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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5화목차

제5화 갈라진 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한 점 문양만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올랐다.

붉은 가면의 사내가 쥐고 있는 육중한 대검. 그 두터운 칼자루 끝, 거친 손때에 닳고 닳은 흑철 병두(柄頭)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

초승달을 품에 안은 채 처연하게 피어난 세 잎 청매화(靑梅花).

그것은 강호의 어떤 문파나 세가에서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표식이었다. 오직 십 년 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 강호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린 청월장(靑月莊)의 장주, 서문월청이 제 손으로 직접 정을 쳐서 새겨주던 직계 제자의 징표였다.

‘어째서…… 저 문양이…….’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의 호흡이 거칠게 멎었다.

십 년의 풍진 속에서 얼어붙은 채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흑도(黑刀)의 날끝이, 살얼음판을 디딘 것처럼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가슴 한구석, 타버린 뼈처럼 굳어 있던 흉곽 밑바닥에서 뜨겁고 매캐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 붉은 화염 속에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던 회랑의 대들보, 붉게 물든 밤하늘을 향해 찢어질 듯 절규하던 어린아이들의 비명. 십 년 동안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그 지옥 같은 밤의 기억이 뇌리를 찢고 솟구쳤다.

‘살아남은 자가 나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장원의 피와 숨결을 공유했던 동문이 어찌하여 저 피비린내 나는 흑월문의 붉은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가. 어찌하여 십 년 전 장원을 불태우고 무참히 도륙한 원수들의 사냥개가 되어, 그 장원의 마지막 핏줄인 어린아이의 목을 베러 이곳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사내의 삿갓 그늘 밑으로 드러난 반쪽 얼굴의 화상 흉터가 핏빛으로 붉게 팽창했다.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흑도의 자루를 틀어쥐는 손아귀에서 삐걱거리는 뼈마디의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의 동요를, 붉은 가면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가면의 서늘한 눈구멍 너머에서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형형한 살기가 번뜩였다. 가면 아래로 낮게 깔린 음성이 쇠를 긁는 소리처럼 메마르게 흘러나왔다.

“검끝이 흐려졌구나, 쥐새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앙!

동굴 바닥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석판이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붉은 가면의 신형이 거대한 암흑의 덩어리가 되어 허공을 갈랐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칠흑빛 대검이 바람을 찢는 비명을 내지르며 사내의 머리통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단순한 도검의 휘두름이 아니었다. 거대한 산봉우리를 통째로 뽑아 내리치는 듯한 흉포하고 무지막지한 묵빛 강기(罡氣)의 낙하였다.

채애애앵!

사내는 반사적으로 흑도를 비스듬히 세워 대검의 궤적을 쳐냈다. 그러나 검과 도가 맞부딪친 순간 발생한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동굴 벽면의 날카로운 종유석들이 우수수 부러져 내렸다. 사내의 두 발이 바닥을 짓이기며 뒤로 서너 자나 밀려났다. 살을 에는 듯한 반탄력이 칼날을 타고 올라와 손목의 힘줄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무겁다……!’

단순한 근력의 무게가 아니었다. 십 년 묵은 원한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 속에서 벼려진 광기 어린 내력이었다.

그러나 밀려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사내는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허리를 팽이처럼 비틀었다. 흑도의 칼끝이 짙은 어둠을 가르며 날카로운 호를 그렸다. 먹물을 뿌린 듯 짙은 묵빛 궤적이 대검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스각!

스물 합에 이르는 처절하고도 맹렬한 공방이 좁은 석굴 안에서 찰나의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채채챙! 콰르릉!

도와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어둠 속에서 먹물을 튀긴 듯 짙은 묵빛 기운과 선혈처럼 붉은 검화(劍火)가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 가면의 대검은 잔인하리만치 거칠고 직선적이었다. 찌르고, 베고, 부수는 일격일격이 오직 상대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기 위해 극도로 단련된 파괴의 살인검이었다. 바위를 두 동강 내고 흙바닥을 깊게 파헤치는 무자비한 기세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반면 사내의 흑도는 물처럼 유려하고 바람처럼 매서웠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거대한 대검의 힘줄기를 비스듬히 흘려보내며, 틈이 보이는 즉시 가면의 목과 심장을 노리고 날카로운 참격을 쑤셔 박았다.

열 합, 열다섯 합, 그리고 열여덟 합.

순식간에 스무 합을 넘어서는 순간, 동굴 안의 공기는 마치 끓는 쇳물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러진 칼바람이 사방의 석벽을 사정없이 난타했고, 저 멀리 축축한 구석에 쓰러져 있던 소연은 귀를 틀어막은 채 그 끔찍한 기운의 소용돌이에 짓눌려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큭……!”

소연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격통 속에서도 소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두 사내의 혈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기이했다.

분명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는 처절한 살육전이었으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검로(劍路)의 궤적에는 기묘할 정도의 대칭과 호응이 존재했다.

대검이 우람하게 횡으로 쓸어내리면, 흑도는 마치 그 궤적을 십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칼등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흑도가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치고 올라가면, 대검은 보지도 않고 칼자루를 틀어 흑도의 흐름을 정확한 각도로 봉쇄했다. 발을 디디는 보법의 간격,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찰나의 박자까지도 마치 거울을 마주 보고 검을 나누는 것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그것은 서로의 무공을 모르는 자들끼리의 살육전이 아니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한 공간에서 함께 합을 맞춰보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지독하게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교합(咬合)이었다.

채앵!

스무 번째 합에서 두 무기가 다시 한번 허공에서 엇갈리며 팽팽하게 맞물렸다. 대검의 육중한 칼날이 흑도를 짓누르고, 흑도의 예리한 도신이 대검의 날을 비틀며 버텨냈다.

쇳가루가 튀는 칼날 너머로 서로의 거친 숨결이 가면과 삿갓 사이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팽팽한 교착의 순간, 붉은 가면의 입술 사이로 나직하고 서늘한 비소가 흘러나왔다.

“그 검로…….”

가면의 붉은 칠 표면 위로 사내의 흑도가 뿜어내는 먹빛 기운이 어른거렸다.

“십 년 전, 장원 뒷마당에서 매일 아침 질리도록 배운 그대로군.”

쿵, 하고 사내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렴풋한 의혹이 잔혹한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귓가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장원 뒷마당.

매화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던 그 연무장.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면 장주는 어린 제자들을 모아놓고 목검을 쥐여주었다. 검을 쥐는 법, 호흡을 고르는 법, 흙바닥에 발을 디디는 법. 그리고 바람을 베고 달빛을 쪼개는 청월(靑月)의 기본 검결을 손수 바로잡아 주었다.

‘너였는가.’

사내의 눈동자가 지독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타올랐다.

“너였단 말인가…….”

사내의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터져 나왔다.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아…… 사부님의 검을 쥐고 있는 놈이 고작 흑월문의 사냥개가 되었단 말이냐!”

붉은 가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갔다.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원망과 지독한 광기가 뒤엉켜 있었다.

“살아남아? 크크…… 그래, 살아남았지. 개처럼 진흙 바닥을 기어 나와서, 타버린 시체들의 피를 마시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가면의 사내가 대검에 묵직한 내력을 더하며 사내의 흑도를 짓눌렀다. 흑도의 칼날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사부? 그 위선자 늙은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지? 아무것도 없다! 십 년 전 그 밤, 그자가 지키려 했던 그 빌어먹을 ‘이름’ 때문에 장원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닥쳐라!”

사내가 포효하며 왼손으로 장력을 뿜어냈다. 흑도의 궤적이 비틀리며 가면의 가슴팍을 사납게 쳐올렸다.

파아앙!

공기를 가르는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사내는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삿갓 그늘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두 눈은 이미 인간의 온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십 년간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피눈물이 흑도의 날을 따라 검은 파동이 되어 요동쳤다.

붉은 가면의 입에서 튀어나온 ‘장원’이라는 단어. 그것은 사내에게 있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이자, 제 손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영겁의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적은 그 낙원을 함께 나누었던 동문이었다.

언제나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검을 겨루고, 장원의 앞날을 짊어질 것이라 믿었던 동문. 그 소중했던 인연이 지금 흑월문의 붉은 탈을 쓴 채, 자신과 어린아이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네놈이……!”

사내의 검로가 돌변했다.

더 이상 방어와 견제를 위한 검이 아니었다. 흑도의 도신에서 피어오르던 먹빛 기운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동굴 안의 희미한 빛마저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주변의 어둠이 흑도의 날끝으로 빨려 들어가듯 휘몰아쳤다. 바닥의 돌가루와 공기마저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기이한 중력장이 형성되었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흑월문의 금기이자, 빛을 삼켜 어둠을 빚어내는 파멸의 검. 사내가 복수를 위해 제 이름과 영혼을 깎아 먹으며 익힌 그 저주받은 검결이 전신을 휘감았다.

붉은 가면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그 무공은……!”

가면 역시 그 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문주 혁련오조차 함부로 펼치지 못하는 흑월문의 금기이자 극의. 어째서 장원의 잔당에 불과한 저 삿갓 사내가 그 저주받은 검을 펼치고 있는가.

그러나 의문을 품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내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사내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빛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칠흑의 공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암흑의 심연 한가운데에서, 서늘하게 번뜩이는 초승달 형상의 참격이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조차 없었다.

오직 공간 자체가 예리한 칼날에 찢겨 나가는 듯한 섬뜩한 침묵만이 동굴을 지배했다.

붉은 가면은 본능적인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두 손으로 대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청월장의 비전 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대검의 도신 전체에 붉은 강기를 폭발적으로 둘렀다. 바위산이라도 부숴버릴 듯한 기세로 검을 내리꽂으려 했다.

“크아아아악!”

가면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내의 일검은 이미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스그극.

마치 흰 화폭 위에 붓으로 굵은 먹선을 긋는 것 같은 단 한 번의 움직임.

어둠 속에서 쏘아져 나온 흑도의 참격이 붉은 대검의 강기를 두부 베듯 가르고 지나갔다. 대검의 두터운 흑철 날을 가볍게 스쳐 지나, 가면의 미간을 향해 수평으로 뻗어나간 서슬 퍼런 칼끝.

찰나의 정적이 동굴 안을 집어삼켰다.

대검을 치켜든 채 화석처럼 굳어버린 붉은 가면.

그리고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삿갓의 사내.

사내는 흑도를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끝이다.”

사내의 메마른 음성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붉은 가면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대검의 칼날 윗부분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육중한 쇳덩이가 바닥에 처박히며 둔탁한 파열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잘려 나간 것은 대검뿐만이 아니었다.

찌르르…… 쩍!

붉은 가면의 이마 한가운데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묵빛 검흔이 가면의 붉은 칠을 가로지르며 깊은 틈을 만들어냈다.

쩌저적!

마치 마른 진흙이 부서지듯, 가면의 중심부가 좌우로 쪼개졌다.

후두둑거리며 붉은 쇳조각들이 차가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십 년 동안 그 잔혹한 살육자의 정체를 감추고 있던 두터운 껍데기가 마침내 산산조각 나며 벗겨진 것이다.

가면의 파편 너머로, 피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사내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날카롭게 솟은 눈매,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십 년의 풍파와 살기가 덧씌워져 거칠고 험악해졌으나, 그 이목구비의 근본은 결코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십 년 전 장원의 불길 속에서 사내가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맸던 얼굴이었다.

청월장 장주 서문월청의 친아들이자, 어린 날 함께 무예를 닦았던 동문. 그리고 쓰러져 있는 저 아이의 유일한 혈육.

월소한(月少翰).

“소…… 한…….”

사내의 입술 사이로 부서질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내의 손에서 흑도가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장원을 태운 원수들을 찾아 십 년을 떠돌았다. 그 원수들의 목을 베기 위해 제 이름마저 지우고 어둠 속의 귀신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복수의 칼날 끝에 서 있는 자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장원의 핏줄이란 말인가.

그러나 충격에 휩싸인 것은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축축한 바위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소연의 시선이,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진 사내의 얼굴에 가닿았다.

소녀의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커졌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소녀의 앙상한 몸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흑월문의 잔혹한 추격대장.

자신을 배신자라 부르며 숨통을 끊으러 왔던 무자비한 집행자.

십 년 동안 그림자처럼 두려워하고 증오해 마지않았던 그 악귀의 얼굴.

그것은 소녀의 기억 밑바닥, 가장 따뜻하고 눈부셨던 시절에 멈춰 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매화나무 아래서 자신을 목마 태워주던 사람.

넘어져 무릎이 깨지면 눈물을 닦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사람.

장원이 불타던 그 끔찍한 밤, 제 손을 쥐고 달리다 화염 너머로 사라져 영영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오라비.

“아…….”

소연의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르륵.

소녀가 쥐고 있던 마지막 방어막, 흑월문의 살수 단검이 힘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챙그랑!

차가운 바닥에 단검이 떨어져 굴렀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적막한 동굴 안을 처연하게 울렸다.

소연은 부러진 다리의 격통조차 잊은 채,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떨리는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뺨의 핏자국을 씻어냈다.

“오…… 라버니……?”

동굴의 서늘한 정적을 가르고 터져 나온 그 한마디.

그것은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진실의 껍질을 깨뜨린,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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