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옥패의 주인
밤은 온통 먹물을 들이부은 듯 짙었고, 굵어진 빗줄기는 산 그림자를 사납게 짓이기며 숲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우듬지를 거칠게 후려치는 빗소리는 마치 수천수만의 화살이 진창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쏟아내는 파열음과도 같았다. 벼랑 아래 비탈진 산길, 질척거리는 흙탕물 위에 한 사내가 무릎을 꺾고 앉아 있었다. 사내의 머리에 깊게 눌러쓴 낡은 갈대 삿갓 틈새로 빗물이 굵은 줄기를 이루며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턱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붉은 핏물과 뒤섞여, 그가 끌어안듯 받쳐 올린 어린 소녀의 창백한 이마 위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핏방울을 머금은 빗물은 소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가느다란 붉은 선을 그리며 귀밑으로 번져나갔다.
소녀의 호흡은 밭고 위태로웠다. 얇은 무복 아래 가슴패기가 잘게 들썩일 때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히는 듯한 숨소리가 샜다. 심맥 근처를 비스듬히 가르고 지나간 검상이 너무도 지독했다. 흑월문(黑月門)의 척살조가 즐겨 쓰는 잔혹한 살진의 잔흔, 바로 파혈검(破血劍)의 상흔이었다. 살갗을 찢고 근육을 짓이긴 자리에 음습한 음기(陰氣)가 똬리를 틀어, 혈도가 닫히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심장이 멎기 전에 전신의 피가 칠구(七竅)로 뿜어져 나와 절명할 터였다.
사내의 굵고 투박한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허공을 갈랐다.
탁, 타닥!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검지혈과 중지혈이 소녀의 쇄골 아래 결분혈(缺盆穴)과 명치 부근의 기해혈(氣海穴)을 연달아 찔러 들어갔다. 혈맥을 짚는 사내의 손끝에서 묵직하고 서늘한 진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와, 소녀의 뒤틀린 경락 속으로 사납게 밀려들었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냉랭한 기운이었으나, 그것은 파혈검의 음독을 단숨에 얼려 누르는 정순하기 이를 데 없는 내력이었다.
들끓던 독기가 억눌리자, 소녀의 굳어 있던 턱이 바르르 떨리며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들렸다.
흐릿하게 흩어지는 초점 속에서, 소녀는 제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장포의 윤곽과 낡은 삿갓의 그늘을 마주했다. 삿갓 밑,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 왼쪽 이마에서 시작해 뺨을 대각선으로 사납게 가로지른 채 굳어버린 흉측한 화상 흉터였다.
불길에 녹아내렸다가 억지로 달라붙은 듯한 일그러진 살갗.
십 년 전,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그 지옥 같은 밤의 열기를 고스란히 얼려 붙여놓은 듯한 처절한 흔적이었다.
소녀의 메마른 입술이 비틀리며 검붉은 피거품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쿨럭!"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사내의 두 눈은, 소녀의 품 안에서 흘러나와 진흙 바닥 한구석에 반쯤 파묻힌 채 푸른빛을 뿜어내는 옥 조각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달빛 한 조각 스며들지 않는 칠흑 같은 산중이었으나, 진창에 뒹구는 반쪽짜리 옥패(玉牌)는 제 스스로 은은하고 서늘한 한기를 내뿜으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반으로 쪼개진 채 한쪽 귀퉁이가 거칠게 깨져 나간 초승달의 형상. 그 매끄러운 옥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미세한 비구름의 문양.
그것은 사내 자신의 품속 깊은 곳에서 십 년 동안이나 살을 파고들며 심장을 짓누르던 또 다른 반쪽과 실오라기만 한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형상이었다. 십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청월장(靑月莊)의 신물. 장주 서문 월청이 오직 두 사람에게만 나누어 주었던 그 옥패였다.
사내의 목소리가 세찬 빗소리를 가르고 낮게 가라앉았다. 숫돌에 쇳조각을 짓이겨 갈아내는 듯한 메마르고 건조한 음성이었다.
"이 옥패는 어디서 난 것이냐."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빗물과 피가 뒤엉킨 턱을 덜덜 떨면서도, 가늘게 뜬 눈동자 속에는 체념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사냥꾼의 덫에 걸린 어린 맹수처럼 형형하게 번뜩이는 독기와, 뼈를 깎아 만든 듯한 깊은 적의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흙탕물을 긁어내며 바득바득 손톱을 세웠다.
"……죽여라."
소녀의 쉰 목소리가 빗물에 젖어 허망하게 흩어졌다.
"흑월의…… 개새끼……."
"묻고 있다."
사내의 손끝이 조금 더 깊게 진기를 밀어 넣었다. 소녀의 전신이 활처럼 꺾이며 고통에 겨운 비명이 목구멍 안쪽에서 짓눌렸다. 숨통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끊어지려는 가느다란 명줄을 억지로 이어 붙이려는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다. 가슴속으로 파고든 차가운 진기가 흩어지던 심장의 박동을 억지로 꿰매듯 묶어 세우자, 소녀는 이를 악물며 사내의 젖은 소맷자락을 뜯어낼 듯 움켜쥐었다.
"어디서 났냐고……?"
소녀의 눈에서 핏물이 섞인 눈물이 배어 나와 뺨을 타고 흘렀다. 슬픔이라기보다는,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뼈마디마다 응어리진 저주를 토해내는 오열이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내 손에 쥐여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삿갓의 깊은 그늘 밑에서, 어둠 속 맹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이…… 온통 붉은 불바다였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 무너지는 기와…… 살가죽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냄새……."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과거의 망령이 드리운 지옥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소녀는 지금 눈앞의 사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 년 전, 밤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거대한 화마(火魔)를 다시금 마주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들보 밑에서…… 살갗이 짓물린 채 잿더미를 기어 나왔을 때…… 내 손에 남아 있던 건 이것 하나뿐이었다. 살점이 다 타서 손바닥에 흉측하게 들러붙어 있던…… 이 차가운 돌덩이 하나."
진흙탕 속에 버려진 반쪽짜리 옥패. 그것은 단순한 패물이 아니었다. 장원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던 아비규환 속에서, 누군가가 어린아이의 손을 억지로 펴 쥐여주고는 등 떠밀어 사지에서 내보냈던 마지막 증표였다.
"그 잿더미 속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이 흑월문이었다."
소녀의 입가에 피투성이가 된 조소가 번졌다. 제 기구한 운명을 조롱하는 서늘한 비소였다.
"그곳에 이름 따위는 없었다. 그곳엔 오직 칼을 쥐는 법과, 숨을 죽이는 법, 그리고…… 언젠가 이 옥패의 주인을 찾아내 목을 베어야 한다는 가르침뿐이었다. 나는 흑월의 그림자 밑바닥에서 살수로 길러졌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든 건 피비린내였고, 내 뼈를 자라게 한 건 복수심뿐이었다."
소녀의 원망 어린 눈빛이 사내의 삿갓 그늘을 뚫어버릴 듯 집요하게 박혀 들었다.
"그런데 왜…… 왜 네놈이 그 옥패를 알고 있는 거지? 왜 네놈의 품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나는 거냐!"
소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쉬이이익―!
어둠과 빗줄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살갗을 뚫고 들어가 뼈를 바스러뜨리기 직전의 팽팽한 살의가 시위에 실려 날아드는 굉음이었다.
"배신자의 숨통을 끊어라!"
머리 위, 울창하게 얽혀 빗물을 쏟아내던 고목 나뭇가지 사이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귀화(鬼火)처럼 번뜩이는 살수들의 안광. 흑월문 본단에서 파견된 정예 척살조였다. 그들은 굵은 가지를 박쥐처럼 움켜쥐거나 허공에 매달린 채, 비에 젖은 활시위를 일제히 놓았다.
파파파팟! 쐐애액!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수십 발의 쇠화살이 폭우를 뚫고 쏟아져 내렸다. 살을 찢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혈도를 타고 들어가 온몸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흑월의 비전 독기, 부골독(腐骨毒)이 서린 독시(毒矢)들이었다. 화살 하나하나가 진흙탕에 쓰러진 소녀의 좁은 가슴과 미간을 가차 없이 겨누고 있었다. 흑월의 계율을 어기고 도주한 배신자에게 허락된 최후는 오직 사지가 찢겨 들개의 먹이로 던져지는 것뿐이었다.
소녀의 동공에 절망이 어렸다. 심맥이 상하고 내력이 고갈된 육신으로는 날아드는 화살 한 대조차 쳐낼 수 없었다. 이대로 끝인 것인가. 가슴속에 품어온 십 년의 원한, 그 잿더미의 진실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진창에서 개처럼 썩어 문드러져야 하는가.
소녀가 질끈 눈을 감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콰아아앙!
산비탈이 떠나갈 듯한 폭음과 함께 거센 돌풍이 일었다.
소녀의 시야를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어둠, 사내의 검은 장포였다. 사내의 신형이 허공을 향해 솟구침과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흑철검(黑鐵劍)이 비명을 지르며 칼집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채채채채챙―!
그것은 칼과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밤의 장막을 날카로운 가위로 한 번에 잘라내는 듯한 파극(破隙)의 울림이었다. 사내의 칼끝이 허공을 가르며 호를 그리자, 먹물을 짓이겨 허공에 뿌린 것 같은 묵직하고 서늘한 검기(劍氣)가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폭발했다.
쏟아져 내리던 수십 발의 쇠화살이 사내의 전면을 감싼 보이지 않는 기벽(氣壁)에 부딪히며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화살촉들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고, 반으로 쪼개진 쇠붙이들이 사방의 고목 등걸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사내는 단 반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살수들의 독시와 빗방울을 홀로 막아내며, 오직 한 자루 검으로 거대한 성벽처럼 우뚝 버티고 섰다.
그의 등 뒤에 남겨진 소녀의 젖은 머리칼 위로는 단 한 방울의 독물도, 단 한 조각의 부러진 화살촉도 튀지 않았다. 사내의 넓은 등판이 모든 살의와 비바람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크윽……!"
"괴, 괴물 같은 놈! 대체 정체가 뭐냐!"
나뭇가지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흑월 살수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흑월문에서도 손꼽히는 정예 척살조의 집중 사격을 정면에서, 그것도 일격에 흔적도 없이 쳐내는 무위는 강호 어디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검 끝에서 피어오른 그 서늘하고도 침중한 기운은, 그들이 본단에서 마주했던 절대적인 공포, 문주 혁련오의 그림자와도 기괴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사내의 낡은 짚신이 진창을 짓이겼다.
콰직!
사내의 신형이 빗속으로 지워졌다. 눈 깜짝할 찰나, 먹물이 번지듯 허공으로 솟구친 사내는 이미 가장 가까운 아름드리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당도해 있었다. 빗방울이 그의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기도 전에, 메마른 읊조림이 허공을 갈랐다.
"첫 번째."
스각―!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섬전이 번뜩였다.
나뭇가지 위에 웅크리고 있던 살수의 목에서 붉은 분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한 채, 살수의 동공이 허망하게 풀렸다. 사내가 손목을 가볍게 털어내자, 끈적하게 달라붙었던 핏물이 빗줄기와 함께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쿵!
시체가 진흙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전에, 사내의 신형은 이미 옆 나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두 번째 살수가 단도를 뽑아 들며 몸을 비틀었으나, 사내의 검은 이미 그의 쇄골을 부수고 폐부를 꿰뚫은 뒤였다.
"두 번째."
"커헉……!"
군더더기 없는 참살. 망설임도, 자비도 섞이지 않은 지극히 효율적인 살인술이었다. 흑월문의 살수들이 어둠 속에서 구사하는 비열한 암살술보다 훨씬 더 깊고, 처절하며, 압도적인 실전의 검로였다. 십 년간 뼈를 깎는 수라장을 헤쳐 온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죽음의 궤적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둘이 목숨을 잃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의 살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공포를 느꼈다.
"퇴각하라!"
"보고해야 한다…… 본단에 이자의 존재를……!"
살수들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어둠과 빗줄기를 틈타 도망치는 것은 살수들의 본능이었다. 세 갈래로 흩어져 깊은 안개 속으로 파고드는 자객들의 그림자를 보며, 사내는 더 이상 쫓지 않았다. 그의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물이 세찬 폭우에 씻겨 내려가며 투명하게 흐려졌다.
산천은 다시 지독한 고요 속에 잠겨들었다. 살수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귓전을 때리는 것은 오직 나뭇잎을 거칠게 짓이기는 빗소리와 바람의 울부짖음뿐이었다.
사내는 허공에서 낙엽처럼 가볍게 진창 위로 내려앉았다. 그의 낡은 짚신이 바닥을 디딜 때, 흙탕물조차 튀지 않았다. 사내는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소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일어나라."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참극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흑월문에서 가장 가혹한 수련을 거쳐 길러진 정예들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던 잔혹한 사냥꾼들이, 이 사내의 칼날 앞에서는 길섶의 잡초보다 허망하게 베어져 나갔다.
소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진흙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꺾인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격통에 신음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소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벼랑 한구석, 거대한 암괴가 처마처럼 비스듬히 튀어나와 비를 가려주는 바위틈 안으로 그녀를 옮겼다.
바위틈 밑은 다행히 물기가 닿지 않아 마른 흙이 드러나 있었다. 사내는 소녀를 차가운 벽에 조심스레 기대어 앉힌 뒤, 진창에 떨어져 있던 반쪽짜리 옥패를 주워 올려 그녀의 무릎 위에 무심히 던져놓았다.
소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 위의 옥패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새겨진 화상 흉터가 차가운 옥의 감촉에 닿아 욱신거렸다.
바위 밖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굵은 낙수가 동굴 입구를 커튼처럼 가로막고 있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기괴하고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사내는 바위 동굴 입구 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십 년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낡은 갈대 삿갓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사내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단정하고 굳은 턱선, 십 년 세월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거칠게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 그러나 그 균형 잡힌 얼굴의 왼쪽 절반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사나운 불길이 핥고 지나간 살갗은 가죽처럼 굳어 울퉁불퉁했고, 붉고 검은 흉터가 뺨에서부터 귀밑, 굵은 목덜미까지 흉측한 뱀처럼 뻗어 내려가 있었다.
소녀의 시선이 그 화상 흉터에 못 박혔다. 소녀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기억의 가장 깊은 밑바닥, 봉인해 두었던 십 년 전의 참극이 용암처럼 솟구쳐 올랐다. 타오르던 붉은 대들보,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그 불구덩이 속에서 울부짖으며 불길을 헤치던 누군가의 거대한 그림자.
소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무릎 위의 옥패를 으스러져라 움켜쥔 소녀의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소녀는 피를 머금은 메마른 목소리로, 증오와 공포가 뒤엉킨 비수를 사내를 향해 토해냈다.
"……문주가 말했다."
사내는 품에서 마른 천을 꺼내 검신에 묻은 핏자국을 묵묵히 닦아낼 뿐이었다.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십 년간 흑월의 어둠 속에서 제 심장을 갉아먹으며 자라난 독기 어린 원망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타고 바위 동굴 안을 시퍼렇게 울렸다.
"우리 집을 불태운 자……."
소녀의 두 눈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피 묻은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은 증오였고, 배신감이었으며, 잃어버린 혈육을 향한 절규였다.
"청월장을 잿더미로 만들고…… 내 부모와 형제들을 모조리 불구덩이에 던져 죽인 그 방화범이……."
소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사내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바로 당신이라고."
사내의 손이 우뚝 멈췄다.
피를 닦아내던 마른 천 위로, 삿갓을 벗은 사내의 젖은 머리칼에서 빗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소녀의 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타오르는 불길이었고, 사내의 눈은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 가라앉은 차가운 심연이었다.
바깥에서는 천둥이 우르릉거리며 대지를 뒤흔들었으나, 바위 밑에 드리운 지독한 침묵을 찢지는 못했다.
'아니다'라는 한마디면 족했다.
그것은 모함이라고, 흑월문주 혁련오의 간악한 세뇌에 속은 것이라고, 십 년 전 그 불길 속에서 나 역시 모든 것을 잃고 지옥을 기어 나왔노라고 소리치면 그만이었다. 그 한마디면 이 어린아이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 잔혹한 오해의 쐐기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흉측한 화상 흉터가 드리워진 얼굴로,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아 살수로 자란 소녀의 저주와 증오를 제 온몸으로 오롯이 받아내듯,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은 폭우보다 무거웠고, 그 지독한 침묵이야말로 소녀에게는 가장 확실한 자백처럼 다가왔다. 소녀의 절망에 찬 흐느낌이 마침내 빗소리 속으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