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용 사이트예요. 댓글·로그인·좋아요는 준비 중이에요.
‹검은 달의 검객 · 14화목차

제14화 재회의 밤

1. 엉킨 소매와 남은 열기

서슬 퍼런 월광(月光)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듯 내리꽂히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석조 기둥 사이로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흩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색채만이 선명하게 도려내어진 듯 붉었다.

그것은 소연의 두 눈동자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선 남자, 십 년 동안 가슴 한구석에 흉터처럼 박혀 있던 망령. 삿갓이 벗겨져 드러난 흉측한 화상 자국과 거친 뺨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으나, 그 비틀린 얼굴 위로 드리워진 눈빛만큼은 열 살의 그날 밤, 잿더미 속에서 자신을 밀어내던 소년의 것과 단 한 조각도 다르지 않았다.

"오라버니……."

목구멍 속에서 짓무른 피맛이 치밀었다. 젖은 목소리가 갈라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소연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듯 아랫니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스스로가 흑월문의 살수로 길러져 수많은 이의 목을 베어올 동안, 언제나 마음 한편에는 버림받았다는 자격지심과 지독한 버림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왜 그날 나만 두고 떠났는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 원망과 그리움이 뒤엉켜 그녀를 칼끝보다 예민한 괴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질문의 정답이 눈앞에 서 있었다.

무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는 자신의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제 소매를 붙잡은 소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연아."

그가 불렀다.

13화의 끝자락,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명병의 잠식에서 그를 끌어냈듯,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자아를 붙잡으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읊조렸다.

소연은 손사래를 치듯, 혹은 더 깊이 옭아매듯 무현의 검은 포백 소매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남은 흙먼지와 핏자국이 그의 옷감에 스며들었다.

"이번엔…… 도망가지 마."

여섯 살 때의 눈물도, 열 살 때의 불길 속 비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강호의 바닥을 구르며 피를 마셔온 살수가 내뱉는 가장 절박한 애원이었다.

무현의 가슴속 깊은 곳, 오랜 세월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쿵 하고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앙—!

두 사람의 발치로 거대한 검기가 폭발하듯 내리꽂혔다. 바닥의 석판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잿더미와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감히 내 앞에서 정회를 나누는가, 이 배신자 놈들."

차가운 살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먼지 장막을 찢고 걸어 나오는 자가 있었다. 혁련오. 흑월문주.

그의 가슴팍은 아까 무현의 검에 베여 흉측하게 찢어져 있었고, 검은 도포 자락은 너덜너덜해졌으나, 그 눈빛만큼은 광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면서도, 손에 쥔 거대한 칠흑 대검을 바닥에 끌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석판이 갈리는 긁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2. 불길이 삼킨 기억

문주의 등장과 함께 무현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단순한 어지러움이 아니었다. 흑천월식검의 힘을 과도하게 끌어쓴 반작용이자, 십 년 전 그날 밤의 기억이 뇌리를 난도질하는 통증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원의 대문.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화염 속에서 들리던 비명.

그리고…… 그 불길을 직접 지폈던 자들의 손길.

"크윽……."

무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빗발치듯 흘러내렸다.

그가 장원을 떠났던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니, 하늘조차 붉은 피를 토해내듯 사방이 붉었다.

양부이자 스승이었던 서문 월청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당에 쓰러져 있었고, 어린 무현은 그 옆에서 칼을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혁련오는 그보다 조금 더 자란 얼굴로, 서늘한 눈빛을 하며 무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었다.

『네가 남아서 이 모든 짐을 짊어져라.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 네 동생이 죽는다.』

그것은 계약이었다.

검은 달의 이름 아래 맺어진 첫 번째 빚.

무현은 스승의 목숨과 어린 소연, 그리고 소한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과거'를 헌납했다. 흑월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서무현이 아니라 단지 칼을 휘두르는 껍데기, 검객일 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혁련오는 그 약속을 배신했다.

장원을 불태우고, 아이들의 기억을 왜곡했으며, 강호를 삼키기 위해 흑월의 계약을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왜……."

무현의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장원을 태웠지, 혁련오."

그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허무와, 그 허무를 뚫고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가 엉겨 있었다.

혁련오가 피식, 피를 토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냐고 물었나? 서무현, 너는 아직도 모르는가. 그 장원은 애초부터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족쇄였다. 스승님은 그 낡은 도덕과 위선으로 우리를 묶어두려 했지. 나는 그저…… 강호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했을 뿐이다."

그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칼을 휘둘렀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멍청하게도 빚을 지고 도망쳤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아느냐?"

혁련오의 눈동자가 기괴한 금빛으로 번뜩였다.

3. 빚의 이름, 칼이 되다

"빚의 이름은 곧 칼이 된다."

혁련오가 고함치며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우웅—!

기이한 공명음이 전당 내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흑월문 본단의 지하 깊은 곳,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빨아들여 봉인해둔 '이름 장부'의 파편들이 지상으로 소환되는 듯했다. 사방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라 혁련오의 칠흑 대검을 감쌌다.

그것은 단순한 내가(內家) 진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 자아, 그리고 존재 자체를 압축하여 연성해낸 저주받은 무공.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 제진(濟盡).

혁련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압은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져 있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계약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낸 120프로의 출력. 그의 피부가 갈라지고 핏줄이 터져나가며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진 그 이름 따위, 내가 전부 삼켜주마!"

쾅—!

혁련오의 발이 대리석 바닥을 박살 내며 폭음과 함께 사출되었다.

그의 대검이 일직선으로 무현의 머리통을 쪼개기 위해 내리꽂혔다.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이 귀를 찢었다.

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에 혁련오의 궤적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너무나도 선명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내 본명은 장원의 재와 함께 내 것이다.’

문주의 그 오만한 선언이 무현의 귓바퀴를 때리고 지나갔다.

아니다.

이름은 타인이 기억하는 한 완전히 먹히지 않는다.

방금 전, 소연이 그를 향해 외쳤던 그 한마디— 서무현 이라는 세 글자가 그의 심장박동과 함께 온몸의 혈관을 타고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무현의 눈동자가 완전한 흑백의 채도를 지우고, 오직 서늘한 금빛 한 점만을 품은 채 번뜩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울었다.

처절할 정도로 맑고,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검명(劍鳴)이었다.

4. 핏빛 심장을 꿰뚫는 일격

챙강—!

거대한 칠흑 대검과 무현의 날렵한 장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충돌 지점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사방의 석조 기둥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지붕의 기와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며 밤하늘의 붉은 달빛이 고스란히 그 난장판 위로 쏟아졌다.

혁련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네놈의 이름은 이미 내 손에……!"

"내 이름은 네가 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현의 입술이 차갑게 벌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저 지하 명부에서 들려오는 저승사자의 고지처럼 낮고 무거웠다.

"스승님이 남긴 빚은 네가 아니라, 내가 끝마친다."

지지직—!

두 검의 맞물림 사이에서 검은 불꽃과 금빛 전기가 격돌했다. 혁련오의 대검을 타고 흐르던 검은 안개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약의 반작용이었다.

혁련오가 흑월문의 금기를 남용하며 타인의 이름을 억지로 착취해온 대가가, 이제 원소의 주인을 찾아 거꾸로 그의 육신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악……!"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무현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혁련오의 어깨를 아귀처럼 움켜쥐었다.

"도망가지 마라."

13화에서 소연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무현은 지금 사형이었던 원수를 향해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검이 혁련오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스으윽— 팟!

백색의 광채와 칠흑의 어둠이 한데 엉긴 궤적이 혁련오의 가슴팍을 정중앙으로 관통했다.

정확히는, 그의 몸속에 심어져 있던 '살진의 심장'— 계약의 힘을 유지하던 핵심 핵(核)을 정확히 조준한 일격이었다.

5. 흩날리는 금빛 글자들

두근-! 두근-!

혁련오의 가슴속에서 들리던 기괴한 심장박동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그것은 생명의 정지이자, 계약의 파국을 알리는 신호였다.

"……."

혁련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향했다. 그의 입에서 쿨록, 하고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그 피 속에는 물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세한 가루들.

강호의 수많은 무인들과 백성들이 흑월문에 바쳤던 기억의 파편,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렸던 '이름'의 잔해들이었다.

화아아아악—!

혁련오의 가슴이 쪼개지며 터져 나온 빛은 밤하늘의 붉은 달빛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흑백 그래픽 노블 위에 뿌려진 금빛 잉크 방울처럼 흩날렸다.

수천, 수만 개의 금빛 글자들이 밤하늘로 비상하듯 흩어졌다.

"이…… 이건……."

혁련오가 떨리는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가 평생 동안 독점하고, 착취하려 했던 '이름 장부'의 본질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 이름은……."

그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더 이상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고, 십 년 전 청월장을 불태우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주었던 광기와 집착 또한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혁련오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대리석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검은 달만 존재하지 않았다.

흩날리는 금빛 글자들 사이로, 아주 희미하지만 선명한 하얀빛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6. 빚은 칼이 되고, 칼은 다시 이름이 된다

"……사형."

무현이 검을 거두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에서 빛나던 흑천월식검의 검신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본래의 스산한 철검의 빛깔로 돌아왔다.

혁련오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더 이상 그곳에는 흑월문의 무자비한 문주도, 강호를 뒤흔들던 괴물도 없었다. 오직 오랜 세월 빚에 짓눌려 살아온 한 명의 불쌍한 파계승만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멈췄다.

폐허가 된 전당 내부에는 무현과, 그 뒤에서 숨을 죽인 채 서 있는 소연만이 남았다.

소연은 천천히 걸어 나와 무현의 등 뒤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그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평온했다.

무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십 년 전, 불길 속에서 서로를 등졌던 남매가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 폐허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확인했다.

무현의 손에서 칼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챙강, 하는 맑은 금속음이 대적의 종언을 알렸다.

빚은 칼이 되었고, 그 칼은 마침내 주인의 손에서 부서져 다시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빚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단단한 선물이었으니.

밤하늘의 검은 구름이 갈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음 화 바로보기 ›
이 작품, 여기까지 어떠셨나요? ★ 별점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