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불길 속의 옥패
흑월문(黑月門) 본단의 지하 전각은 언제나 깊은 밤의 가장 밑바닥 같았다.
바깥세상이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청흑색 암벽은 태양의 온기를 단 한 조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깎아지른 석벽을 따라 검붉은 기름을 태우는 화로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타닥, 타다닥 메마른 파열음을 토해냈다. 타오르는 불꽃은 붉다기보다는 응고된 핏빛에 가까웠고, 그 불길이 거친 암벽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흡사 지옥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원귀처럼 길고 흉측하게 일렁였다.
전각의 가장 깊고 높은 곳, 열두 개의 흑철 계단 위에 거대한 옥좌가 솟아 있었다.
먹빛 비단 장막이 옥좌 앞을 두텁게 가리고 있어 그 안에 군림한 자의 형체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장막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하고 차가운 기운만이 전각 안의 공기를 얼음장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얼어붙고 살갗이 베이는 듯한 침묵. 그 살인적인 침묵을 깨고 바닥을 기어가는 비루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문…… 문주님……."
기련산맥 어귀의 객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살수 조장이었다.
그는 흑철 계단 아래, 차디찬 석판 바닥에 이마를 처박은 채 사시나무 떨듯 전신을 경련하고 있었다. 객잔을 빠져나와 흑월문 본단에 당도하기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피를 토하듯 달렸건만,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와 공포는 가실 줄을 몰랐다. 온몸을 뒤덮은 피비린내와 메케한 잿더미 냄새. 그것은 도살당한 부하들의 피이자, 동시에 삿갓을 쓴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뿜어내던 지옥 같은 과거의 냄새였다.
"말하라."
장막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쇳가루를 갈아 넣은 듯 서늘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목소리였다. 성량을 전혀 높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파는 전각을 떠받치는 거대한 석주들을 은은하게 진동시켰다. 흑월문주 혁련오(赫連旿). 강호의 피를 말리고 수많은 문파의 이름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잔혹한 지배자의 진신내력이 깃든 일갈이었다.
"기련산맥 어귀…… 이름 없는 낡은 객잔에서…… 칠호 조 전원이 몰살당했습니다."
조장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바들바들 떨렸다. 이마를 단단한 바닥에 찧을 때마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그는 이마가 깨지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장막 뒤에 앉은 존재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영혼마저 찢어발길 수 있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칠호 조가 당했다라. 객잔에 숨어들었다던 청풍검문의 패잔병 놈들이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결코 청풍검문의 잔당 따위가 아닙니다! 그곳에…… 삿갓을 눌러쓴 정체 모를 괴한이 있었습니다. 얼굴에 흉측한 화상 흉터를 뒤집어쓰고, 칠흑빛 검을 찬 사내였습니다……."
장막 너머의 기류가 미세하게 얼어붙었다.
조장은 식은땀과 피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간신히 치켜들었다. 삿갓 밑으로 번뜩이던 그 푸르스름한 안광, 전각의 어둠을 모조리 베어 가르던 먹물 같은 검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복부가 죄어들고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자는…… 그 괴물은 단 세 합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탁주를 들이켜며 의자에 앉은 채 검을 뽑았고, 단 한 번의 횡참으로 넷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저를 살려 보내며…… 문주님께 반드시 전하라 하였습니다."
조장은 바짝 타들어 간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전갈의 내용을 입에 담는 순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침묵한다면 이 자리에서 뼈와 살이 갈려 나갈 터였다.
"말하거라. 그자가 무어라 지껄였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읊어라."
"……십 년 전, 불탄 청월장의 잿더미에 묻어둔 빚을 받으러…… 빚쟁이가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전각 안의 모든 불꽃이 일제히 납작하게 엎드렸다.
벽면의 화로에서 타오르던 핏빛 불길이 마치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린 것처럼 검게 물들며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조장은 숨을 멈추었다. 숨을 참은 것이 아니라, 전각 안을 채우고 있던 공기 자체가 모조리 소멸해버린 것 같았다. 폐포가 타들어가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압도적인 살기.
십 년 전. 청월장(靑月莊). 잿더미. 그리고 빚쟁이.
장막 너머의 흑월문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폭풍 같은 분노의 포효도, 임무에 실패한 졸개를 향한 가혹한 질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전각 전체를 가루로 짓이기고 남을 만큼 무겁고 음산했다. 장막 틈새로 언뜻 비친 거구의 실루엣은 차가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두 개의 안광만이 시퍼런 도깨비불처럼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청월장…….'
문주의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천천히 짚었다.
팔걸이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던 흑철 용두가 문주의 장포 밑에서 흘러나온 칠흑의 진기에 닿자마자, 비명도 없이 바스러져 고운 흑색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장원을 집어삼키던 거대한 화마. 타오르는 대들보가 무너지며 터져 나오던 수백 명 동문들의 처절한 단말마. 핏물과 살 타는 연기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던 한 쌍의 맑고 푸른 눈동자. 죽었어야 할 자였다. 아니, 그 불길 속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살아 있었단 말인가. 사제(師弟)…….'
문주는 끝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순간, 십 년 동안 철저히 묻어두었던 과거의 업화가 전신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목구멍 안쪽에서 서늘하고 뒤틀린 냉소만이 짧게 부서져 나왔다.
침묵은 잔혹하도록 길었다. 바닥에 엎드린 조장은 공포에 질려 피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전신의 근육을 바들바들 경련했다. 일각이 마치 겁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지던 찰나, 마침내 장막 너머에서 묵직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물러가라."
"예……? 예, 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주님! 이 목숨 다 바쳐……!"
조장은 바닥에 머리를 마구 찧으며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가 전각의 육중한 철문을 향해 몸을 돌려 세 걸음을 채 내딛기도 전이었다. 장막 뒤편에서 파공음조차 일으키지 않고 한 줄기 칠흑의 검기가 허공을 미끄러지듯 갈랐다.
서걱.
베어 넘기는 소리조차 맑고 가벼웠다.
조장의 몸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졌다. 그의 목덜미를 따라 가느다란 붉은 선이 번져나가는가 싶더니, 찰나의 순간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피는 분수처럼 솟구치지 않았다. 잘려 나간 목의 단면은 검은 서리에 그을린 것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빛을 삼키는 금기의 무공,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잔재였다.
"빚이라."
문주의 나직한 읊조림이 텅 빈 전각의 적막을 갈랐다.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먼지만도 못한 것을 보았다는 듯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어디 와서 받아 가 보아라. 네놈의 하찮은 목숨이 그 빚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둠이 다시금 전각을 집어삼켰다. 화롯불의 마지막 불씨조차 꺼져버린 지하 전각에는 오직 뼛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묵빛 한기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밤안개는 짙고 축축했다.
기련산맥 깊은 골짜기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길은 인적이 끊긴 지 수십 년은 된 듯 잡초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무릎 높이까지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낮 동안 쏟아져 내리던 비는 그쳤으나, 질척거리는 흙탕물과 썩은 나뭇잎이 짓이겨져 발을 내딛을 때마다 눅눅한 파열음이 숲의 고요를 깨뜨렸다.
사내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머리에 푹 눌러쓴 삿갓 챙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이 턱선의 일그러진 화상 흉터를 타고 흘러내렸다. 십 년 전의 참혹한 화마가 새겨놓은 흉터는 짓무르고 굳어져 본래의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게 뒤틀어 놓았으나, 짙은 눈썹 아래 박힌 두 눈만큼은 밤안개 속에서도 서늘한 푸른빛을 형형하게 품고 있었다.
등 뒤에 비스듬히 맨 칠흑빛 검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낮에 객잔에서 베어 넘긴 살수들의 선혈은 이미 닦아냈으나, 검신 자체가 오랜 세월 머금어온 원한과 업보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묵직한 낙인처럼 사내의 주위를 맴돌았다.
'열두 권의 장부.'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가슴팍 안쪽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 장포 안쪽 깊은 곳에 품어둔 푸른 옥패가 손바닥을 통해 미약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고동을 전해오고 있었다. 청월장의 상징이자, 스승이자 양부였던 장주 서문월청이 어린 시절 자신의 허리춤에 직접 매어주었던 반쪽의 옥패였다.
그것은 단순한 문파의 신표가 아니었다. 십 년 전, 불타 무너져 내리던 장원에서 스승이 목숨과 맞바꾸며 건네준 유일한 유품이자, 기억과 자아가 지워져 가는 무명의 심연 속에서 아직 자신이 인간으로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닻이었다.
'검은 달의 계약에 이름을 팔아넘긴 자들.'
사내의 눈빛이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간에 돌림병처럼 번져나가는 무명병(無名病)의 실체. 그것은 하늘의 노여움도, 단순한 독이나 역병도 아니었다. 흑월문이 강호의 무인들을 영혼까지 지배하기 위해 펼쳐놓은 거대한 덫, 바로 검은 달과의 사악한 계약이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가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본래의 '이름'과 '기억'을 저당 잡히는 금단의 주술. 이름을 빼앗긴 자는 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껍데기만 남아 흑월문의 살인 인형으로 전락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시발점에 십 년 전 청월장의 멸문이 있었다.
사형이었던 혁련오.
장주 서문월청의 첫 제자로서 누구보다 장원의 비전을 깊이 이어받았던 사형은, 장주의 자리에 눈이 멀어 검은 달의 대모와 손을 잡았다. 그 결말이 무엇이었던가. 하룻밤 사이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불길, 장원을 가득 메웠던 사제와 사매들의 비명, 그리고 스승의 참혹한 죽음이었다.
'혁련오. 네놈은 정녕 네가 무엇을 팔아넘겼는지 알고 있는가.'
사내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백색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기련산 깊은 곳, 흑월문 본단이 똬리를 틀고 있는 흑월곡(黑月谷)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길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벨 것이고, 그 빚의 종착지에 자신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십 년 전 그 불길 속에서 사내의 삶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스르륵.
그때였다.
축축하게 젖은 바람결을 타고 기이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피비린내였다. 그러나 며칠 묵은 썩은 피의 냄새가 아니었다. 살갗이 찢기고 혈관이 터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하고 뜨거운 생혈(生血)의 냄새였다.
사내의 걸음통이 우뚝 멎었다.
그는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 앞쪽을 응시했다. 길옆으로 쓰러진 거대한 마른 고목나무 아래, 검은 진흙더미 위로 무언가 웅크리고 있는 형체가 보였다.
사람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다가갔다. 발소리를 완전히 지워버린 유령 같은 보법이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쓰러진 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거한의 무인이 아니었다.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한 왜소한 체구의 소녀였다.
소녀는 온몸에 먹빛 야행복을 걸치고 있었으나, 옷자락 곳곳이 예리한 도검에 베이고 찢겨 너덜너덜했다. 드러난 어깨와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쉼 없이 배어 나와 검은 옷을 더욱 짙게 적시고 있었다.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흙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긁어모으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안개 낀 숲속에 위태롭게 울려 퍼졌다.
사내가 세 걸음 앞까지 다가섰을 때였다.
팟!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소녀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 움직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빠르고 표독스러웠다. 전신에 중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살수의 신법이었다.
소녀의 찢어진 소맷자락에서 번뜩이는 한 줄기 은광이 뿜어져 나왔다.
손바닥만 한 흑철 단검이었다. 날 끝에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비수가 사내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겨누고 짓쳐 들었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찰나에도 적의 숨통을 함께 끊어놓겠다는 처절한 살의가 담긴 일격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등 뒤의 칠흑검을 뽑지도 않았다. 사내는 그저 검지를 가볍게 튕겨 날아드는 단검의 옆면을 툭 쳤을 뿐이었다.
챙!
청명한 쇠 소리와 함께 단검의 궤적이 허공으로 빗겨나갔다.
단검을 쥐고 있던 소녀의 손목이 꺾이며 거대한 반탄력이 소녀의 전신을 덮쳤다.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던 소녀의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진흙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큭……!"
소녀는 진흙 바닥을 구르면서도 끝내 단검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피를 뚝뚝 흘리며, 상처 입은 어린 맹수처럼 웅크린 채 사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산발이 된 흑발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나, 사내를 응시하는 두 눈만큼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목구비. 사내의 가슴 한구석이 까닭 모르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먼 기억의 저편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눈매였다. 그러나 그 감정을 채 곱씹기도 전에, 사내의 시선이 소녀의 드러난 손목으로 향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소녀의 오른쪽 손목.
찢겨 나간 소맷자락 아래, 하얗다 못해 투명한 살갗 위에 짙은 먹물로 새겨진 문신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검은 초승달.
빛을 집어삼킨 채 불길하게 휘어져 있는 칠흑의 반월(半月) 문양이었다.
사내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흑월문의 낙인……!'
그것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었다. 흑월문에서 어린아이들을 거두어 혹독한 살수로 길러낼 때, 영혼에 새겨넣는 주술적 속박의 낙인이었다. 저 문신이 새겨진 자는 결코 흑월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문주의 명령 한마디에 제 목숨조차 초개처럼 내던져야 하는 사냥개로 전락한다.
이토록 어린 소녀가 흑월문의 직속 살수란 말인가.
게다가 소녀의 몸에 난 무수한 상처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다 생긴 것이 아니었다. 상처의 형태와 베인 각도, 그것은 명백히 흑월문 고유의 살진(殺陣)과 암기술에 의해 난도질당한 흔적이었다. 같은 문파의 동료들에게 쫓겨 여기까지 도망쳐 온 꼴이었다.
"누구냐."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묵직한 내력은 안개마저 밀어낼 듯 사방을 짓눌렀다.
"흑월문의 살수가 왜 동문들에게 쫓기며 이 깊은 산골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하얗게 질린 손가락. 소녀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상이 심각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꺼…… 져라."
소녀의 목소리는 바짝 갈라져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죽여버리기 전에……."
어린아이의 허세라고 치부하기엔 그 눈빛에 서린 살기가 너무도 짙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특유의 서늘함. 그러나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삿갓 밑으로 드러난 화상 흉터가 달빛 없는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일렁였다.
"그 몸으로는 세 걸음도 더 가지 못한다. 손목의 맥이 이미 반쯤 끊어졌고, 내력이 역류하고 있군. 억지로 검기를 끌어올렸다간 심맥이 터져 즉사할 것이다."
"닥쳐……!"
소녀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말대로, 단전을 쥐어짜 내력을 끌어올리려 하자마자 컥 하는 비명과 함께 한 바가지의 피를 토해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단검이 진흙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소녀의 시야가 하얗게 흐려지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며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앞에 선 삿갓 쓴 사내의 형체가 둘로, 셋으로 겹쳐 보였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소녀는 진흙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진물이 파고들었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빚을 갚기 전에는…… 그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어…….'
소녀는 떨리는 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피로 젖은 야행복 안쪽, 품속 깊은 곳을 더듬는 손길이 필사적이었다. 사내는 그 움직임을 경계하지 않았다. 품에서 암기를 꺼내 던진다 해도 지금의 소녀에게는 자신을 상처 입힐 힘이 남아있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품에서 나온 것은 비수도, 독주머니도 아니었다.
스륵.
소녀의 피 묻은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물건.
축축한 밤안개 속, 희미하게 산란하는 밤하늘의 기운을 받아 은은하고 청명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돌조각이었다.
반으로 쪼개진 옥패(玉牌).
정교하게 조각된 반쪽의 달, 그리고 그 표면에 유려하게 새겨진 푸른 구름 문양.
그것을 본 순간.
쿵!
사내의 귓전에서 거대한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멎었다.
안개가 흩날리는 소리도,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소녀의 거친 숨소리조차 모조리 지워졌다. 사내의 시야 속에서 오직 소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그 푸른 옥패만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시야 전체를 가득 채웠다.
'저것은…….'
십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물건이었다.
기련산 청월장. 사부 서문월청이 손수 깎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장원의 신표.
사내는 떨리는 시선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만졌다. 자신의 품 안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십 년 전, 불타 무너져 내리던 장원의 전각 안에서 스승의 차가워진 손에 쥐여 있던 반쪽의 옥패.
그리고 지금, 소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 옥패의 나머지 반쪽이었다.
화마가 장원을 집어삼키던 그 지옥 같던 밤.
들보가 무너지고 불길이 사방을 가로막았을 때, 사내는 보았었다. 불타는 전각의 저편, 사형 혁련오의 등 뒤로 사라져가던 어린아이들의 그림자를. 장주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 미처 구하지 못하고 불길 속에 남겨두어야만 했던, 십 년 동안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 있던 통한의 기억.
'살아…… 있었단 말인가?'
사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떤 강적 앞에서도, 수십 명의 살수가 목을 죄어오던 객잔의 살진 속에서도 단 한 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던 사내였다. 그의 심장은 이미 십 년 전 잿더미와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뛰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사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등 뒤에 맨 검을 쥐는 오른손이,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주체할 수 없이 잘게 경련했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홀로 걸어오며 수백 번의 사선을 넘나들었으나, 이토록 손이 떨려본 적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없었다.
"너……."
사내의 메마른 목구멍에서 쥐어짜 낸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옥패를…… 어디서 났느냐."
사내는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기세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파도가 안개처럼 터져 나왔다. 사내는 쓰러져가는 소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말해라! 그 옥패를 어디서 얻었단 말이냐! 대체 네가……!"
소녀는 사내의 손길을 피해 간신히 몸을 비틀었다.
이미 풀려가는 동공이었으나, 소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손바닥 위의 옥패를 사내의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옥패에 묻은 소녀의 붉은 피가 푸른 옥의 표면을 타고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십 년 전, 불길 속에서 흘러내리던 피눈물처럼.
소녀의 갈라진 입술이 비틀리며 처절한 조소가 번졌다. 피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사내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기에 족한 한마디였다.
"이 옥패의 주인을……."
소녀의 붉은 피가 옥패의 갈라진 단면을 서서히 채웠다.
"죽이러…… 왔다."
말을 마친 소녀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단검이 진흙 바닥에 완전히 파묻히고, 소녀의 작은 몸이 사내의 발치로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차가운 밤안개 속, 삿갓 쓴 사내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채 소녀의 손에 들린 반쪽짜리 옥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십 년 전 불타는 장원에 버려두고 온 옥패.
그리고 그 옥패의 주인을 죽이러 왔다는 소녀.
먹빛 안개 너머, 하늘에 떠오른 검은 달이 서늘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