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객잔의 밤
비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퍼부어댔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리는 폭우는 기련산맥(祁連山脈) 줄기를 타고 흐르는 험준한 산도를 진흙탕으로 뭉개버렸다. 질척거리는 황톳길은 사람의 발목을 굶주린 짐승처럼 덥석덥석 삼켜댔고, 처마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낙숫물 소리는 메마른 뼛속을 쇠송곳으로 두드리는 파열음처럼 음산했다. 산등성이를 집어삼키며 흘러내린 짙은 밤안개가 길의 경계를 완전히 지우고, 온 세상의 윤곽을 먹물 단지에 빠뜨린 듯 검게 물들였을 때에야 비로소 사나운 빗줄기의 꼬리가 잦아들었다.
황량한 산길 어귀, 어둠 속에 위태롭게 웅크린 낡고 삐걱거리는 객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등롱 하나가 비바람에 젖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붉은 천에 굵은 먹으로 갈겨쓴 '평안객잔(平安客棧)'이라는 네 글자는 이미 거센 빗물에 씻겨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안(安)' 자의 마지막 삐침 획 하나가 붉은 천 아래로 피눈물처럼 길게 번져 내리고 있었다. 평안이라는 이름표를 달았으되, 결코 평안할 수 없는 흉흉한 밤의 징조였다.
끼이익.
기름기 하나 없이 메마른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객잔의 널문이 열렸다. 눅눅한 흙내와 폐부를 찌르는 비린 밤공기가 객잔 안쪽의 탁한 온기 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검은 삼베 도포를 두르고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사내 하나가 문턱을 넘었다. 도포 자락 끝에서 머금고 있던 빗물이 한 방울씩 흙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사내의 허리춤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낡은 검 한 자루가 무심하게 매달려 있었다. 검집은 옻칠이 거칠게 벗겨져 속살인 흰 나무 살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자루를 동여맨 무명천은 오랜 세월 피와 땀에 찌들어 굳은 먹물처럼 거무튀튀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사내는 객잔 안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말없이 구석진 탁자로 걸음을 옮겼다. 기둥 뒤편, 등롱의 희미한 불씨조차 가닿지 않는 가장 어둡고 서늘한 자리였다.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은 사내는 머리에 쓴 삿갓을 벗지 않았다. 삿갓 챙이 드리운 짙은 그늘 아래로 언뜻 비치는 하관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턱선에서 시작되어 귓바퀴 밑을 지나 목덜미까지 흉측하게 이어지는 거대한 화상 흉터가 마치 불에 타다 남은 가죽처럼 비틀려 굳어 있었다.
"저, 저기…… 손님?"
행주를 말아 쥔 채 다가오던 객잔 점소이가 사내의 흉터를 훔쳐보더니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사내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히 옷을 적신 찬 빗물 냄새가 아니었다. 십 년 동안 햇볕 한번 들지 않은 잿더미 밑바닥을 파헤쳤을 때에나 날 법한, 지독하게 서늘하고 건조한 탄내가 젖은 삼베 옷자락 틈새로 서서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차 한 잔."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숫돌에 무딘 쇳조각을 힘주어 갈아낼 때 울리는 메마른 찰과음과도 같았다.
"예? 아, 예…… 저, 손님. 굳이 술이나 뜨끈한 장국밥은 필요 없으십니까요? 사흘 내리 폭우가 쏟아져서 날이 뼛속까지 시릴 텐데요. 방이라도 하나 잡으시면 장작을 지펴드릴 수도……."
"식은 차면 족하다."
군더더기 없는 단호한 거절에 점소이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망치듯 주방으로 달려간 점소이는 이내 이가 성하지 않은 투박한 사기그릇에 멀건 찻물을 담아 내왔다. 김 한 줄기 오르지 않는, 이미 찻잎을 우려낸 지 반나절이 지나 누렇게 뜬 식은 찻물이었다.
사내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굵은 뼈마디의 오른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손바닥과 검지 안쪽에 겹겹이 굳은살이 박인 전형적인 검객의 손이었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의 손끝에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한 모금, 차가운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사내의 깊은 눈동자가 처마 밖의 검은 장막을 향해 멎었다.
객잔 안은 무거운 긴장감에 짓눌려 있었다.
사내 외에도 대여섯 명의 무인이 탁자 둘을 차지하고 있었다. 흙먼지에 절은 모시옷을 입은 험상궂은 표사 둘과, 허리춤에 표주박을 차고 수시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낭인 세 명이었다. 그들은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끼고 숨을 죽인 채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구석에 박힌 사내의 침묵이 길어지자, 잊으려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강호의 무지렁이들이 비 내리는 밤 객잔에 틀어박혀 나눌 이야기란 결국 피비린내 나는 참극에 관한 것뿐이었다.
"……정말 그 청풍검문(淸風劍門)이 하룻밤 사이에 자취도 없이 쓸려 나갔단 말인가?"
낭인 하나가 술잔을 입술에 대지도 못한 채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늙수그레한 표사가 급히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쉿, 하고 험악하게 눈치를 주었다.
"목소리 낮추게, 이 사람아. 입술을 잘못 놀렸다간 혀가 뽑히기 전에 모가지가 먼저 달아나는 수가 있어."
"아니, 표두 님. 청풍검문이라면 화북 일대에서 십 대 문파 바로 아래로 손꼽히던 명문이 아닙니까? 문주인 '일자청풍검' 유 대협만 해도 성명절기인 청풍삼십육검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던 일류 고수인데…… 그런 문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요."
"일류 고수? 핫, 그놈들 앞에서는 그 잘난 일류니 절정이니 하는 허울 좋은 문파의 명성 따위는 썩은 지푸라기만도 못해."
표사가 탁주를 단숨에 털어 넣으며 끔찍한 잔상을 떨쳐내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내가 지난달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풍검문이 있던 터를 직접 지나쳤네. 칼에 베여 숨이 끊어진 자들은 차라리 명복을 빌어줄 만했어. 진짜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건…… 살아남은 자들이었지."
구석에서 식은 찻물을 넘기던 삿갓 쓴 사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사기그릇 수면에 아주 얇은 파문이 일었다.
"살아남았는데 눈을 뜨고 볼 수 없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젊은 낭인이 침을 꼴깍 삼키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말 그대로 껍데기만 남았더군. 몸에는 칼자국 하나 없는데, 눈동자를 허옇게 까뒤집은 채 멍청하게 침을 흘리며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어. 자기가 누구인지, 부모의 성씨가 무엇인지, 심지어 평생을 쥐고 살았던 칼자루의 쓰임새조차 몽땅 잊어버린 채 짐승처럼 울부짖더란 말일세. 기억을, 이름을 몽땅 흑월의 아가리에 파먹힌 게야."
"이름을…… 먹힌다고요?"
"그래. 흑월문(黑月門)에 원한을 사거나 손을 댄 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돼. 그자들은 단순히 숨통을 끊는 자객이 아니야.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쌓아 올린 인연과 기억, 그 영혼의 흔적 자체를 먹줄로 지워버리듯 파먹어 치우지. 강호의 장로들은 그걸 '무명병(無名病)'이라 부르더군."
표사의 음성이 공포로 인해 점점 더 짓눌려 기어들어 갔다. 객잔 안의 공기가 기름을 끼얹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방 앞의 점소이는 물론, 카운터 뒤에서 장부를 정리하던 늙은 객잔 주인마저 붓을 멈춘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똑, 똑 소리만이 팽팽한 정적을 메웠다.
"도대체 그 흑월문이란 곳의 뿌리가 뭡니까? 십 년 전만 해도 강호에 그런 문파는 그림자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십 년 전……."
표사가 술잔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그의 흐리멍덩한 눈가에 짙은 전율이 어렸다.
"십 년 전, 기련산 동쪽 자락의 청월장(靑月莊)이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되었던 참사를 기억하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던 그 화염 속에서…… 무언가 기괴하고 불길한 검은 기운이 잉태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청월장의 불길이 꺼지고 장주 서문 대협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된 그날 이후부터, 흑월문이라는 괴물이 강호의 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어. 마치 빚을 독촉하러 온 지옥의 사신들처럼 말이야."
"빚이라니요? 대체 무슨 빚을……."
"그걸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그 빚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영혼을 빨아먹힌 자들과, 흑월의 문주만이 알 뿐이지. 다만 강호에 떠도는 명백한 사실은 딱 하나뿐이야. 흑월문의 살수들이 칼을 빼 들고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조차 제 이름을 지닌 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낭인들은 질린 낯빛으로 차갑게 식은 탁자만을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객잔 안을 바위처럼 짓눌렀다.
어느새 바깥의 빗소리는 완전히 멎어 있었다. 비가 그친 자리에는 물안개만이 강물처럼 자욱하게 차올라 객잔의 찢어진 문풍지를 눅눅하게 적시고 있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지독한 고요였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이 아니었다. 거대한 포식자가 숨을 죽이고 발톱을 숨긴 채 먹잇감의 목덜미를 노릴 때 풍기는 살육의 예감이었다.
스스스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젖은 풀잎을 스치며 바닥을 기어오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둥 뒤 탁자 구석의 사내가 쥐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잔의 밑바닥이 삐걱거리는 탁자에 닿는 순간, '탁' 하는 작고 청아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객잔 안의 모든 공기를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큭……!"
창가 쪽에 앉아 있던 표사가 별안간 가슴팍을 움켜쥐며 숨을 헐떡였다. 살을 에어낼 듯한 음산한 한기가 사방의 벽과 문살을 뚫고 객잔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대들보에 매달린 등롱의 불빛이 푸르스름한 귀화(鬼火)처럼 일렁이더니, 미친 듯이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냐!"
낭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리춤의 환도를 뽑아 들었다.
채앵!
그것이 객잔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 신호였다.
콰아아앙!
객잔의 정면 목문과 좌우의 살창이 동시에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날카로운 나뭇조각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짙은 밤안개 속에서 다섯 개의 검은 인영이 한 점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르며 들이닥쳤다.
칠흑 같은 야행의에 몸을 감싸고, 얼굴에는 기괴한 반달 문양이 음각된 흑철 가면을 뒤집어쓴 자들.
흑월문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핏빛 살기를 머금은 굽은 형태의 기형 비수(匕首)가 쥐어져 있었다. 살수들은 객잔 안에서 공포에 질려 나뒹구는 표사나 낭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섬뜩하게 가라앉은 동공은 오직 한 사람, 객잔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구석에 삿갓을 눌러쓴 채 앉아 있는 사내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죽여라."
가장 앞장선 살수의 입술 틈새로 쇳소리 섞인 명령이 떨어졌다.
쉬애애액!
그와 동시에 다섯 자루의 비수가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투척이 아니었다. 비수들은 비행하는 도중 허공에서 서로의 궤적을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흑색의 기류를 형성했다. 비릿한 쇠 냄새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암기술. 표사와 낭인들은 그 무시무시한 기파에 짓눌려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사내의 정수리, 인후, 심장, 단전, 그리고 두 무릎을 동시에 꿰뚫고 들어오는 다섯 줄기의 파멸. 피할 틈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물망처럼 좁혀오는 비수의 살진은 사내의 육신을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갈가리 찢어놓을 기세였다.
그러나 삿갓을 쓴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을 일으키지도, 칼자루를 고쳐 쥐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왼손 엄지가 허리춤에 걸린 낡은 검집의 코등이를 아주 미세하게 툭 밀어 올렸을 뿐이었다.
차르릉.
맑고 청명한 파열음이 객잔 전체를 묵직하게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쇳조각이 칼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순백의 화선지 위에 진한 먹물이 튀어 번져나가는 소리였고, 어둠이 그보다 더 깊은 심연의 어둠을 집어삼키는 파동이었다.
사내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틀어쥐는 찰나, 객잔 내부의 공기 흐름이 일순간 뒤틀리며 왜곡되었다.
흑과 백의 단면.
타오르던 등롱의 불빛도, 살수들의 번뜩이는 안광도,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던 비수들의 붉은 잔상마저 순식간에 색채를 잃고 흑백의 그림처럼 정지했다. 오직 사내의 검끝에서 번져 나온 묵빛의 궤적만이 허공을 향해 거대한 붓질을 하듯 휘몰아쳤다.
절도 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으며, 극도로 서늘한 일검.
채채채채챙!
단 한 번의 폭발적인 마찰음이 고막을 찢었다.
사내의 미간을 향해 쇄도하던 다섯 자루의 비수가 그의 코앞 불과 반 뼘 거리에서 허공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다음 찰나, 비수의 도신 한가운데로 가느다란 검은 선이 그어지더니, 쇳조각들이 세로로 깨끗하게 반 토막이 나며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사내가 뿜어낸 검기가 날아오던 암기의 정중앙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가르고 지나간 탓이었다.
"……?!"
공중에서 짓쳐 들던 살수들의 눈에 말도 안 되는 경악이 번졌다.
인간의 손으로 펼쳐낼 수 있는 검로가 아니었다. 일어서지도 않은 채, 칼집에서 도신을 채 반 뼘도 밀어내지 않은 발도술의 검기만으로 다섯 개의 암기를 모조리 부숴버리다니.
"괴물 같은 놈……!"
기세를 잃지 않은 살수 넷이 품속에서 또 다른 기형도를 꺼내 들며 일제히 사내의 사방을 에워싸고 짓쳐 들었다. 그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세 갈래, 네 갈래로 분화하며 벽과 기둥을 박차고 들어와 사방에서 빈틈없는 살진을 엮어왔다.
사내는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릿하고 완만했으나, 거대한 암봉이 대지에서 솟구쳐 오르듯 묵직한 위압감이었다.
스그적!
사내의 검이 마침내 낡은 나무 검집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도신. 빛을 튕겨내기는커녕 주변의 미약한 불빛마저 제 안으로 빨아들이는 듯한, 흑철보다도 어두운 묵빛의 칼날이었다.
검이 허공을 완만하게 회전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밤하늘에 서글프게 차오르는 초승달의 형상과 같았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
빛을 집어삼키는 검은 초승달의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사위가 얼어붙은 듯 쥐죽은 고요 속으로 침잠했다.
공중을 쇄도하던 네 명의 살수가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그들의 목덜미와 가슴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묵색 선이 새겨지더니, 그 틈새로 검붉은 선혈이 마치 뿜어져 나오는 먹물처럼 터져 흘렀다.
푸화아악!
"크아악!"
"커흐윽……!"
단 한 번의 참격.
허공을 날던 네 명의 살수는 바닥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흙바닥에 처박혔다. 그들의 몸은 마치 영혼의 알맹이를 송두리째 뜯어먹힌 껍데기처럼 경련 한번 일으키지 못한 채 차갑게 굳어갔다. 방금 전까지 객잔 안을 터질 듯 메우고 있던 살기는 씻은 듯이 소멸했고, 바닥을 적시는 것은 질척거리는 피와 찢겨나간 옷 조각뿐이었다.
달랑 한 명.
가장 뒤편에서 살진을 조율하던 살수 우두머리만이 살아남아 부서진 벽에 등을 기댄 채 사시나무 떨듯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기형도는 이미 절반이 잘려 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눈앞의 사내가 뿜어내는 절대적인 기세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다.
터벅, 터벅.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웅덩이를 밟는 그의 짚신에서는 무거운 파열음이 일었다. 사내가 쥐고 있는 검은 칼날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맺혀 있지 않았다. 적을 베어낸 피조차 도신의 칠흑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것처럼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살수가 사시나무 떨듯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흑철 가면의 눈구멍 틈새로 드러난 그의 동공은 극도의 공포로 인해 바늘구멍처럼 수축해 있었다. 살인과 파괴를 밥 먹듯 행해온 흑월문의 일급 살수였지만, 눈앞의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 년 전 청월장을 집어삼켰던 그 지옥의 화염, 그리고 그 뒤편에 도사린 검은 달의 금기 그 자체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놈이냐……! 우리 흑월문의 이름 장부(名簿)에…… 네놈 같은 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사내가 살수의 바로 코앞에 멈추어 섰다.
삿갓 챙 그늘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두 눈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빛났다. 귀 밑에서 턱선으로 이어지는 화상 흉터가 살아 움직이는 지네처럼 뒤틀렸다.
"이름 장부?"
사내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살수의 고막을 벼락처럼 내리쳤다.
"이름 따위는…… 이미 십 년 전 그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뭐……?"
사내가 검을 뉘었다. 서늘한 칼끝이 살수의 목젖을 겨누었다. 살수는 칼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살갗이 찢겨나가는 듯한 환통을 느끼며 비명을 삼켰다.
"네놈의 목숨줄을 남겨두는 것은 자비 따위가 아니다."
사내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문주에게 돌아가라."
"무, 문주 님께……?"
"가서 전해라. 십 년 전, 불타버린 청월장의 잿더미 밑에 묻어두었던 빚을……."
사내의 눈동자 속에서 칠흑 같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제 받으러 가겠다고."
살수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벌벌 떨렸다.
십 년 전. 불탄 청월장.
흑월문 내부에서도 오직 문주와 대모만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가장 은밀하고 저주받은 금기의 기억. 그 화염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그 불길 속에서 강호 전체를 옭아맨 검은 달의 거대한 계약이 맺어졌다. 눈앞의 이 사내는, 그 화마의 지옥 밑바닥을 기어 나와 마침내 문지방을 넘어선 망령이었다.
"그, 그것뿐이냐……? 문주 님께 네놈의…… 네놈의 신분을 무어라 고해야 한단 말이냐!"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거두었다.
스르릉.
검은 칼날이 낡은 칼집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맞물리는 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갈랐다. 사내는 쓰러진 살수에게서 등을 돌려 부서진 객잔의 문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을 묻거든, 빚쟁이라 해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살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진흙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객잔 주인과 낭인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기둥 뒤에 납작 엎드려 있었고,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부서진 문턱을 넘어 칠흑 같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비는 완전히 멎어 있었다.
산속의 밤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비에 젖은 수림 사이로 피어오른 자욱한 안개가 강물처럼 대지를 적시며 흘러갔다.
사내는 진흙투성이가 된 길 한가운데에 우뚝 멈추어 섰다.
축축하게 젖은 도포 자락이 싸늘한 밤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삿갓 챙을 살며시 들어 올린 사내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기련산맥 위를 뒤덮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둠을 밝혀주어야 할 은은하고 맑은 백색의 보름달이 아니었다.
둥근 달의 한쪽 가장자리부터 기괴한 칠흑의 어둠이 갉아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먹물을 듬뿍 찍은 붓으로 달의 표면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창백한 달빛이 핏기를 잃고 싸늘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월식(月蝕).
하늘에 검은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빛을 잃어버린 하늘 아래,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사내의 짚신 발치로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사내의 가슴팍, 젖은 도포 속에 깊숙이 감추어둔 낡은 옥패 하나가 심장의 박동에 반응하듯 옷감 너머로 희미한 푸른빛을 깜빡였다. 청월장의 쌍문양이 새겨진 옥패였다.
십 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껍데기로 살아가야 했던 세월. 스승 서문 월청의 억울한 피와, 불타버린 장원에서 울부짖던 남매의 비명, 그리고 검은 달의 계약에 얽혀 영혼을 빼앗긴 채 사라져간 수많은 이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홀로 걸어온 시간이었다.
"혁련오(赫連旿)."
사내의 메마른 입술 틈새로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증오와 비탄, 그리고 결코 끊어낼 수 없는 피의 사형제(師兄弟)로서의 인연이 뒤섞인 이름.
검은 달이 밤하늘의 절반을 집어삼켰을 때, 사내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질척거리는 진흙길 위로 그의 깊은 발자국이 길게 새겨졌다. 그가 향하는 길의 끝에는,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화염을 꺼뜨리지 않은 채 강호의 밤을 집어삼키고 있는 거대한 흑월의 본단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 빚을 돌려받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