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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의 검객 · 4화목차

제4화 가면 아래의 문양

바위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젖은 흙냄새와 차가운 쇠 냄새를 짙게 머금고 있었다.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억수같이 쏟아붓던 장대비의 기세는 한풀 꺾였으나, 대신 바늘처럼 가늘고 차가운 안개비가 허공을 짓이기며 지전(紙錢)처럼 흩날렸다. 먹물을 듬뿍 머금은 거대한 붓으로 천지를 거칠게 문질러 지워 버린 듯, 사방은 흑과 백의 경계조차 모호한 농담(濃淡)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비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는 비좁은 암혈(岩穴) 안쪽은 지옥의 한구석처럼 시리고 어두웠다.

“네놈이지.”

소녀, 월소연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찢겨 있었다.

성치 않은 갈비뼈가 들썩일 때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혈포(血泡)가 마른 입술을 붉게 적셨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끝이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은 사내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벗겨진 삿갓 그늘 너머로 드러난 얼굴. 왼쪽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지나 턱선과 목덜미 밑바닥까지 흉측하게 짓무른 참혹한 화상의 흔적. 사람의 피부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문드러진 그 뒤틀린 살갗은, 십 년 전 천지를 집어삼켰던 화마(火魔)의 이빨 자국이 틀림없었다.

“청월장을 불태우고…… 장주님과 식솔들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든 악귀. 문주님께서 말씀하셨어. 그 끔찍한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단 하나의 역적, 제 어미와 아비 같던 이들을 흑월의 제물로 팔아넘기고 제 목숨 하나만 건져 야밤에 도망친 흉수…… 네놈의 추악한 얼굴에 그날 밤의 불길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고!”

소연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부러진 다리뼈가 살을 찌르는 격통도, 오장육부를 조금씩 갉아먹는 음독(陰毒)의 한기(寒氣)도 완전히 잊은 듯했다.

그것은 증오였다. 지난 십 년간 흑월문의 살얼음판 같은 어둠 속에서 살수로 길러지며, 살을 에는 훈련과 죽음의 공포를 버텨 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생존 이유. 가슴속에 품은 원수를 찾아 그 목을 물어뜯겠다는 맹목적인 복수심이 지금 눈앞의 화상 입은 사내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말이 없었다.

사내는 삿갓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거친 바위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소녀의 저주 어린 절규가 좁은 암혈 안을 찌렁찌렁 울리고 메아리쳐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후벼 팠지만,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바닥 모를 심연처럼 고요했다. 눈꺼풀조차 미세하게 떨리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기 어린 시선으로 소녀의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그리고 소녀의 젖은 무릎 위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반쪽짜리 청옥패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서늘한 푸른빛의 옥패는 사내의 품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반쪽과 완벽하게 들어맞는 물건이었다. 마치 소녀가 토해 내는 피 맺힌 저주와 악담이 십 년 동안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빚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내는 그 날 선 말들을 온몸의 무게로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왜…… 왜 아무 말도 안 해!”

소연이 기어코 참지 못하고 핏덩이를 울컥 쏟아내며 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부러져 살갗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변명이라도 해 보란 말이야! 아니라고, 문주님의 말이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발악이라도 해 봐!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건데, 왜!”

사내의 묵직한 침묵은 그 어떤 매몰찬 부정보다 더 잔인하게 소녀의 속을 헤집어 놓았다. 소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혼란은 증오의 불길보다 더 거대하고 시커멓게 번져 나갔다.

만약 이자가 정말로 장원을 잿더미로 만들고 도망친 파렴치한 배신자라면, 왜 조금 전 흑월문의 정예 추격조를 단칼에 베어 넘기며 자신을 사지에서 건져 올렸단 말인가. 왜 자신의 얼어붙은 흉통을 녹여 주고, 이 반쪽짜리 청옥패를 소중히 돌려주며 이토록 슬프고 부서질 듯한 눈을 하고 있단 말인가.

사내는 대답 대신 천천히 품속을 뒤적여 거친 무명천 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소녀의 떨리는 무릎 앞, 흙탕물이 튀지 않은 마른 바위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입가에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라는 무언의 손짓이었다. 그 투박한 손길에는 티끌만 한 살기나 원망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십 년 묵은 잿더미를 맨손으로 헤집으며 홀로 살아남은 자의 깊고 메마른 슬픔만이 켜켜이 묻어날 뿐이었다.

소연은 이를 악물며 그 무명천을 거칠게 쳐냈다. 천 조각이 진창 위로 맥없이 떨어져 검붉은 진흙을 들이켰다.

“동정하지 마. 네놈 손에 목숨을 잃은 우리 청월장 일족의 피가…… 아직 내 귓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

“……말을 아껴라.”

마침내 사내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 어린 말을 섞어 보지 못한 자처럼, 쇳가루가 거칠게 갈리는 듯 낮고 탁한 음성이었다.

“독이 심맥(心脈)으로 번지고 있다. 억지로 진기(眞氣)를 끌어올려 악을 쓰면, 네 오장육부는 얼어붙은 얼음처럼 깨어져 나갈 것이다.”

“내 알 바 아니야! 어차피 난 흑월문의 사냥개였어. 명령을 거스르고 달아난 배신자의 최후가 어떤지 진즉에 알고 있었단 말이다!”

소연의 턱 끝을 타고 떨어진 핏방울이 무릎 위의 청옥패를 서늘하게 적셨다. 사내는 소녀의 처절한 반발을 담담히 응시하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배신했느냐.”

그 짧고 묵직한 한마디가 소연의 귓전을 날카로운 비수처럼 후려쳤다.

소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결이 멎고, 그녀의 동공이 잘게 파르르 떨렸다.

잊으려야 결코 잊을 수 없는, 며칠 전 흑월문 본단의 칠흑 같은 밤이 붉은 핏빛 잔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흑월문의 가장 깊고 은밀한 금역, 문주 혁련오의 침전 뒤편에 감춰진 밀실. 금지된 결계를 뚫고 서류를 찾으러 들어갔던 그곳에서 목도했던 참담한 진실.

“……보았으니까.”

소연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표독스러운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뼈를 에는 듯한 서늘한 공포와 배신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문주님의 서재…… 벽장 안쪽에 숨겨진 비밀 금고 속에서. 흑월문의 군자금 장부를 빼돌려 달아나려던 게 아니었어. 그저 내 부모의 흔적, 내 진짜 성씨가 무엇인지 적힌 기록을 찾으려 했을 뿐이었지. 그런데…… 거기 있었어. 십 년 전, 불타 사라진 청월장의 전경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그려 넣은 조감도가.”

사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낡은 흑도(黑刀)의 손잡이를 쥔 그의 주먹에 파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건 단순한 장원의 약도가 아니었어.”

소연의 음성이 전율로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장원의 사계절 바람길, 밤마다 바뀌는 야경 무사들의 순찰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파 놓은 지하 수로와 방화수 저수조의 위치까지…… 붉은 먹줄로 낱낱이 그어져 있었지. 그리고 장원 한구석, 불길이 시작되어야 할 일곱 군데의 요충지마다 주사(朱砂)로 찍혀 있었어. 불꽃 모양의 낙인이.”

소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빗소리가 귓전을 거칠게 때렸지만, 그녀의 코끝에는 그날 밤 비밀 밀실에서 낡은 양피지 지도를 펼쳤을 때 확 풍겨 오던 역겨운 주사 냄새와 기름 냄새가 여전히 진동하는 듯했다.

“그 붉은 낙인 옆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어. ‘신시(申時) 발화, 탈출로 봉쇄, 생존자 불필요’…… 그리고 그 밑에는 문주 혁련오의 친필 서명이 갈겨써져 있었지. 그 조감도는 십 년 전, 장원에 불길이 치솟기 사흘 전에 작성된 것이었어! 장원이 불타기 전부터, 흑월문은 청월장의 숨통을 통째로 끊어 놓고 불태워 죽일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있었던 거야!”

소연의 뺨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피 묻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문주님은 내게 늘 말했어. 장주 서문월청이 흑월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규율을 어겼기에 하늘의 벌을 받아 타 죽은 것이라고. 불을 지르고 의형제들을 배신한 자는 바로 너, 어린 사제들을 버려둔 채 삿갓 뒤로 얼굴을 숨기고 도망친 비겁한 역적이라고! 그런데 아니었어…… 그 불은 밖에서 번진 재앙이 아니었어. 문주가, 흑월문이 안쪽에서부터 철저하게 준비해 지펴 올린 살육의 불길이었단 말이다!”

소녀의 절규는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보다 차갑고 비참했다.

“내가……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누구를 위해 뼈를 깎으며 칼을 갈았는지 알아? 내 부모를, 내 형제들을 잿더미 속에 밀어 넣고 태워 죽인 원수들의 발밑에서…… 그들이 던져 주는 고기를 씹어 삼키며, 그들이 가리키는 자들의 목을 베어 바쳤어!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그 살인마들의 사냥개가 되어 살아왔단 말이다!”

피눈물이 뒤섞인 소녀의 오열이 좁은 동굴 안을 찢어 놓을 듯 메아리쳤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자의 절망. 평생을 받쳐 온 복수의 칼날이 실은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는 잔혹한 진실 앞에, 소녀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문주 혁련오의 서재. 붉은 먹줄로 정밀하게 그어진 방화 지도.

십 년 전의 그 아비규환 같던 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던 시뻘건 불길과 불타는 기와 밑에 깔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져 가던 동문들의 얼굴이 사내의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 생생하게 타올랐다.

사내는 왜 자신이 소녀의 원망 앞에 침묵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그 불길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죄.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고, 불타는 장원에서 홀로 살아남아 이 진흙탕 같은 강호에 제 목숨 하나를 구차하게 부지하고 있는 죄. 그 모든 비겁함과 무력함이 온전히 사내 자신에게 있었기에, 소녀가 쏟아내는 저주와 피 맺힌 원망은 마땅히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애액—!

어둠과 빗줄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조차 집어삼켜 버릴 듯한 음산하고 육중한 기운이, 동굴 정면의 짙은 숲속에서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바위틈 주변의 온도가 단숨에 곤두박질쳤다.

허공을 맴돌던 자욱한 안개비가 바위에 닿기도 전에 잘게 얼어붙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기(殺氣)였다. 숲 전체의 풀잎들이 숨을 죽이고, 축축하게 젖은 대지가 짓눌릴 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형적 살의.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흑도가 칼집 속에서 불길하게 파르르 진동했다.

터벅. 터벅.

진창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무겁고 규칙적인 발소리.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이미 독 안에 갇혀 빠져나갈 곳 없는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 특유의 오만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빗속의 짙은 안개를 찢어발기며 마침내 한 사내가 거대한 형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칠흑의 무복 위로, 피처럼 붉은 비단 망토가 차가운 빗물에 젖어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믐밤의 허공에 홀로 떠오른 지옥의 불길처럼, 기괴하고 잔혹한 형상의 ‘붉은 가면’이 사내의 안면을 온전히 뒤덮고 있었다. 가면의 찢어진 눈구멍 뒤편에서는 굶주린 짐승의 안광처럼 시퍼런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사내의 등 뒤에는 한 자루 거대한 대검(大劍)이 비스듬히 메여 있었다. 장성한 사내의 키를 훌쩍 넘는 길이, 칼날의 폭만 해도 어른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무지막지한 칠흑의 쇳덩이였다.

붉은 가면이 동굴 입구 세 보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가면 뒤편의 시선이 바닥에 진흙과 함께 널브러져 있는 두 구의 흑월 살수 시체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피투성이가 된 채 공포에 질려 웅크리고 있는 소연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추하구나, 월소연.”

가면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사람의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녹슨 쇠와 뼈가 맞물려 갈리는 듯 둔탁하고 변조된 음산한 울림이었다.

“주인의 은혜를 입어 미천한 목숨을 건지고 칼을 쥐었으면, 사냥개답게 주인이 가리키는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다 깨끗이 죽었어야지. 감히 주인의 침전을 엿보고, 흑월의 규율을 짓밟은 대가가 고작 이 꼴이더냐?”

소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사내를 향해 내뿜던 독기와 증오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던 원초적인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추격대장…… 붉은 가면…….”

소연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듯 파들거렸다.

흑월문 내에서도 오직 문주 혁련오의 밀명만을 받들며, 배신자와 규율을 어긴 자들의 사지를 찢어 문전(門前)에 걸어 두는 절대적인 집행자. 그림자 속에서도 가장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괴물이 기어이 이곳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붉은 가면은 소연의 공포를 천천히 음미하듯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문주께서 이르셨다. 주인을 문 미친개는 다시 고기를 먹여 길들일 필요가 없다고. 가죽을 벗기고 네 다리의 뼈를 부수어, 문간에 매달아 다른 사냥개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이다.”

가면 사내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낀 거친 손이 등 뒤에 메여 있던 거대한 대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스르르릉—

대검이 칼집을 미끄러져 나오는 소리는 마치 허공이 비명을 지르는 듯 처절했다.

칠흑의 칼날이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맹렬하게 쏟아지던 주변의 안개비가 검기(劍氣)의 파동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으로 증발했다. 그것은 단순한 내가진기의 경지가 아니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살의의 파동만으로 주변의 공간과 기류를 뒤틀어 버리는 절대적인 위압감이었다.

“네 년의 가죽을 벗겨 본단 정문에 걸어 둘 것이다. 네가 훔쳐보았다는 그 조감도와 함께 말이지. 감히 진실 따위를 입에 담으려 한 버러지의 최후가 얼마나 처참한지, 네 부러진 뼈마디로 똑똑히 증명해 주마.”

붉은 가면이 거대한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어두운 바위 그늘 밑에 석상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검객이,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의 진창을 딛는 사내의 짚신 소리는 바람결처럼 고요했다.

어떠한 기척도, 옷자락 스치는 파공음도 없이 물 흐르듯 일어선 사내는, 공포에 질린 소연과 거대한 살기를 뿜어내는 붉은 가면의 사이를 가로막아서며 섰다. 벗어 던진 삿갓은 진흙 위에 뒹굴고 있었다. 왼쪽 얼굴 전체를 뒤덮은 흉측한 화상 흉터 위로 차가운 빗물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붉은 가면의 안광이 사내에게 닿았다. 가면 뒤편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조소 섞인 거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오…… 진흙탕 속에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군. 장마철 흙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온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흑월의 집행을 막아서겠다는 것이냐?”

검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의 시선은 붉은 가면의 얼굴이나 그가 뿜어내는 흉흉한 살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가닿아 있는 곳은 오직 하나, 붉은 가면이 뽑아 든 거대한 대검의 손잡이 끝—병두(柄頭)였다.

안개비가 허공을 짓이기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잿빛의 어둠 속.

하늘에서 번개가 치지도 않았건만, 검객의 눈동자에는 그 칼자루 끝의 형상이 번쩍이는 백색 섬광처럼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거친 흑철을 두드려 만든 묵직한 대검의 칼자루 끝, 둥근 병두의 중심부에 정교한 음각(陰刻)으로 새겨진 문양.

그것은 초승달이었다.

먹구름을 뚫고 시리도록 차갑게 솟아오른 초승달을, 세 잎의 청매화(靑梅花)가 경건하게 감싸 안고 있는 문양.

십 년 전, 지옥의 화마에 휩싸여 무너지기 전까지 장엄하게 서 있던 청월장의 정문.

수백 년의 모진 풍파를 버텨 온 거대한 흑단목 대문 한가운데에 순금을 입혀 장원의 긍지이자 불멸의 혼으로 새겨져 있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

스승 서문월청이 오직 심지를 인정받은 직계 제자들의 검자루에만 손수 새겨 넣어 주었던, 청월장 무인의 영혼과도 같았던 징표.

“……!”

순간, 검객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다.

언제나 깊은 밤의 수면처럼 고요하던 검객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잔잔하던 수면에 금이 가고, 이내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경악의 파문이 뇌전처럼 소용돌이쳤다.

십 년 전의 화마.

불길 속에서 스러져 가던 스승의 마지막 눈빛.

타 죽어 가던 동문들의 찢어지는 비명.

어째서?

어째서 청월장의 긍지이자 피로 새겨진 저 문양이, 장원을 잿더미로 만들고 사제들을 도륙한 흑월문 최악의 살수, 추격대장의 검자루에 버젓이 새겨져 있단 말인가.

쩌저적—!

검객의 손이 허리춤의 낡은 흑도 자루를 부서질 듯 틀어쥐었다. 그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고, 칠흑 같은 칼집 틈새로 흘러나온 서슬 퍼런 검기가 빗방울을 모조리 얼려 부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침묵의 세상 속, 사내의 문드러진 화상 흉터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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