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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88화목차

제88화 진세린과의 은밀한 접선

스스스—.

상층부 외곽의 폐허가 된 유리 정원.

사방으로 찢겨 나간 테라스의 철제 난간 위로 차가운 밤바람이 휘몰아쳤다.

발밑으로는 불야성을 이루던 신서울의 마천루들이 구름 아래 아득하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자본의 도시 역시 지금은 강진혁이 내뿜는 칠흑 같은 마기와 폭발적인 기류에 의해 반쪽이 짓눌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끼익—.

철컥.

부서진 장갑 판이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빛 서광이 감도는 군용 강화 슈트의 잔해가 바닥에 떨어졌다.

강진혁은 숨을 고르지 않았다.

이미 그의 단전은 56,200 MW라는 경이로운 출력으로 요동치고 있었고, 핏줄을 따라 흐르는 마기는 기계적인 냉각 장치 없이도 스스로 혈관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 떠 있던 시스템의 HUD는 오래전에 꺼져 있었다.

그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해방감이었다.

이제 강진혁은 인공지능의 연산 보조 없이도 자신의 감각과 심법만으로 세상을 낱낱이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테라스 구석의 무너진 석조 기둥 아래였다.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진세린.

티타늄 그룹의 후계자이자, 언제나 오만한 눈빛으로 하층민들을 내려다보던 철의 여인.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 타이틀의 무게를 완전히 상실해 있었다.

반파된 전신 장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차가운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하이엔드 검은 이미 날이 반 토막 난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드드득.

강진혁의 군홧발이 콘크리트 바닥을 짓밟으며 다가갔다.

칠흑의 잔상을 남기지 않는, 묵직하고도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그 무심한 압박감만으로도 진세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더 이상 적대감으로 불타지 않았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참담함,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달은 자의 허탈함뿐이었다.

“……강진혁.”

쉰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강진혁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손에 쥐고 있던 개량형 천마검의 날 끝에서 푸른 뇌전과 칠흑의 마기가 미세하게 튀고 있었다.

“살아남았군.”

차가운 음성.

자비도, 분노도 없는 순수한 사실의 적시였다.

진세린은 그 말에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피가 섞여 쿨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정원의 바람 소리에 묻혔다.

“살아남은 게 아니야. 버려진 거지…….”

그녀가 부서진 장갑 너머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테라스 너머, 신서울의 가장 깊은 심장부인 ‘중앙 프로토콜 타워’의 거대한 첨탑이었다.

“나는 내가 이 가문의 후계자라고 믿었어.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이 거대한 세계를 통치할 유일한 혈육이라고. 내 몸에 흐르는 피와, 조율된 코어의 출력은 그 증거라고 생각했지.”

진세린의 눈동자에 광기와 눈물이 뒤섞였다.

“하지만 아니었어. 그 모든 건…… 나를 위한 게 아니었어.”

“알고 있다.”

강진혁의 짧은 단답에 진세린의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조금 더 일으켰다.

“네가 뭘 알아……! 네놈도 그 실험체 중 하나에 불과했잖아! 하지만 너는 도망쳤고, 스스로 힘을 길러 이 지옥을 부수고 올라왔지. 그래서 몰랐을 거다. 조부가 왜 나를 그렇게 엄격하게 키웠는지. 왜 내 신체 데이터를 매일같이 크로노스 연구소로 전송하게 만들었는지!”

진세린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아폴론의 그릇. 그것이 내 진짜 용도였어.”

콰아아앙—!

멀리 상층부 공중회주랑 쪽에서 또 한 번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그 폭발음보다도 더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부의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 아무리 고성능 생체 코어를 이식하고 나노머신으로 세포를 재생하려 해도, 늙어버린 뇌와 신경망은 거대한 출력을 버텨내지 못해. 그래서 그들이 만든 게 뭐야?”

진세린이 스스로의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가장 완벽한 유전적 적합도를 가진 젊은 육체. 그리고 그 육체에 조부의 정신을 이식하는 프로젝트. 그 숙주의 1순위 후보가 바로 나였어. 나, 진세린! 티타늄 그룹의 피를 이은 후계자!”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조부에게 사랑받는 손녀가 아니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예비용 ‘고기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 진실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가졌던 모든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날아갔다.

“내가 그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 미치겠더군. 내가 누리던 모든 권력과 찬사가 결국 내 무덤을 파고 있던 삽질이었다니…….”

진세린은 품속을 더듬었다.

장갑의 고정 장치가 부서져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지,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뭔가를 꺼내어 바닥에 툭 던졌다.

짤랑—.

메탈릭한 질감의 작은 패드였다.

그 표면에는 일반적인 군용 암호 체계와는 다른, 티타늄 그룹 최상층의 메인 코드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게 뭐지?”

강진혁이 낮게 물었다.

“티타늄 그룹의 마스터 보안 승인 코드야. 중앙 타워의 최하층, 그리고 아폴론의 왕좌로 이어지는 모든 방어 회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지. 조부의 영혼 이식 프로젝트와 자폭 프로토콜을 동시에 락 걸 수 있는 키이기도 하고.”

진세린은 그것을 강진혁의 발치로 밀어냈다.

“가져가. 네가 원한다면 그 타워를 통째로 부숴버리든, 그 안에서 조부의 남은 잔당들과 함께 타죽든 상관없어.”

“…….”

“다만 한 가지만 부탁하자.”

진세린이 고개를 들어 강진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려 턱을 적셨다.

“그 늙은이의 영혼이 담긴 모든 서버와, 나를 그릇으로 쓰려던 그 역겨운 연구 시설의 흔적까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줘. 이 가문의 이름으로 그 누구도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못하게.”

강진혁은 바닥에 놓인 마스터 보안 패드를 내려다보았다.

시스루 HUD는 꺼져 있었지만, 그의 영력과 나노머신 감각은 그 패드 내부에서 흐르는 암호화된 전자기파의 주파수를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가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티타늄 그룹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열쇠였다.

“네가 직접 복수할 생각은 안 하더군.”

강진혁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세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복수? 내가? 내 몸은 이미 그 늙은이가 설계한 유전적 감옥이야. 내 안의 나노머신들은 언제든 내 의식을 차단할 수 있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역겨운 가문의 열쇠를 네 손에 쥐여주는 것뿐이야.”

그녀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듯 상체를 완전히 바닥에 뉘었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패배의 상처와 배신의 충격이 그녀의 육체적 한계를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강진혁은 몸을 낮추어 바닥에 떨어진 마스터 보안 패드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것은 단순한 키가 아니었다. 거대 자본이 쌓아 올린 신서울의 꼭대기를 무너뜨릴 마지막 방아쇠였다.

“이유는 그것뿐인가.”

“……뭐?”

“나를 이용해 그 늙은이를 치겠다는 생각이라면, 너 역시 나와 다를 게 없다. 내 복수에 너의 절망을 얹는 꼴이지.”

진세린은 감겨 가는 눈을 겨우 뜨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용당하는 건…… 익숙해. 적어도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싸우잖아. 그게 그 늙은이처럼 남의 것을 탐하는 것보다는 훨씬 진짜 같아 보여.”

그녀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숨결은 옅어졌지만, 심장박동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강진혁은 그녀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끼이익—.

그가 몸을 돌려 테라스의 난간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전의 56,200 MW 출력이 허공의 기압을 밀어내며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윤아영.”

귀에 장착된 서브 통신 유닛을 통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직후, 통신 너머에서 윤아영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 오빠?! 방금 시그널 잡혔어! 괜찮아? 거기 상황 어때?!]-

“연결해라.”

-[뭘……?]-

“네가 가진 해킹 툴과 이 패드의 마스터 코드를 동기화해. 지금 즉시 중앙 타워의 1차 방어막 주파수를 내 단전 출력에 맞추어 역주입한다.”

-[하, 하지만 거긴 아직……!]-

“시간 없다.”

강진혁은 손에 쥔 마스터 보안 패드를 강하게 쥐었다. 패드 표면의 각인이 그의 마기에 반응하며 푸른 불빛을 번뜩였다.

“이현도가 남긴 잔당들과 그 늙은이가 숨겨둔 마지막 ‘그릇’이 부화하기 전에, 이 도시의 꼭대기를 완전히 끝장내야 하니까.”

-[……알았어! 10초만 줘, 오빠! 회로 우회 접속 시작한다!]-

통신이 끊어지고, 강진혁의 시선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첨탑——중앙 프로토콜 타워의 최상층을 향해 곧장 박혔다.

밤하늘의 별빛마저 마기에 밀려 빛을 잃은 시공간.

강진혁은 개량형 천마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칠흑의 마기와 뇌전이 밤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을 듯 거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치지직—!

윤아영의 해킹 프로그램과 마스터 보안 패드가 동기화되는 소리가 강진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신서울 상층부를 뒤덮고 있던 거대한 방어 기제들의 주파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철옹성처럼 자본의 권력을 수호하던 메인프레임의 보안벽이, 내부에서부터 발생한 치명적인 균열로 인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전조였다.

주파수 매칭 완료.

중앙 프로토콜 타워 외곽 링, 접근 승인 코드 00-오메가 개방.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시스템의 잔해 같은 텍스트 따위는 이제 필요 없었다.

강진혁은 자신의 단전에서 울부짖는 56,200 MW의 출력을 오직 감각만으로 통제하며 발을 굴렀다.

쾅—!

콘크리트 테라스가 완전히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강진혁의 잔상이 허공에 새겨졌다.

[마광신보 - 극(極)].

빛의 궤적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절대적인 속도로, 그는 부서진 공중 회주랑을 가로질러 중앙 프로토콜 타워를 향해 수직으로 도약했다.

바람이 귀를 찢듯 사납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어떤 난기류도, 상층부를 지키던 수십 기의 자율형 방어 포탑도 강진혁의 진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파지지직!

타워의 외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플라즈마 요격 포들이 일제히 화력을 뿜어내며 붉은 광선을 내뿜었다. 수천 도에 달하는 고열의 에너지 병기들은 철저하게 지정된 타겟을 소멸시키도록 프로그래밍된 현대 군사기술의 정수였다.

그러나 강진혁은 눈을 깜빡조차 하지 않았다.

“허튼짓.”

휘익—.

손에 쥔 개량형 천마검이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그 순간, 검신을 타고 흐르던 칠흑의 마기와 뇌전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만법귀마 - 파동 반사].

적의 플라즈마 주파수와 공진하는 파동이 검끝에서 역류했다.

쾅, 쿠구구구궁—!

타워 외벽에 설치되어 있던 수십 개의 요격 포가 자신이 발사한 열을 이기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철판과 장갑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불꽃비가 되어 밤하늘을 수놓았다.

단 몇 번의 참격만으로, 티타늄 그룹이 수십억 원을 들여 구축한 최상층 방어선이 초토화되었다.

휘유우우—!

타워의 최상층, 이른바 ‘아폴론의 왕좌’로 불리는 최정상 메인 테라스에 강진혁의 군홧발이 착지했다.

쿵—.

지면이 가라앉으며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밀려났다.

강진혁은 숨 한 번 고르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거대한 돔 형태로 이루어진 통제실의 강화 유리벽 너머로, 눈부시게 푸른빛을 발하는 거대한 액체 포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는 굵은 케이블과 생체 나노 회로에 둘러싸인 채, 아직 완전히 눈을 뜨지 않은 거대한 형체가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무극이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복제하고 증식하던 ‘최종 그릇’.

신서울의 모든 전력과 320만 하층민의 생체 코어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부화를 앞두고 있는 악의 본체였다.

치이익—.

기압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통제실의 거대한 철문이 양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타워의 메인프레임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환광과, 그 포트 주변을 감싼 차가운 공기만이 강진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결국 남은 건 이것뿐인가.”

강진혁의 입가에 옅고도 냉혹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단전의 출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자, 그의 온몸을 감싼 칠흑의 마기가 타오르는 검은 불꽃처럼 치솟았다.

손에 쥔 천마검이 소름 돋는 고주파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대의 기계 공학과 고대의 마교가 낳은 괴물이자, 시스템의 그늘을 완전히 부수고 스스로 도달한 초월의 참격이었다.

[신천마신공 제5단계 - 천마일검(天魔一劍)].

콰아아앙—!

신서울 상층부의 밤하늘이 단 한 번의 검광에 의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졌다.

푸른 뇌전과 칠흑의 마기가 뒤섞인 거대한 검기가 타워의 돔 지붕을 정중앙부터 박살 내며 ‘최종 그릇’의 포트를 향해 내리꽂혔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고, 오직 파멸의 섬광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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