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본명의 밤
수천 개에 달하는 영인비수(嶺刃匕首)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수천 마리의 기괴한 쇠날벌레들이 일제히 날개를 떨어대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에 가까웠다.
지하 동굴의 칠흑 같은 어둠을 갈라발기며 쏟아지는 명부(冥府)의 핏빛 귀화. 그 찬란하고도 잔혹한 살진(殺陣)의 폭풍 한가운데로, 낡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가 검을 비껴쥐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콰드득! 콰아가아앙!
사내가 쥔 흑도(黑刀)가 그리는 검선은 단순한 기운의 궤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공의 빛조차 모조리 삼켜버리는 진득한 먹물 띠와 같았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금기 무공이 자아내는 칠흑의 초승달 참격이 번질 때마다, 사방에서 짓쇄도하던 비수들이 무거운 중력장에 사로잡혀 핏빛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잘게 부러져 떨어졌다.
사내의 어깨와 가슴에서는 끊임없이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흑월문주 혁련오가 쏘아 보내는 독니 같은 단검에 꿰뚫린 상처, 그리고 전신을 잔혹하게 침식해 들어오는 무명병(無名病)의 서릿발 같은 기운이 그의 자아를 갈갈이 찢발기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왜 이 칼을 손에 쥐고 피를 흘리고 있는가.
의식의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혹은 진득한 먹물처럼 지워져 가는 절망의 늪.
그러나 그 모든 기억과 관념이 번져 사라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단 하나의 분노만은 사내의 명치끝에 지독한 불씨로 남아 칼끝을 차갑게 제어하고 있었다.
"헛되고 헛되도다!"
폭풍의 중심에 선 흑월문주 혁련오가 광기 어린 거친 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강하게 쥐어짰다. 공중에서 맴돌던 '살진의 심장'이 붉은 마기를 거칠게 터뜨리며 더욱 사납게 수천 개의 비수를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혁련오의 흉측하게 비틀린 얼굴 위로 잔혹한 비소가 피어올랐다.
"이름조차 지켜내지 못한 껍데기 따위가 감히 흑월의 계약을 청산하겠다고 덤벼드느냐!"
혁련오가 소리치며 거대한 칠흑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기어이 무너져 내리는 암벽 사이로, 동굴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십 년 전의 환영—핏빛으로 젖은 첫 번째 '이름 장부'의 장이 피비린내 나는 바람을 타며 거세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피바람 속에서, 혁련오의 찢어진 입술을 통해 지독하게 아득하고 오래된 단어가 튕겨 나왔다.
"……서무현(徐無顯)!"
그것은 명령이자 주어(呪語)였으며, 십 년 동안 잿더미 속에 묻혀 있던 사내의 진짜 성명이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무현아! 네 이름은 이미 십 년 전 청월장(靑月莊)의 잿더미 속에 바쳐졌다! 네 스승이, 네가 그토록 어버이처럼 섬기던 서문월청이 너를 흑월의 제물로 바쳤단 말이다!"
서무현.
그 이름 석 자가 허공에 흩뿌려진 순간, 사내의 뇌리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번쩍였다.
지워져 가던 기억의 둑이 터지고,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금빛 글자들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청월장의 붉은 기둥, 타들어 가던 서늘한 솔향기, 스승 서문월청의 비통했던 눈빛, 그리고…… 자신이 갓난아기 시절 설원의 무녀 설야의 품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바쳐졌다는 비극적인 연쇄의 싹까지.
"끄아아아악—!"
서무현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단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본명이 강제로 불러일으켜진 충격으로 온몸의 혈도가 역류하며 명구(命口)에서 한 줄기 진혈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렬한 충격의 여파로, 머리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낡은 삿갓의 끈이 탁 소리를 내며 끊어져 나갔다.
스르륵.
부서진 삿갓이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바닥 위로 떨어졌다.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완벽히 드러낸 적 없던 검객의 맨얼굴이, 동굴 천장의 파열된 틈새로 쏟아지는 붉은 달빛 아래 완전히 노출되었다.
그것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처절한 흔적이었다.
오른쪽 뺨에서 시작하여 턱밑과 목줄기, 그리고 가슴팍까지 뱀처럼 얽히고설켜 내려간 참혹한 화상 흉터. 십 년 전 청월장을 삼켰던 그 악마 같은 불꽃이 사내의 살점을 녹이고 가죽을 태워 만든 죽음의 훈장이었다.
검은 먹물 같은 무명병의 기운이 그 비틀린 화상 자국을 따라 핏줄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아……."
바닥에 쓰러져 단검을 쥔 채 피를 토하던 월소연의 눈동자가 극도로 커졌다.
소연은 잘려 나간 숨통을 쥐어짜듯 떨리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왔다. 살수로 길러지며 감정을 죽이고 살아온 그녀의 눈에서, 비로소 인간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오라버니…… 그, 그 얼굴……."
소연의 시선이 사내의 참혹한 화상 흉터에 고정되었다.
십 년 전의 환영이 소연의 뇌리를 세차게 후려쳤다.
불타오르던 청월장의 본당. 무너져 내리는 붉은 대들보 속에서 어린 소연을 감싸 안았던 누군가의 뜨거운 품.
자신의 등을 가로지르는 불덩이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린 소연에게 살아야 한다고, 제발 살아가야 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여 주었던 사람. 타들어 가는 살점의 고통 속에서도 소연의 눈을 가려주며 참아내던 그 서늘하고도 따스했던 체온.
"오라버니…… 무현 오라버니!"
소연의 오열이 동굴 안을 울렸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소연이 기억하고 있던 '오라버니'는 하나가 아니었다.
문주의 거짓말에 속아 붉은 가면을 쓰고 횃불을 들었던 친오빠, 월소한.
그리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자신을 대신해 온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사자(死者)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안고 탈출했던 의오라비, 서무현.
그녀의 순결했던 기억 속에서 '오라버니'라는 단어는 두 개의 비극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친오빠의 죄악과 의오라비의 희생. 소연은 두 오라버니의 피와 눈물 속에서 살아남은 잿더미의 아이였다.
"무현 오라버니……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어요! 나를 감싸 안아주었던 건…… 오라버니였어!"
소연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녀가 부른 '서무현'이라는 본명,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의오라비를 향한 유대.
그 순간, 강호 전체를 지배하던 검은 달의 잔혹한 법칙 하나가 크게 비틀렸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이름이 사라진다. 그러나, 타인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한… 자아는 완벽히 먹히지 않는다.'
서무현의 흩어지던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되돌아왔다.
지워져 가던 칠흑의 어둠 속에서, 소연의 절박한 목소리가 닻이 되어 그의 영혼을 강호의 현실에 단단히 묶어 세운 것이다.
"소연아."
서무현이 낮게 읊조렸다. 화상으로 비틀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가칠거렸으나, 그 어떤 때보다 굳건했다.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구나."
서무현이 천천히 오른손에 쥐어진 흑도를 고쳐 잡았다.
삿갓이 사라진 그의 검은 머리칼이 피바람에 사납게 흩날렸다. 화상 흉터 위로 흑천월식검의 검은 마기와 소연의 기억이 불러일으킨 금빛 명인(名刃)의 기운이 교차하며 기이한 빛의 오로라를 만들어냈다.
혁련오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된다! 내 봉명(封名)의 주술을 풀었다고? 단지 가증스러운 계집애의 부름 따위에 이름을 되찾았단 말이냐!"
"혁련오 사형."
서무현의 입에서 나온 '사형'이라는 단어는 차갑다 못해 동결될 듯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네놈은 십 년 전, 나와 소한이의 손에 횃불과 죄악을 쥐여주고 청월장을 태웠다. 그리고 스승님의 유산과 우리의 이름을 흑월의 달에 제물로 팔아넘겼지."
서무현이 한 걸음 내딛었다.
스아아아—!
그가 발을 디딘 바닥의 암석이 흑천월식검의 중력장에 눌려 가루가 되어 피어올랐다.
"네놈이 개조한 이 흑천월식검은 빛을 삼키는 마공이다. 이름을 먹고 자라는 비극의 칼날이지."
서무현이 흑도를 가로로 뉘었다.
검신에 감돌던 먹물이 흔들리더니, 이내 허공의 빛을 모조리 흡수하며 동굴 전체를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빠뜨리기 시작했다. 혁련오가 조종하던 수천 개의 영인비수마저 서무현이 만들어낸 검은 초승달의 궤적 속으로 힘없이 끌려들어 갔다.
"하지만 알겠느냐? 이 칼이 진짜 삼켜야 할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네놈이 저지른 죄악이라는 것을."
"크윽! 오냐, 오너라 무현아! 이름 따위를 되찾았다 한들, 이미 흑월과 맺은 계약의 장부는 바꿀 수 없다! 네놈의 피로 그 장부를 완성해주마!"
혁련오는 광기에 휩싸여 칠흑 대검을 회전시켰다. 명부대쇄(冥府大鎖)의 핏빛 사슬들이 문주의 몸을 감싸며 수백 개의 비수가 그 거대한 대검 주위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았다.
문주의 전령이 쏟아내는 마기와, 이름을 되찾은 사내의 칠흑 같은 검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쿠쿠쿠궁!
동굴 천장이 무너지며 붉은 달빛이 기둥처럼 꽂혀 내렸다.
그 달빛 아래서, 두 개의 검은 달이 부딪쳤다.
혁련오의 대검이 쏘아내는 폭력적인 혈광.
그리고 서무현의 흑도가 그려내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순수한 월식(月蝕)의 호.
콰아아앙—!
공간 자체가 찢겨 나가는 듯한 음사한 마찰음이 터졌다.
비수들이 부러져 나가며 비산하는 쇠붙이의 파편 속에서, 서무현의 흑도가 혁련오의 대검을 교차하여 깎아 내려갔다.
챙! 쇄애액!
혁련오의 어깨가 베여 나가며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혁련오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문주의 명부 사슬이 서무현의 허벅지와 갈비뼈를 잔인하게 죄어들며 살점을 찢어냈다.
피와 피가 튀는 육박전.
무공의 우열을 넘어선, 십 년 묵은 원한과 빚의 청산이었다.
서무현은 몸이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삿갓 뒤에 숨겨두었던 흉터에 붉은 피가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지만, 그의 흑도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혁련오의 목줄기를 향해 육중하게 밀고 들어갔다.
"이건…… 소한이의 몫이다."
콰직!
"이건 스승님의 몫이다."
스악!
검과 검이 맞물려 짓개어지는 소리 속에서, 혁련오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경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소멸시켰다고 믿었던 사제의 '이름'이, 그 이름에 담긴 십 년 세월의 한이 자신을 압사시키려 하고 있었다. 혁련오가 쥐고 있던 살진의 심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금이 가고, 금빛 피가 흘러나오는 살진의 핵.
그 너머로, 십 년 전의 빚을 기록한 장부의 환영이 두 사람의 혈투 사이에서 핏빛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서무현의 칼끝이 혁련오의 심장 직전까지 도달했을 때, 동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하고 서늘한 또 하나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것은 혁련오의 무공도, 서무현의 검기도 아니었다.
흑월문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진짜 채권자이자, 십 년 전 이 모든 계약을 뒤에서 조종했던 존재의 깊은 숨소리였다.
장부의 페이지가 완전히 뒤집히며, 서무현과 혁련오의 피가 장부 표면에 동시에 흔적을 남겼다.
칼과 칼이 얽힌 채, 두 사형제는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혁련오의 찢어진 눈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서무현의 칼날을 타고 흘렀고, 서무현의 화상 흉터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혁련오의 얼굴을 태웠다.
빚을 받으러 온 자와, 빚을 안긴 자.
그러나 이제 두 사람 모두 깨닫고 있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빚은 단순히 목숨이나 금전 따위가 아니었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서 서로의 이름을 교환했던 순간부터 시작된 이 잔혹한 영혼의 부채.
칼이 서로를 베기 전에, 서로의 피에 젖어든 빚이 먼저 상대방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빛조차 삼켜버린 흑월의 밤.
검객의 완전한 본명(本名)이 붉은 달 아래 선연하게 불려진 그 순간, 빚은 칼보다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다.
파아아앙—!
살진의 심장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잘게 조각나며 허공으로 산산이 비산했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붉은 마기와 칠흑의 검기가 동굴 안쪽의 암벽을 통째로 짓개어 무너뜨렸다.
"크아아악!"
혁련오의 비명이 거친 폭풍 속에서 가느다랗게 찢겨 나갔다.
그의 가슴을 직격한 것은 단순한 쇠칼이 아니었다. 서무현이라는 이름, 십 년 세월 동안 잿더미 속에 짓눌려 있던 사내의 실체이자, 소연의 절박한 부름으로 되살아난 영혼의 무게였다.
큭, 콰앙!
혁련오의 거구는 동굴 벽면에 거칠게 처박히며 검붉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그가 자랑하던 칠흑 대검은 중앙이 길게 파열되어 볼품없는 쇠꼬챙이처럼 바닥을 굴렀다. 흉측하게 비틀려 있던 그의 얼굴 위로 단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던 참담한 패배감과 경악이 교차했다.
"이…… 이것이…… 이름의 무게란 말이냐……? 흑월문주인 내가…… 빚을 내준 채권자인 내가……!"
혁련오는 무너진 돌더미 속에서 핏발 선 눈으로 서무현을 노려보았다.
서무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화상으로 얽어든 온몸의 피부가 찢겨 나가 핏물로 젖어 있었고, 무명병의 침식과 무공의 역류로 인해 검은 기운이 핏줄을 따라 구렁이처럼 번들거렸다. 당장에라도 목숨의 줄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
그러나 삿갓을 벗어 던진 그의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 푸른 도깨비불처럼 서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혁련오."
서무현이 피를 뱉어내며 한 걸음 다가서자, 혁련오는 본능적인 공포에 짓눌려 뒤로 엉금엄금 물러섰다.
"네놈이 내게 안겨준 빚은 목숨이 아니다. 네놈이 불태운 것은 단순한 장원이 아니다."
서무현이 칼날에 맺힌 검붉은 피를 스르륵 털어냈다.
"우리가 누구였는지,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조차 잊게 만든 그 죄…… 그것이 네놈이 갚아야 할 진짜 빚이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피비린내를 뚫고 동굴 천장에서 핏빛 종잇조각들이 내리는 눈발처럼 조용히 날려 떨어졌다.
스스스스.
십 년 동안 닫혀 있던 '첫 번째 이름 장부'가 피에 젖은 채 펼쳐진 환영. 그 장부의 가슴 아픈 첫 장에는 뚜렷한 핏빛 글씨로 두 사람의 성명이 새겨져 있었다.
서무현, 그리고 혁련오.
장부의 글씨가 동굴 안의 어둠을 삼키며 붉게 번뜩였다. 빚은 끝나지 않았다. 혁련오라는 사형을 넘어, 그 뒤에서 강호 전체의 이름을 빚으로 매매하는 흑월의 진정한 채권자—대모(大母) 월하의 거대한 그림자가 붉은 달빛 속에서 유유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소연이 떨리는 손으로 서무현의 피 젖은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서무현은 화상으로 얼룩진 얼굴을 돌려 소연을 내려다보았다. 흉측하게 비틀린 뺨 위로, 십 년 만에 비로소 다정한 한 줄기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괜찮다, 소연아."
그는 아직 가시지 않은 핏빛 어둠을 노려보며 흑도를 굳게 쥐었다.
"이제야 내 이름으로…… 네 곁에 섰으니."
삿갓 뒤에 숨어 있던 검객 서무현의 길고 길었던 무명(無名)의 밤이, 비로소 잔혹하고도 아련한 본명(本名)의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