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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6화목차

제6화 횃불을 든 자

1. 부정(否定)

깨어진 붉은 칠기 조각들이 장대비에 젖은 진흙 바닥 위로 산산이 흩어졌다.

도자기 파편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가면의 균열 사이로 마침내 한 사내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십 년의 모진 세월 동안 거친 비바람과 비린 피비린내 속에서도 결코 바래지 않은, 소연의 유년 한구석에 깊은 낙인처럼 박혀 있던 이목구비였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채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 그리고 오른쪽 눈썹 끝을 비스듬히 파고든 작은 화흔(火痕). 유년 시절, 청월장의 뒷산 대숲에서 빗방울을 가르며 목검을 휘두르다 제 미숙한 검 끝에 스쳐 남았던 그 상처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소연의 손아귀에서 물빛을 뿜어내던 단검이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툭.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진흙탕에 처박힌 차가운 쇳조각 위로, 소녀의 거칠고 파리한 숨결이 하얗게 엉겨 붙었다.

“오라버니……?”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온 목소리는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기보다, 피에 젖은 비단을 바늘로 후벼 파는 듯한 애절한 비명에 가까웠다. 부러진 늑골의 뼛조각이 폐포를 찌르는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져 나갔으나, 소연은 제 몸의 상흔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소녀는 진흙과 핏물이 흉측하게 뒤엉킨 땅바닥을 열 손가락이 뒤집히도록 긁으며 기어갔다.

십 년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던 청월장의 누각,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던 서까래와 대들보 사이에서 자신을 장독대 뒤편 비밀 수로로 거칠게 밀어 넣으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소리치던 그 소년.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아가리 속에서 뼈와 살이 모두 재가 되어 밤바람에 흩어졌다고만 믿었던, 피를 나눈 친오라비였다.

그러나 진흙탕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부러져 나간 흑철 대검의 자루를 여전히 틀어쥐고 있던 사내—월소한의 두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은 흑요석과 다름없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붉은 파편이 떨어져 나간 뺨 위로 튄 검붉은 핏방울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먹물 같은 빗물이 한데 섞여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두 눈동자 깊은 곳에는 살아남은 혈육을 마주한 안도감도, 십 년 만의 기적 같은 해후에 대한 전율도 없었다. 오직 빛조차 삼켜 버리는 검은 달의 흉흉한 잔영과, 모든 기억과 감정이 남김없이 긁혀 나간 자리에 도사린 텅 빈 허무의 공동(空洞)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야? 살아 있었던 거야……? 나를 봐, 소연이야…….”

소연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사내의 피 묻은 바짓자락에 닿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파창!

사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흑색 살기가 폭풍처럼 사방의 빗줄기를 찢어발기며 터져 나왔다. 소연의 손끝이 옷깃에 닿기도 전에, 흉포한 내력이 실린 묵직한 진각(震脚)이 땅을 박차며 사나운 흙탕물 폭포를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천박한 주둥이를 닥쳐라.”

사내의 입술 틈새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탁했다. 마치 쇳가루를 갈아 넣은 독주처럼 바싹 마르고 살을 에는 음성이었다.

“누굴더러 오라비라 부르는 것이냐.”

소연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허공으로 뻗었던 손가락마디가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경련했다.

“오라…… 버니?”

“나는 네년 따위를 알지 못한다.”

월소한은 피와 흙탕물로 얼룩진 뺨을 거친 소맷자락으로 난폭하게 닦아 내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신형은 부러진 대검의 무게중심을 잃고 미세하게 휘청거렸으나, 전신을 감싼 기세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음산하고 지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게 혈육 따위는 없다. 장원의 피붙이 따위는 십 년 전 그 지옥불 속에서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타 죽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날 봐, 소연이잖아! 어릴 적 오라버니가 아끼던 그 옥패 노리개, 대숲에 숨겨 두었던 목검, 그리고 날 지켜 주겠다고 약조했던 그 밤을…… 다 잊은 거야?”

“입 닥치라고 했다.”

소한의 두 눈에 흉포한 핏발이 곤두섰다. 그 서슬 퍼런 눈빛은 단순한 외면이나 배척이 아니었다. 마치 ‘소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의 혈관이 거꾸로 뒤틀리고 살갗 아래 잠들어 있던 검은 멍에가 뼈마디를 파먹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거부 반응이었다. 검은 달과 맺은 금기의 계약이, 그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과거의 기억과 이름을 잔혹하게 긁어내고 있는 탓이었다.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계약의 저주로 인해 기억해서는 안 되기에, 스스로 기억의 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어 놓은 괴물에 불과했다.

2. 살수의 칼

스릉!

소한의 허리춤에서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두 자루의 보조 쾌검이 일제히 뽑혀 나왔다. 흑월문의 그림자 살수들이 애용하는 역치형(逆齒形) 단검이었다. 날카로운 톱니가 돋아난 검신을 따라 칠흑빛 마기(魔氣)가 푸른 독기와 함께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흑월문의 법도를 거스르고 금단의 장부를 탐낸 배신자, 그리고 본단의 금기 무공을 훔쳐 쓴 불경한 침입자.”

소한의 메마른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소연을 차갑게 지나쳐, 어둠 속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삿갓 사내에게 가닿았다.

“이곳에 장원의 망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직 베어 없애야 할 두 놈의 표적뿐이다.”

쉬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한의 신형이 암연(暗煙)처럼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흑월문의 은밀한 보법, 연월보(煙月步). 바닥에 웅덩이진 빗물조차 튀기지 않는 극상의 잠행 술수였다. 빗줄기 사이를 미끄러지듯 파고든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세 겹의 잔상으로 갈라지며 삿갓 사내와 바닥의 소연을 동시에 노렸다. 왼손의 쾌검은 삿갓 사내의 미간과 목덜미를 꿰뚫으려 번개처럼 쏘아져 들어갔고, 오른손의 검은 무방비하게 널브러진 소연의 정수리를 향해 일말의 자비도 없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자신의 친동생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도살하려는 잔혹한 살수(殺手)의 일격.

“오라버니……!”

소연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허공을 가르고 낙하하는 시퍼런 칼날보다, 자신을 벌레처럼 내려다보는 오라비의 텅 빈 눈동자가 소녀의 심장을 먼저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저 칼날에 가슴이 꿰뚫려 죽는 것이 이 지옥 같은 악몽을 끝내는 길이라 여긴 듯, 소연의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챙!

그러나 소녀의 정수리를 쪼개려던 쾌검은 끝내 여린 살갗에 닿지 못했다.

어둠과 빗줄기를 가르고 불쑥 끼어든 검은 검집이 허공에서 소한의 칼날을 자비 없이 맞받아쳤다. 쇠와 쇠가 맹렬히 부딪치며 사방으로 뿜어낸 백열의 불꽃이 빗물 속에서 번쩍이며 소연의 젖은 얼굴을 비추었다.

“물러서라.”

삿갓 사내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빗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기민한 움직임으로 소연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오직 흑단목 검집 하나만으로 소한의 양손 검을 옥죄며 허공으로 거칠게 튕겨 내고 있었다.

쾅!

검집과 칼날이 짓이겨지듯 맞물린 중심에서 묵직한 진각의 파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지표면의 진흙물이 원형으로 솟구치며 소한의 신형이 세 걸음 뒤로 거칠게 밀려났다. 그 찰나의 순간, 삿갓 사내의 앞발이 반보(半步) 전진하며 소한의 비어 있는 명치를 파고들 수 있는 절호의 사각(死角)이 열렸다. 만약 사내가 검을 한 치라도 뽑아 휘둘렀다면, 소한의 목은 이미 숨을 멎은 채 진흙 바닥을 굴렀을 터였다.

3. 베지 않는 검

하지만 삿갓 사내는 칼을 뽑지 않았다.

묵직한 파열음을 토해 내며 굳건히 제자리를 지킨 사내의 손에는 그저 칠흑빛 검집만이 비스듬히 들려 있을 뿐이었다. 비에 젖은 삿갓 처마 밑으로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거친 살기 대신, 형언할 수 없는 짙은 비애와 억눌린 고통이 무겁게 침전되어 있었다.

“……월소한.”

삿갓 사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이름.

그것은 십 년 전, 청월장의 드넓은 연무장에서 수천 번도 넘게 서로의 목검을 부딪치며 땀을 흘렸던 그 소년의 이름이었다. 장원의 대제자였던 사형 혁련오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언제나 무뚝뚝하지만 올곧은 눈빛으로 ‘너는 장주의 양자이기 전에 내 하나뿐인 아우다’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던 장원의 맏배.

소한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그 이름을…… 네놈의 그 더러운 주둥이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어째서냐.”

사내의 음성은 차가운 빗물보다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센 빗방울이 사내의 삿갓을 때리고 어깨를 흠뻑 적시며 떨어져 내렸으나, 흑단목 검집을 틀어쥔 손은 한 치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네가 흑월문의 사냥개가 되어 있는 것이냐. 어째서 네가 네 피붙이 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냐.”

“시끄럽다!”

소한이 다시금 폭호처럼 몸을 쏘아보냈다. 양손에 쥔 역치형 쾌검이 허공에 흉포한 빗살무늬 참격을 아로새기며 삿갓 사내의 상단과 중단, 하단의 요혈을 맹렬하게 유린해 들어갔다.

채채채챙!

사위가 먹물을 흩뿌린 듯 캄캄한 숲길 한복판에서, 오직 두 사람의 병기가 맞부딪치며 토해 내는 은백색 섬광만이 쉼 없이 명멸했다.

소한의 검로는 본래 정통 청월장의 월영검법(月影劍法)을 뼈대로 삼고 있었으나, 초식의 마디와 마디 사이마다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리기 위한 흑월문의 변칙적인 살초가 흉측한 독버섯처럼 덧대어져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뿌리를 난도질하여 마기의 피를 빨아먹는 파문(破門)의 검이자 저주의 칼질이었다.

사내는 베지 않았다.

사내는 끝끝내 칼을 뽑지 않았고, 빈틈이 보여도 살수를 찔러 넣지 않았다. 사내는 오직 검집의 각도를 비틀고 회전시키며, 소한이 뿜어내는 흉포한 살기만을 허공으로 빗겨 내고 흘려보낼 뿐이었다.

타앙!

소한의 오른쪽 쾌검이 삿갓 사내의 쇄골을 쪼개기 위해 사납게 파고들었을 때, 사내는 검집의 끝으로 소한의 손목 안쪽 혈도를 가볍게 쳐올려 궤적을 튕겨 냈다. 연이어 독사처럼 파고든 왼쪽 칼날은 사내의 삿갓 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의 빗줄기만을 갈랐다.

사내는 마음만 먹는다면 불과 세 수(手) 안에 소한의 두 팔을 꺾어 무력화하고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소한은 이미 앞선 격전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고, 그의 주병기였던 흑철 대검마저 흑천월식검의 검압에 산산조각 난 뒤였다. 게다가 사내가 펼쳐 내는 무위의 깊이는 이미 소한의 경지를 아득한 심연 너머로 초월해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칼을 뽑지 않았다.

검을 뽑아 저 목을 베어 넘기는 순간, 십 년 전 불타 사라진 청월장의 남은 잔영마저 영원히 차가운 잿더미 속에 파묻혀 버릴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켜라! 베지 않을 거라면 네놈의 그 목이라도 순순히 내놓아라!”

소한이 악에 받쳐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허옇게 질려 있었고, 앙다문 입술 틈새로는 거품 섞인 검붉은 선혈이 줄기차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올린 탓에 단전과 영혈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한아.”

사내가 마침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짧고 무거운 한마디에 담긴 무게는 천 길 벼랑보다 아득했다. 그 음성을 똑똑히 들은 소한의 칼끝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삿갓 사내의 검집이 묵직한 호를 그리며 소한의 양손 검신을 동시에 후려쳤다.

쩌정!

소한의 찢겨진 손아귀에서 두 자루 쾌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가 진흙 바닥에 깊숙이 처박혔다. 거대한 반탄력에 밀려난 소한의 신형이 빗물 속을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 뒤로 굴러떨어졌다.

4. 횃불의 진실

소한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피거품을 토해 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러진 칼자루를 악착같이 쥐고 있던 손바닥의 살갗이 모조리 찢겨 나가, 붉은 피가 진흙탕 물 위로 번져 갔다.

그는 젖은 땅을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반쪽짜리 붉은 가면이 깨져 나간 얼굴 위로 지독한 모멸감과 육체적 고통, 그리고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광기가 뒤엉켜 일그러졌다.

“……왜 베지 않느냐.”

소한이 핏빛 침을 탁 뱉어 내며 삿갓 사내를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청월장의 수제자, 위대한 장주의 충견 노릇을 하던 고결한 놈이…… 감히 누구를 동정하는 것이냐? 네놈 따위가 뭔데 나를 그따위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냐!”

“오라버니, 제발…… 제발 그만해!”

뒤편에서 소연이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소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진흙 바닥에 질질 끌며 기어가, 기어코 소한의 젖은 발목 언저리를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차가운 진흙투성이 손이 사내의 가죽 경갑을 붉게 적셨다.

“우릴 봐…… 살아남았잖아. 오라버니도, 나도, 저분도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잖아! 그런데 왜 원수의 편에 서서 칼을 휘두르는 거야? 청월장을 불태우고 아버님을 잔혹하게 죽인 자들이 바로 저 흑월문이잖아!”

소연의 애절한 통곡이 빗소리를 찢으며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소한의 얼굴에 번진 것은 통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더없이 기괴하고 흉측하게 뒤틀린 조소(嘲笑)였다.

“원수?”

소한의 찢어진 입꼬리가 피를 머금은 채 비틀려 올라갔다.

“크큭…… 크하하하! 원수라고? 흑월문이 청월장을 불태웠다고?”

사내의 메마르고 광포한 웃음소리가 빗속의 숲을 흔들었다. 눈가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제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소연의 가녀린 손을 차마 매정하게 걷어차 내지 못했다. 그저 더없이 비참하고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여동생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무것도 몰라, 소연아. 십 년 전 그 비극의 밤…… 그 저주받을 장원에 횃불을 던진 게 정말로 흑월문의 살수들이었을 것 같으냐?”

소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뭐라고?”

삿갓 사내의 눈빛 역시 서늘한 한기를 머금은 채 굳어졌다. 흑단목 검집을 쥔 사내의 손가락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거센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사내의 낮게 가라앉은 물음에, 소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삿갓 사내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 속에서 십 년 전 그날 밤 장원을 집어삼켰던 거대한 화염의 망령이 넘실거렸다.

“너희는 장주가 천하의 도리를 지키던 의로운 성인군자라도 되는 줄 알았겠지. 무림의 공도(公道)를 수호하고, 의기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청고한 장주라고?”

소한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집어삼킬 듯 광포하게 갈라져 터져 나왔다.

“틀렸다! 청월장을 하룻밤 사이에 생지옥으로 만든 그 불길은 외부에서 날아든 살수들의 불화살 따위가 아니었어. 장원의 거대한 문을 안에서 굳게 걸어 잠그고, 서책과 전각마다 기름을 붓고 횃불을 던진 자는…… 따로 있었다!”

숲을 메우던 모든 소리가 일순간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장대비의 소음마저 아득한 심연 너머로 지워져 버렸다. 소연의 숨통이 멎었다. 소녀는 자신이 방금 귓전으로 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파리한 입술을 벌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횃불을 든 자가…… 따로 있다니……?”

소한은 더 이상 소연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은 오직 삿갓 사내, 한때 자신과 한 솥밥을 먹으며 같은 도복을 입고 같은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던 사내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그자는 우리 모두를 팔아넘겼다. 자신의 추악한 위선과 채울 수 없는 탐욕을 덮기 위해, 장원에 머물던 백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검은 달의 제물로 통째로 바쳐 버린 거다! 닫힌 문틈 사이에서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며 산 채로 타 죽어 가던 아이들의 살 타는 냄새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해. 십 년 동안 매일 밤 그 냄새가 내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소한의 가슴팍이 격렬하게 헐떡였다. 핏물과 눈물이 뒤엉킨 액체가 그의 턱 끝에서 진흙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5. 본단으로 와라

“장원에 불을 지른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

삿갓 사내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뼈처럼 품고 살아왔던 단 하나의 믿음,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궤적이 뿌리부터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혼돈을 마주한 자의 비통한 전율이었다.

소한은 더 이상 구체적인 대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며 기괴한 냉소를 흘렸다. 사내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삿갓 사내의 자비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한의 전신에서는 다시금 음습하고 끈적한 흑월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골수까지 검은 달의 독기에 깊이 침식된 자의 흉흉한 기운이었다.

“알고 싶으냐?”

소한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네놈이 장원 비전의 금기 무공을 어디서 훔쳐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따위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참혹한 진실을 벨 수는 없다.”

소한은 비틀거리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축축하고 짙은 밤안개가 망령처럼 피어올라 그의 두 발목을 휘감았다. 흑월문의 살수들이 본단으로 퇴각할 때 사용하는 비전의 은폐용 독무(毒霧)였다. 메케하고 비릿한 화약 냄새가 빗물과 뒤섞여 삽시간에 세 사람의 시야를 짙은 장막처럼 가로막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소연이 진흙 바닥을 긁으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급격히 짙어지는 안개의 벽을 뚫지 못하고 허공을 헛손질할 뿐이었다.

소한의 칠흑 같은 형체는 이미 유령처럼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오직 사방을 찢을 듯 메아리치는 그의 서늘하고 메마른 목소리만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원한다면, 빼앗긴 장부를 되찾고 싶다면 흑월문의 본단으로 와라.”

“소한아!”

삿갓 사내가 안개 속으로 번개처럼 몸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짙은 독무 사이에서 빗줄기를 뚫고 수십 개의 암기(暗器)와 시커먼 벽력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박! 콰아아앙!

사내는 허공에서 몸을 급격히 비틀며 흑단목 검집을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팽팽한 내력이 실린 검집이 쏟아지는 쇠붙이들을 쳐내고, 쓰러진 소연의 몸 위로 덮쳐드는 화약의 파편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굉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와 메케한 연무가 사방으로 치솟으며 공간의 기운을 어지럽혔다.

6. 안개 속의 클리프행어

장대비가 자욱한 연무를 서서히 씻어 내렸을 때, 그곳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자의 기척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진흙탕 속에 짓밟힌 붉은 가면의 깨어진 파편들과, 빗물에 희미하게 씻겨 내려가는 검붉은 핏자국만이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월소한의 기운은 숲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적막한 허공 속에는, 삿갓 사내와 소연의 심장에 시뻘건 대못을 박아 넣은 마지막 말이 독기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어 흩어지지 않고 맴돌았다.

—흑월문의 심장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네놈이 마주할 참혹한 진실을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느냐?

—본단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네놈이 십 년 동안 눈에 피를 올리며 찾아 헤맨 진짜 원수다.

후두둑, 거센 빗방울이 사내의 낡은 삿갓 처마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소연은 차가운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어깨를 잘게 들썩이며 메마른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피 묻은 가느다란 두 손에는 오라비가 남기고 간 깨어진 붉은 칠기 파편 하나가 살을 파고들 정도로 꼭 쥐여 있었다.

삿갓 사내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검집을 틀어쥔 사내의 거친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성난 용처럼 솟구쳐 올랐다. 십 년 전, 화염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던 청월장의 그 참혹했던 밤. 자신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 왔던 장원의 결백과 정의, 그리고 양부이자 스승이었던 서문 월청의 죽음 뒤편에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마침내 그 흉측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구름과 짙은 안개가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 북쪽 산맥, 흑월문의 본단이 도사리고 있는 검은 능선이 한 줄기 번갯불 아래 거대한 짐승처럼 번뜩였다.

빛을 잃은 검은 달의 장막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운명이 그들을 조롱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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