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사형이라는 칼
어깨를 깊숙이 파고든 핏빛 단검에서 자살적인 오한이 뼛속까지 번져 왔다.
파쇄되어 바스러진 삿갓 조각들이 핏방울 섞인 날카로운 음풍에 쓸려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칠흑 같은 그늘 속에 감춰져 있던 검객의 맨얼굴이 비로소 어둠 밖으로 드러났다. 왼뺨을 기괴하게 가로지르는, 십 년 전 불길이 남긴 참혹한 화상 흉터. 그리고 그 지옥의 흔적 아래에서 차갑고 서늘하게 번득이는 외로운 눈동자.
그러나 검객의 검은 더 이상 사형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가지 못했다.
흑단처럼 매끄럽고 검은 흑도(黑刀)가 공중에서 허탈하고 위태롭게 멈춰 서 있었다. 검 끝에서 일렁이던 검붉은 기운이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사형….'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부른 적 없는,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단어였다.
청월장이 잿더미와 핏빛 비명으로 물들던 그 비극의 밤, 스쳐 지나가는 불길 속에서 비명과 함께 영원히 소멸해 버린 줄로만 알았던 이름. 스승 서문 월청의 첫 번째 제자이자, 검객이 아주 어린 시절 그 듬직한 뒷모습을 이정표 삼아 검을 배웠던 자.
"왜 멈추느냐?"
가면이 산산조각 나 화상 자국과 일그러진 핏줄이 그대로 노출된 혁련오—흑월문주가 입꼬리를 비틀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 깊숙이 파묻힌 단검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비틀자, 검객의 입에서 참지 못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핏방울이 단검의 날을 타고 내려와 바닥의 묵은 먼지 위로 똑, 똑 떨어졌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 못난 사형을 베기 위해 검을 갈아온 것이 아니었더냐? 스승님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미련한 자부심, 청월장의 정통이라는 그 잘난 허울을 끌어안고 구걸하듯 살아온 네놈의 검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이냐?"
"당신이… 정말로 사형이란 말인가?"
검객의 목소리가 젖은 흙처럼 떨려 나왔다. 무명병(無名病)의 침식으로 인해 뇌리를 송곳처럼 찌르던 극통보다, 지금 가슴 한복판을 사정없이 짓밟는 이 절망적인 충격이 훨씬 더 아프고 쓰라렸다.
기억이 잿더미처럼 가뭇해지는 와중에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신형의 궤적과 검식의 운용. 흑월문주의 검식에서 끊임없이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 그것은 온전한 흑월문의 금기 마공이 아니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의 정통 초식에 흑월의 기이하고 잔혹한 마공을 덧씌운, 철저히 비틀리고 변형된 '그날의 검'이었다.
"사형이라는 허울 따위에 연연하지 마라, 미련하고 불쌍한 놈."
혁련오가 낮게 침전된 목소리로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그 눈동자에는 십 년 전 장원을 삼켰던 불길보다 더 깊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청월장의 서문 월청은 제자들에게 빛과 협의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정작 어둠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를 흑월의 제물로 망설임 없이 바쳤다. 내가 그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흑월문에 들어선 것은 한낱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다. 그저 스승이 남긴 그 위선적인 장부의 기록을 내 손으로 완성하기 위함이다."
그때, 저편 바닥의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는 절박한 비명이 동굴의 침묵을 찢고 터져 나왔다.
"속지 마… 오라버니!"
부러진 늑골을 손으로 위태롭게 움켜쥔 채, 월소연이 피로 물든 흙바닥을 서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소연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볼에 묻은 붉은 피와 섞여 턱밑으로 줄기차게 타고 내렸다.
"저 자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마! 십 년 전… 장원에 불을 지르라고 소한 오라버니에게 붉은 횃불을 건넨 자가 바로 저 자야! 저 붉은 가면 속의 일그러진 얼굴을… 내가 똑똑히 보았어! 저 자가 우리 청월장을 태워버린 진짜 진범이다!"
소연의 피 맺힌 절규가 어둡고 음습한 동굴 벽면에 반사되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소연의 기억 속, 십 년 전 청월장이 타오르는 잿더미로 변하던 그 비극의 밤.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던 친오빠 소한의 뒤에서, 어둠처럼 일렁이는 그림자가 소한의 어깨를 조용히 짚고 있었다. 그 악마 같은 그림자가 소한의 귀에 무언가를 소름 끼치게 속삭였고, 소한은 자아를 잃어버린 텅 빈 눈으로 장원의 대전 향해 횃불을 던졌다.
그 그림자의 진짜 주인, 소한을 조종하고 장원을 불바다로 만든 악마가 바로 혁련오였다.
"들었느냐, 무현아?"
혁련오가 자조와 광기가 교차하는 서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잔인한 입에서 검객의 진짜 본명, '무현'이라는 소리가 다시 한번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검객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금빛 글자들이 불에 타오르듯 미친 듯이 자아를 흔들어 놓았다. 무명병의 금제가 풀리며 뇌수가 파열할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어린 소녀의 말이 맞다. 십 년 전, 네놈의 그 다정한 친오형제 소한에게 횃불을 건넨 것도 나였고, 스승의 유서를 가로채 흑월문의 계약을 잔혹하게 집행한 것도 나였다."
혁련오의 굳은 손이 검객의 어깨에서 핏빛 단검을 훠이 거칠게 빼냈다. 핏방울이 허공으로 그어지며 붉은 선을 그렸다. 검객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서자, 혁련오는 기다렸다는 듯 오른손을 허공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웅-웅-웅-!
동굴 전체가 거대하고 불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수천 개의 영인비수가 기이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혁련오의 손바닥 위에서, 칠흑의 어둠과 핏빛의 마기가 어우러진 주먹만 한 기괴한 결정체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것은 바로 수천 비수의 군집 살진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핵심, '살진의 심장(殺陣之心)'이었다.
"네놈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의 손도, 그날 소한에게 불을 건넨 나의 손도… 결국은 단 하나였다."
혁련오의 두 눈에 칠흑 같은 빛과 잔혹한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청월장의 검은 처음부터 빛을 쫓는 순수한 검이 아니었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아래 드리우는 어둠 또한 기괴할 정도로 깊어지는 법. 스승 서문 월청이 평생을 숨기려 했던 진짜 '청월'의 뿌리는 바로 이 흑월에 있었다! 네놈이 사부라 부르던 자가 너를 흑월의 채무자로 바쳤듯이, 나 역시 네놈에게 완벽하게 완성된 어둠을 선사하마!"
살진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불길하게 고동쳤다. 마치 거대한 마수의 살아있는 심장처럼 폭발적인 마기를 내뿜으며, 주변의 공기와 빛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비수진, 영인 사쇄!"
혁련오의 핏빛 손가락이 피를 흘리는 검객의 가슴을 가리켰다.
순식간에 허공을 메우고 있던 수천 개의 비수가 검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시에 쇄도했다. 비수 하나하나가 명부의 귀신처럼 기괴하게 울부짖으며 검객의 온몸을 갈가리 찢발기려 했다. 그 위력은 방금 전의 일반적인 살진과는 차원이 달랐다. 살진의 심장이 직접 동력원이 되어 내뿜는 살기는 공간 자체를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연이 비명을 질렀으나, 부러진 뼈와 끊어진 기혈 때문에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바닥을 긁는 소연의 손가락 끝에서 선혈이 배어 나왔다.
검객은 단단히 땅을 밟았다. 어깨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고 샘솟듯 흐르고 있었고, 삿갓이 날아간 머리칼은 피와 땀으로 뒤엉켜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늘에서 드러난 그의 눈동자만큼은 빙판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사형.
어릴 적 험한 산길에서 자신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리던 자.
자신의 목검이 부러져 울고 있을 때, 밤을 새워 새로 깎은 목검을 건네며 무뚝뚝하게 웃어주던 자.
그 모든 따뜻했던 기억이 완벽한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어둠에 완전히 삼켜진 자의 슬픈 변명에 불과한가?
'질문은… 오직 검으로만 한다.'
검객은 왼손으로 핏빛 단검에 깊게 찢긴 왼쪽 어깨를 지그시 그러안고, 오른손에 쥔 흑도를 고요하고도 묵직하게 들어 올렸다.
스슥.
검객의 발밑에서부터 주변의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중력장이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먹물을 퍼뜨린 듯한 칠흑의 기운이 검신을 진하게 감쌌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그것은 흑월문의 금기 무공이라 불리는 파멸의 기법. 그러나 혁련오의 말대로, 이 검식의 본질은 청월장 최고 비전의 뒤집힌 형태였다. 빛을 내뿜어 상대를 베는 것이 청월이라면, 세상의 모든 빛을 삼켜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월식이었다.
"어리석고 불쌍한 놈! 그 흑천월식검의 진짜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혁련오가 살진의 심장을 내지르며 고함쳤다.
"그 초식은 내가 흑월문에 들어간 뒤, 스승의 비전을 내 손으로 직접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네놈이 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익혀온 마공의 어버이가 바로 나란 말이다!"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칠흑의 초승달 참격과 수천 비수의 핏빛 회오리가 정면으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쿠쿠쿠쿵!
동굴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암석들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충격파만으로 주변의 오래된 촛대와 석조 기둥들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마치 한 편의 흑백 그래픽 노블처럼, 칠흑의 잉크와 핏빛 물감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튀어 오르고 얽혀 들었다. 극명한 하이 콘트라스트의 세계 속에서 붉은 선혈만이 유일한 컬러 포인트처럼 아찔하게 번져갔다.
검객의 흑도와 혁련오의 살진의 심장이 공중에서 직격했다.
쩡----!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검객은 충격파 속에서 똑똑히 보았다. 혁련오가 펼치는 마공의 기혈 운용, 그 기운이 흘러가는 잔인한 궤적. 그것은 검객이 십 년 동안 홀로 어둠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벼려온 바로 그 검식의 '완벽한 원형'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십 년 전의 빚을 갚기 위해 써왔던 흑천월식검.
그 무공의 뿌리가, 자신의 장원을 태우고 소연의 오빠를 조종한 원수—사형 혁련오에게서 나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검객의 뇌리를 철퇴처럼 세차게 내리쳤다.
"크아악!"
검객의 입에서 붉은 핏덩이가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무공의 뿌리가 같다는 것은, 상대의 기운이 자신의 내공을 타고 역류한다는 뜻이었다. 혁련오의 마기가 검객의 혈도를 타고 무자비하게 들어와, 억눌러두었던 무명병의 침식을 폭발적으로 촉진시켰다.
"기억해 내라, 무현아!"
혁련오가 광기 어린 눈으로 검객을 내려다보며 사납게 웃어댔다.
"네놈의 무공도, 네놈의 목숨도, 네놈이 짊어진 그 어둠도 모조리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네놈은 결코 나라는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퍼엉-!
살진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핏빛 폭발이 검객의 가슴을 지근거리에서 후려쳤다.
검객의 신형이 허공을 갈라 비틀거리며 뒤로 튕겨 나갔다. 검객은 바닥의 날카로운 돌멩이 위를 몇 번이나 굴러 동굴 벽면에 세차게 부딪혔다. 손에서 놓쳐진 흑도가 허공을 돌다 암공의 굳은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소연이 피를 토하며 검객을 향해 떨리는 손을 바짝 뻗었다.
검객은 허물어지는 바닥 위에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온통 붉고 검은 환영으로 가득 차올랐다. 머릿속에서 어릴 적 청월장의 평화롭던 풍경이 허무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스승의 인자했던 얼굴이, 소연의 어린 시절 해맑은 웃음이, 그리고 사형과 함께 검을 거두던 해질녘의 풍경이… 먹물에 번지듯 지워져 갔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검을 들었는지조차 아득해지는 감각.
이것이 무명병의 최종 단계였다. 이름이 검은 달에 먹혀버린 자는 자아를 잃고 영혼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검객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핏빛으로 물든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동굴 깊은 곳, 흑월문의 제단 뒤편 어둠 속에서 서늘하고 그윽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그것은 혁련오의 목소리도, 소연의 절박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십 년 전, 검은 달의 계약에 쓰인 열두 권의 '이름 장부'가 울리는 기괴한 소리였다.
『십 년의 빚이 다하였다.』
공기 중에서 금빛 글자들이 불에 타듯 피어올랐다. 그 글자들은 검객의 가슴속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깊게 새겨졌다.
『이름을 바쳐라.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혁련오가 살진의 심장을 쥔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 피투성이 얼굴에 그어진 화상 흉터가 붉은 달빛을 받아 기괴하게 일렁였다.
"바라봐라, 무현아. 이것이 네가 지불해야 할 십 년의 빚이다. 네 이름은 오늘 이 흑월에 완전히 먹힐 것이다."
검객은 바닥에 박힌 흑도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기억이 지워져 가고, 자아가 부서져 가며, 사형이라는 칼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검자루의 감촉만은 여전히 뚜렷했다.
'이름을… 먹힌다 해도….'
검객의 입술이 경련했다. 지워져 가는 자아의 절벽 끝에서, 십 년 전 청월장을 가득 채웠던 잿더미의 냄새와 소연의 피 냄새가 그를 다잡았다.
장원을 불태운 진짜 원수.
자신의 무공을 어둠으로 물들인 사형.
그리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움켜쥐고 있는 흑월의 계약.
검객의 지워져 가던 눈동자에, 칠흑보다 깊은 어둠과 금빛의 불꽃이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십 년 동안 지불해 온 빚의 정체가, 마침내 그의 빼앗긴 본명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검자루를 쥐어잡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뼈가 드러날 듯 힘이 들어갔다.
"크윽…!"
뇌수를 휘젓는 극통 속에서, 무현의 시야는 온통 핏빛으로 일렁였다. 어릴 적 스승의 따스했던 손길도, 청월장의 매화 향기도 이미 잿더미처럼 바스러져 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형이라 불렀던 자의 잔혹한 미소만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 유일한 현실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자아가 사그라드는 그 절망의 가파른 벼랑 끝에서 단 하나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손에 쥔 흑도의 무게감, 그리고 손바닥을 적시는 소연의 피와 자신의 피가 어우러진 뜨거운 온기였다.
'타인이 나를 기억하는 한… 나는 완벽히 먹히지 않는다.'
그것은 흑월의 계약이 가진 허점이자, 무명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뼛조각이었다.
"소연아…."
검객의 갈라진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삿갓이 파쇄되어 드러난 그의 눈에서 칠흑의 마기와 금빛 불꽃이 사납게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안 돼, 검을 놓지 마!"
소연이 부러진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어내리며 울부짖었다. 그 절박한 음성이 검객의 허물어져 가던 자아의 둑을 찰나 동안 굳건히 메웠다. 자신을 '오라버니'라 불러주는 유일한 생존자. 그 아이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한, 자신의 존재는 결코 흑월문주의 손에 완벽히 상쇄될 수 없었다.
혁련오의 눈살이 차갑게 찌푸려졌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느냐. 네놈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십 년 전에 작성된 장부의 채무는 바꾸지 못한다."
혁련오가 살진의 심장을 검객의 가슴을 향해 바짝 내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금빛 글자들이 일시에 핏빛으로 물들며 거대한 문자 사슬이 되어 검객의 사지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봉명(封名)의 기운. 이름을 얽매어 장부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흑월문의 궁극적인 금제였다.
스스스스—!
검객의 피부 표면에 문자 모양의 검은 흉터들이 핏줄처럼 솟아올랐다. 그 문자들이 기어오를 때마다 검객의 호흡이 가빠지고, 눈동자의 아득함이 더욱 깊어져 갔다.
"네 스승 서문 월청은 너를 무명(無名)의 제물로 바쳐 청월장의 안녕을 도모하려 했다."
혁련오가 잔인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나 혁련오는 그 계약을 완성하여 강호 전체의 이름을 흑월에 바칠 것이다. 너는 그 첫 번째 열쇠다, 무현아. 네 이름이 완전히 먹히는 순간, 십 년 전 청월장에 걸려 있던 마지막 쇄전(鎖錢)이 풀어질 것이다!"
"닥쳐라…!"
검객이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려 턱밑을 적셨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기세로 바닥에 짚었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는 몸체였으나,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만큼은 동굴 전체의 암공을 가를 듯 푸르스름하고도 차가운 어둠을 뿜어냈다.
"내 이름이… 빚이라 했느냐."
검객이 흑도를 똑바로 겨누었다.
파쇄된 삿갓 너머로 드러난 그의 맨얼굴은, 십 년 전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귀신의 그것이었다. 왼뺨의 화상 흉터가 금빛 글자와 붉은 피에 젖어 기괴한 도형처럼 번뜩였다.
"스승이 바쳤든, 네놈이 빼앗았든… 상관없다."
검객의 검끝이 혁련오의 목덜미를 직지했다.
"이 이름이 빚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숨으로 그 빚을 청산하마."
쿵-!
동굴 바닥이 갈라지며 검객의 신형이 칠흑의 잔상을 남기고 쏘아졌다. 무공의 뿌리가 사형에게서 비롯되었다면, 그 뿌리를 잘라내는 것 또한 이 검이어야 했다.
혁련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일렁였다. 무명병의 침식과 살진의 심장이 내뿜는 압도적인 압력 속에서, 어떻게 저런 검기가 솟구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기 이름을 갉아먹으며 벼린 검 따위가 살진의 심장을 깰 수 있을 줄 아느냐!"
혁련오가 광규를 지르며 살진의 심장을 터뜨렸다. 수천 개의 영인비수가 핏빛 유성우가 되어 검객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둠과 빛, 핏빛 비수와 칠흑의 참격이 다시 한번 미친 듯이 얽혀드는 순간.
흑월문의 깊은 어둠 속에서, 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첫 번째 장부'의 페이지가 피에 젖어 소리 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십 년의 빚이, 마침내 감춰져 있던 검객의 진짜 이름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