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영인비수진(影刃匕首陣)
1. 쇄도하는 칠흑의 군집
부서져 나간 흑철 대문의 잔해가 아직 식지 않은 잿더미 위로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외눈 문지기의 육신은 그가 휘두르던 명부혈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증발했으나,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묵즙을 들이부은 듯한 칠흑의 참격 흔적만이 깊게 패어 조금 전의 참극을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빗물은 이미 멎었으나 밤바람은 쇠비린내와 타버린 유황 냄새를 머금은 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대문을 무너뜨린 뒤 찾아온 적막은 찰나에 불과했다.
쉬이이익―!
흑월문 본단의 광활한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차가운 바람결 사이에 고막을 긁어대는 기괴한 마찰음이 섞여 들었다. 바닥에 어지럽게 뒹굴던 굵은 자갈들이 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중력의 끈을 놓친 것처럼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허공이 뒤틀린 것은 검객이 남긴 흑천월식검의 여파 때문만이 아니었다.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핏빛 보름달이 흉흉한 적광을 쏟아붓는 순간, 연무장 바닥의 짙은 음영과 누각 처마 밑의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서슬 퍼런 칼날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검은 손잡이에 날렵한 반월형 칼날을 지닌 암기. 흑월의 살인 병기, 영인비수(影刃匕首)였다.
열 개나 백 개 수준이 아니었다. 수천 자루에 달하는 비수가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매달린 것처럼 공중에 정렬하여 섬뜩한 금속성을 울리며 일제히 자전(自轉)하기 시작했다. 칼날들이 빚어내는 살벌한 기류는 삿갓을 깊게 눌러쓴 검객, 그리고 그의 뒤에서 밭은 숨을 몰아쉬는 어린 소녀의 숨통을 남김없이 정조준하고 있었다.
본단 깊숙한 암영 속에 숨죽인 수십 명의 살수들이 토해내는 살기였다. 흑월문이 자랑하는 천라지망의 절진이자, 일단 펼쳐지면 파리 한 마리조차 형체를 보존하지 못한 채 고깃덩이가 되어 나간다는 영인비수진(影刃匕首陣)이 마침내 그 흉폭한 아가리를 벌린 것이다.
"……크륵."
월소연이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들숨을 쉴 때마다 부러진 뼈마디가 폐부를 짓이기는 듯한 격통이 온몸의 신경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십 년 전 그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살아남아 흑월문의 살수로 길러졌던 그녀였기에, 눈앞에 펼쳐진 살진의 흉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비수들은 결코 단순한 강철 조각이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 기생하며 인간의 혈기를 빨아들이고, 공간의 음영을 타고 파고들어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주술적 살인 귀영(鬼影)이었다.
"오라버니…… 피해야……!"
소연의 찢어진 입술 틈으로 거친 경고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허공을 까맣게 뒤덮고 있던 비수의 군집이 폭발하듯 쇄도했다.
쿠구구구궁!
그것은 칼날의 비라기보다는 거대한 칠흑의 해일이었다. 수천 개의 칼날이 바람을 찢어발기며 토해내는 파공음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아귀들이 한꺼번에 질러대는 날카로운 비명 같았다. 지면이 굉음과 함께 갈라져 나갔고, 흩날리던 흙먼지와 돌가루마저 허공에서 잘게 분쇄되며 사방의 공기 전체가 날카로운 흉폭성을 머금고 밀려들었다.
피할 방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하좌우는 물론이고 발밑의 그림자까지, 모든 공간이 검은 비수의 폭풍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현은 삿갓을 들어 올리지조차 않았다. 그저 손에 쥔 녹슨 철검의 끝을 비스듬히 지면으로 떨구었을 뿐이었다.
달빛이 그의 흉터투성이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을 창백하게 비추어 냈다.
2. 찌그러지는 공간, 침묵의 보법
검객의 낡은 짚신이 진흙탕을 밟았다.
쩌적―!
발이 닿은 순간 지면을 타고 사방으로 번져 나간 것은 통상적인 경력(勁力)의 충격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빛과 소리를 남김없이 집어삼키는 심연의 어둠, 칠흑의 중력장이었다. 검객의 발밑에서부터 원형으로 퍼져 나간 먹물 같은 파문이 반경 장여의 공간을 송두리째 비틀어 버렸다.
콰아아앙!
선두에서 맹렬한 회전력을 품고 쏘아져 들어오던 수백 자루의 비수가 검객의 신형 전방 세 척 거리에서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허공에 박힌 채 부들부들 떨리던 칼날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맷돌 속에 처넣어진 것처럼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끼기긱, 쨍그랑!
강철이 뒤틀리고 부러지는 처절한 마찰음과 함께, 예리했던 비수들이 한 덩어리의 고철로 뭉개지며 바닥으로 맥없이 추락했다. 검객이 전개한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중력장이 주변 대기의 밀도를 수십 배로 응축시켜, 쇄도하던 살진의 궤도를 원초적인 힘으로 짓이겨 버린 까닭이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어둠 속 누각 처마 밑, 진법을 제어하던 흑월문 살수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일개 무인이 지닌 내력으로 빚어낼 수 있는 방어의 영역이 아니었다. 물질의 형체를 일그러뜨리고 삼라만상의 섭리를 거스르는 금기의 권능, 검은 달의 힘 그 자체였다.
무현은 멈추지 않았다.
터벅.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비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져 흩날렸다. 칠흑의 중력장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암흑의 장막처럼 검객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칼날의 폭풍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으나, 그 어떤 비수도 그의 낡은 도포 자락과 삿갓 깃을 스치지 못했다.
비수들이 검객의 기운에 빨려 들어가 분쇄될 때마다 먹빛 쇳가루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 짙은 쇳가루 안개를 가르며, 검객은 오직 직선으로 전진했다. 십 년 동안 묵혀두었던 걸음이었다. 그 무거운 보폭에는 단 한 치의 주저함도, 공포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베어 넘겨야 할 표적만을 응시하는 냉혹한 집념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인비수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 자루가 부서져 나가면 허공의 암영 속에서 이백 자루가 새로이 솟구쳐 올랐다. 살수들은 검객의 막강한 기세에 간담이 서늘해지면서도, 본능적인 공포를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력을 쥐어짜 비수를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죽여라! 기세가 꺾이기 전에 모조리 짓눌러라!"
허공을 찢는 살수장의 갈라진 호통과 함께, 찌그러진 비수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한층 더 흉포한 기운을 머금은 비수 떼가 검객의 사각(死角)을 향해 빗발쳤다. 검객의 정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힘겹게 따르고 있는 상처투성이 소녀, 월소연을 노린 비열한 살초였다.
3. 허공을 찢는 비명과 불꽃
키기기긱―!
적색 보름달의 빛과 흑요석 같은 중력장이 충돌하며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단순히 귀를 울리는 굉음이 아니었다. 고막을 진공 속에 처넣고 뒤흔드는 것 같은 침묵의 파열음이었으며, 공간의 결이 갈기갈기 찢기며 먹물 같은 잔상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비수가 중력장의 경계면에 닿아 튕겨 나갈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핏빛 불꽃이 사방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크윽……!"
소연은 밀려오는 기압의 여파에 숨을 헐떡였다. 무현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음에도, 흑천월식검이 뿜어내는 절대적인 암흑의 기운은 내상을 입은 어린 육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비린 피가 목구멍까지 울컥 차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찰나였다.
쐐애애액!
중력장의 틈을 기형적인 궤적으로 우회한 세 자루의 비수가 소연의 관자놀이와 심장, 그리고 무릎을 향해 사납게 파고들었다. 검객의 방어망을 뚫었다기보다는, 살진의 술자가 소연의 목숨을 미끼로 삼아 검객의 검로를 강제로 흩어놓으려 한 잔학한 노림수였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검객의 검이 뒤로 돌아선다면 전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비수의 해일을 받아내지 못할 터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소연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짐이 될 수는 없어. 절대로.'
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찔러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손에 쥔 한 자루 흑단검을 결코 놓지 않았다. 십 년 전 불타오르던 청월장의 잿더미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열하기만 했던 무력한 아이는 이미 죽었다. 흑월문의 밑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것은 오직 진실을 밝히고 복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스르릉.
소연의 가느다란 손목이 마치 뱀처럼 유려하게 뒤틀렸다.
채애앵! 챙!
단검의 좁은 칼날이 기적처럼 두 자루의 비수를 허공에서 정확히 쳐냈다. 허공에 번뜩이는 불꽃 속에서 소연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마지막 한 자루, 무릎을 노리고 날아들던 비수는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옷자락을 찢으며 허벅지 살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촤악!
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튀었다. 그러나 소연은 억 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핏방울이 바닥을 적시기도 전에, 그녀는 무릎을 꺾는 대신 오히려 지면을 박차며 무현의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소연의 거친 숨결이 무현의 등허리에 닿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피비린내가 묻어났지만, 그 안에 깃든 의지는 검객이 손에 쥔 녹슨 검날만큼이나 서슬 퍼렇게 벼려져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 너머로, 묵직한 삿갓 아래 감춰져 있던 검객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요동쳤다.
4. 등을 맞댄 두 사람
소연은 피가 배어 나오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쥐었다. 갈비뼈의 골절로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후비는 듯했으나, 그녀의 칠흑 같은 두 눈은 사방의 어둠을 맹수처럼 훑어내고 있었다.
"뒤는 내가 봐. 오라버니는…… 앞만 봐."
십 년 전, 붉은 불길이 밤하늘을 집어삼켰던 청월장의 그날 밤.
복면을 쓴 괴한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녀의 친오빠 소한은 어린 소연의 손을 움켜쥐고 불타는 회랑을 내달렸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스승의 곁에서 묵묵히 칼을 갈며 남매의 뒤를 우직하게 지켜주었던 과묵하고 다정했던 의오라비가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비록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고, 온몸에 화상 흉터를 두른 채 검은 달의 마도(魔道)에 가까운 괴력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소연의 직관은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몸이 기억하는 체향, 등을 맞댈 때마다 전해져 오는 저 거대하고도 시린 고독의 무게.
소연은 검객의 등 뒤에 자신의 작은 등을 단단히 밀착시켰다. 해진 천 옷 너머로 검객의 넓고 차가운 등줄기가 전해졌다.
무현의 철검이 낮게 울음을 토해냈다.
징― 하는 묵직한 공명이 소연의 등뼈를 타고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그녀의 부러진 뼈마디와 찢겨 나간 살점을 억눌러 주는 서늘한 붕대처럼, 검객의 진기가 소연의 내장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물러서지 마라."
무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천 길 낭떠러지 밑의 바위처럼 무겁고 거칠었다.
"응."
소연이 짧게 답하며 단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호흡이 완벽한 하나로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한 명은 갈비뼈가 부러진 채 피를 흘리는 살수였고, 한 명은 자신의 이름조차 잃어가며 검은 계약에 묶인 저주받은 검객이었으나, 등을 맞댄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세는 수천 자루의 비수진 전체를 짓누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방에서 쏘아져 들어오던 비수들이 검객의 중력장에 휘말려 허공에서 뒤틀리고 멈춰 서면, 소연의 날렵한 단검이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잔챙이 비수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쳐냈다. 챙! 챙! 채애앵! 맑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연무장의 밤공기를 찢어발겼다.
검객의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다. 등을 맞댄 채, 두 사람은 핏빛 안개가 짙게 깔린 연무장 중앙 누각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비수진이 쳐놓은 칠흑의 장벽이 그들의 거침없는 전진 앞에 맥없이 찢겨 나가며 고철 부스러기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때였다.
5. 붉은 안개 속의 음성
싸아아아―
돌연 연무장 전체를 집어삼킬 듯 포효하던 비수들의 굉음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허공을 맴돌며 살기를 뿜어내던 수천 개의 칼날들이 일제히 회전을 멈추고 허공에 정지하더니,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핏빛 안개 속으로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거대한 절대 포식자의 숨결을 느끼고 일제히 숨을 죽인 풀벌레들처럼, 살진 전체가 기이할 정도로 서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연무장 바닥의 갈라진 틈새마다 끈적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피비린내와 짙은 유황 냄새가 뒤섞인, 검은 달의 계약이 토해내는 독기였다.
그리고 그 붉은 안개 너머, 본단 가장 높은 누각 난간 위에서 한 줄기 나직하고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장하구나."
그것은 단순히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귓바퀴를 타고 파고들어 뇌수를 날카로운 바늘로 긁어내리는 듯한, 기형적으로 맑으면서도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음파 속에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십 년 전, 타오르던 장원의 불꽃 속으로 완전히 타 죽은 줄 알았던 불씨가…… 기어이 살아남아 이곳까지 기어와 내 턱밑을 겨누었단 말인가."
붉은 안개가 서서히 갈라지며 누각의 웅장한 윤곽이 드러났다. 누각 처마 끝, 검은 비단 장포를 걸친 자가 난간에 오만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핏빛 달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은 깊은 어둠에 가려져 뚜렷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 음영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안광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눈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월문주(黑月門主).
과거 청월장의 수석 제자이자 무현의 사형이었으며, 장주 자리에 눈이 멀어 스승과 사제들을 검은 달의 제물로 팔아넘긴 배신자. 혁련오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연무장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십 년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들었다."
문주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롱과 비틀린 감탄, 그리고 깊은 경멸이 뒤엉켜 있었다.
"그 미련하고 질긴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하지만 사제야, 그 빚이라는 것의 진짜 정체를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이곳 본단에 발을 들이고 그 저주받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너는 이미 네가 누구인지조차 까맣게 잊어가고 있지 않더냐."
문주가 난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검은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붉은 안개 속에 숨죽이고 있던 수백 자루의 영인비수가 다시금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일제히 곤두섰다. 이번의 비수들은 이전의 것들과는 격이 달랐다. 말단 살수들의 내력이 아닌, 검은 달의 사악한 주술과 문주 자신의 흉포한 마기가 직접 깃든 핏빛 흉기들이었다.
"헛된 원한은 오늘 밤 여기서 끝내 주마. 십 년 전 타오르던 잿더미 속에서 끝났어야 할 네 명줄을,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거두어 주겠다."
문주의 선언과 함께 누각 주변의 대기가 천 근의 무게로 내려앉았다. 그의 손가락 까딱임 하나에 허공의 핏빛 비수들이 살점을 갈구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6. 다정한 기만, 살진의 심장
그러나 무현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든 것은 문주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살기 따위가 아니었다.
문주가 난간 앞으로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그 서슬 퍼런 살기 사이로, 문주의 음색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오만하고 잔혹했던 마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엾은 것."
그 음성은 지극히 부드러웠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하며, 흡사 어린 제자가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 그 등을 조용히 다독여 주던 옛 스승의 음성을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그 무거운 칼을 쥐고, 그 흉측한 상처를 온몸에 새긴 채…… 얼마나 고통스럽게 헤맸느냐. 나의 착한 아이야."
"……!"
소연의 전신이 감전된 듯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기억 깊은 곳, 어린 시절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수염을 쓰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여 주던 아버지, 청월장주 서문 월청의 목소리와 완벽히 일치했다. 음색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맺을 때 가늘게 떨리는 호흡, 음절의 끝자락을 길게 늘어뜨리는 특유의 버릇까지 살아 있는 아버지가 눈앞에 서서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문주는 죽은 스승의 목소리를 빌려, 마치 자신이 스승이라도 된 양 검객을 조롱하고 있었다. 사형으로서 사제를 철저히 기만하고, 스승을 도륙하여 제물로 바친 패륜의 괴물이 이제는 죽은 자의 영혼까지 모독하며 위선의 혀를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무거운 검을 내려놓아라. 네가 짊어진 그 칼은, 네 이름조차 갉아먹는 끔찍한 독약일 뿐이다. 내 품으로 오너라. 내가 널 편안히 잠재워 주마."
다정한 음성과는 정반대로, 문주의 등 뒤에서 피어오른 붉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이형의 괴물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것은 살아 있는 거인의 심장 박동 소리였다. 연무장 바닥의 거대한 판석들이 그 박자에 맞추어 지진이라도 난 듯 튀어 올랐다.
안개가 걷히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은 흩어져 있던 수천, 수만 자루의 비수들이 하나로 뭉쳐져 거대하게 응축된 강철의 구체(球體)였다. 수많은 칼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는 살육의 거대한 심장.
영인비수진의 진정한 핵이자 본체, '살진의 심장'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박동할 때마다 붉은 검기(劍氣)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폭사하며 연무장의 바닥을 무참하게 갈아엎었다. 그 압도적인 파괴의 파동 앞에 소연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살진의 심장은 하늘을 뒤덮은 채, 피할 수 없는 파멸의 무게감으로 두 사람의 머리 위를 향해 서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사제야."
문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죽은 스승의 기만적인 다정함을 품고 허공에 울려 퍼졌다.
"네 마지막 숨을…… 이 사형에게 바치거라."
무현의 삿갓 아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비틀리며 가느다란 파열음을 냈다.
십 년 전, 불타오르던 청월장의 그날 밤. 화염 속에서 들려왔던 사형의 잔혹한 거짓말, 그리고 피를 토하며 자신을 바라보던 양부이자 스승의 마지막 눈빛이 지워져 가던 그의 머릿속을 벼락처럼 내리쳤다.
스르릉―!
검객의 손에 쥐인 녹슨 철검이 칠흑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빛을 거부하는 가장 깊은 심연의 어둠이 검날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것은 장부를 찢고 검은 달의 굴레를 부수기 위해 존재하는 자의 진정한 살기였다.
살진의 심장이, 수만 개의 칼날을 회전시키며 거대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