
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십 년 동안 그들을 섧게 만들었던 빚의 청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겨우 첫 번째 장부를 덮은 것에 불과했다. 무림맹의 깊은 곳, 철면의 가면 뒤에 숨은 자들과 아직 이름 없는 채 쓰러져가는 이들이 기다리는 강호의 진짜 밤이 그들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소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현의 보조를 맞추었다.
두 사람이 청월장의 무너진 정문 대문을 넘어 안개 낀 산길로 걸어 나갈 때,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검은 달의 그늘이 걷히고, 하얀 달이 두 남매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