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진세린의 고뇌
티타늄 타워 92층 로비의 바닥이 거대한 충격파에 의해 잘게 으스러져 있었다.
우두둑, 투두둑.
강진혁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파편들은 그가 뿜어내는 마기의 압력이 얼마나 가혹한지 증명하고 있었다.
단전 코어 출력, 4만 MW 임박.
시스템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기혈의 순환만으로 도달한 경지였다. 육체를 감싼 칠흑의 마기는 이제 실체화된 갑옷처럼 진혁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그 주변의 공기마저 뒤틀려 일그러졌다.
백무현과의 결전 직전.
타워의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진혁이 잠시 호흡을 고르는 동안, 시공간을 넘어 또 다른 곳에서도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제1계급, 티타늄 그룹 본사 정무동(政務棟) 수석 집무실.
휘황찬란한 홀로그램 스크린들이 사방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여인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진세린.
티타늄 그룹의 후계자이자, 특수전 후사대의 대장.
그녀의 손에 들린 데이터 패드에서는 차가운 전자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고. 접근 권한 '0계급' 이외의 열람은 차단됩니다.]
[보안 프로토콜 '제네시스' 작동 중. 해당 파일은 암호화되었습니다.]
"……하."
진세린의 입술이 가잘가잘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강진혁이 타워를 오르기 직전, 그녀의 단말기로 전송해 준 단 하나의 기밀 파일이었다.
처음 그 파일을 받았을 때, 세린은 그것이 적의 교란 작전이거나 자신을 흔들기 위한 저급한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인 진무극 회장, 그리고 그룹의 핵심인 이현도가 자신을 얼마나 아꼈는가. 자신은 티타늄 그룹의 정통 후계자였고, 이 거대한 도시에 군림할 운명을 타고난 혈통이었다.
하지만 파일을 열어본 순간, 그녀의 세계는 무너졌다.
[프로젝트 명: 아폴론의 그릇 (Apollo's Vessel)]
[주요 목적: 숙주(진무극)의 노화 및 세포 붕괴에 대비한 완벽한 생체 껍데기(Container)의 양산.]
[대상 유전자 코드: 세린_진 (Serin_Jin).]
"거짓말……."
세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데이터 패드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으나, 그녀는 간신히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패드의 표면을 긁으며 찌그러졌다.
화면 속에는 그녀의 신체 데이터와 유전자 서열이 낱낱이 분석되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특수전 후사대를 이끌며 공을 세웠던 그녀의 모든 전투 데이터, 부상을 입었을 때 회복 속도, 심지어 정기적으로 맞았던 강화 시술의 세부 내역까지.
그 모든 것은 그녀를 강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더 완벽한 '그릇'으로 조율하기 위한 사육(飼育)의 과정이었다.
[숙주 림프구 적합성 검사: 99.8%]
[예비 육체 교체 주기: 만 25세 도래 시, 또는 숙주의 신체 붕괴 직전.]
[특이사항: 대상(진세린)은 자신이 후계자임을 믿고 있으나, 이는 피실험체의 자율성 유지를 위한 기만 프로토콜의 일환임.]
"아버지가…… 나를?"
세린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역순으로 조립되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찬사.
‘너는 내 피를 가장 완벽하게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내 딸이다.’
그 달콤한 목소리가, 지금 와서는 살을 에는 듯한 저주로 되돌아와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 자신이 늙어 죽거나 마공의 부작용으로 육신이 붕괴했을 때, 그 영혼을 갈아 끼울 '소모용 껍데기'에 불과했다.
진세린이라는 인간의 의지, 감정, 미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냉혹한 독재자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미리 빚어둔 예비 부품이었던 것이다.
"크큭…… 하하하……!"
세린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슬픔을 넘어선 지독한 광기와 절망이 엉켜 있었다.
눈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그녀가 누구인가.
티타늄 그룹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피 흘리며 싸웠고, 부하들의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볐으며, 아버지의 인정 단 한 마디를 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었던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게 가짜였다.
자신이 걸어온 길 전체가, 거대한 유리병 속에서 살찌워지던 실험용 가축의 궤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박살 내고 있었다.
"내가…… 그 자식의 부품이라고……?"
세린의 이빨이 마주치며 소리를 냈다.
핏발 선 눈동자가 집무실 벽면에 걸린 진무극의 거대한 초상화를 향했다.
은발을 정갈하게 넘긴 채,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 오만한 눈빛.
이전까지는 그 눈빛이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그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악마의 시선으로 다가왔다.
파지지직-!
세린의 전신에 이식된 군용 생체 코어와 나노머신이 그녀의 극심한 감정 동요를 감지하고 경고음을 토해냈다.
[경고! 사용자 스트레스 지수 급상승.]
[아드레날린 분비 과다. 코어 출력 불안정화. 안정제 투여를 권장합니다.]
"시끄러워……!"
세린이 손을 휘두르며 제어 패널을 후려쳤다.
콰광!
강력한 마기와 나노머신의 출력이 뒤섞인 일격에 집무실의 벽면 패널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주저앉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진실을 알게 된 충격은 그녀의 정신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칼을 뽑아들어야 할지 모든 기준이 산산조각 났다.
그때였다.
-콰르릉!
타워의 하층부에서부터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100층에 가까운 높이의 건물 전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이 진동은."
세린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강진혁.
슬럼가의 폐기장에서 기어 나와, 이 거대한 티타늄의 제국을 밑바닥부터 무너뜨리고 있는 남자.
자신과 칼을 맞부딪쳤고, 자신에게 이 썩어 빠진 진실의 문서를 던져준 남자.
그는 지금 타워의 최상층을 향해 밀고 올라오고 있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이자, 그녀의 인생을 기만한 괴물들을 처단하기 위해.
세린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아끼던 특제 군용 도검이 매달려 있었다.
도검의 날에는 아직도 특수전 후사대를 이끌며 베어낸 적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다.
"아버지……."
세린의 입에서 낮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흑안에, 이전에 없던 서늘하고 잔인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명예도,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환상도 모두 산산조각 났다.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진짜 부품이 누구인지, 그들이 만들어 둔 껍데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직접 증명해 보이는 것.
슈우우-!
세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전투 수트의 출력이 최고조로 치솟으며 푸른빛의 나노 회로가 온몸을 타고 번쩍였다.
그녀는 떨리던 손을 꽉 주먹 쥐고, 무너진 집무실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티타늄 타워 최상층, 백무현이 버티고 서 있는 그곳이자 진무극의 유산이 도사린 최종 결전지.
한편, 티타늄 타워 92층.
강진혁은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철제 방화문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그의 뒤편으로, 92층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던 팬텀 가드들과 자율형 처형수들의 잔해가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터벅, 터벅.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방화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전신이 티타늄 합금과 중장갑 사이보그로 개조된 사나이.
티타늄 그룹 블랙 가드의 총사령관, 백무현이었다.
그의 손에는 신서울의 장갑차를 단숨에 종잇장처럼 구겨버릴 수 있는 대구경 중기관총이 들려 있었고, 가슴에 장착된 5세대 생체 코어는 불길한 붉은빛을 뿜어내며 웅장한 가동음을 내뿜고 있었다.
"강진혁."
백무현의 목소리는 기계음과 인간의 성대가 섞여 음산하게 울렸다.
"네가 여기까지 기어 올라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100층으로 향하는 길은 여기서 끝이다."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칠흑의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천마검을 가볍게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4만 MW에 육박하는 에너지가 대기를 진동시키며 주변의 유리창들을 미세하게 금 가게 만들었다.
시스템의 도움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나노머신의 자동 연산도, AI의 보조 HUD도 꺼진 지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감각, 오직 자신의 심법, 그리고 1,000년 전 마교의 유골과 현대의 기술을 짓이기며 완성한 순수한 무력만이 진혁의 혈관 속에서 끓어넘치고 있었다.
"말이 많더군."
진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네가 지키려는 그 썩어 빠진 성채도, 네 주인이 숨겨둔 그 흉측한 그릇도…… 오늘 전부 내 손으로 뼈와 살을 분리해 주마."
카아아아앙—!
진혁의 발밑에서 바닥이 폭발하듯 부서졌다.
마광신보-극(極).
눈에 보이지 않는 잔상을 남기며, 칠흑의 태풍이 백무현을 향해 수직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타아앙—!
백무현의 손에 들린 중기관총에서 초음속 탄환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공간을 찢는 비명과 함께 수십 발의 플라즈마 실탄이 진혁의 잔상을 관통했다. 그러나 그곳에 남은 것은 잔상뿐이었다.
"속도가 빠르군."
백무현의 안면 장갑 내부에서 기계적인 연산음이 울렸다.
그의 시야 센서가 채 진혁의 이동 궤적을 따라잡기도 전에, 이미 칠흑의 섬광이 그의 사각을 파고들고 있었다.
콰아아앙!
진혁의 손에 들린 천마검이 백무현의 어깨를 강타했다.
티타늄 합금과 5세대 고강도 나노 장갑이 맞부딪치며 만국기를 연상시키는 찬란한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백무현의 거대한 체구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긁으며 수 미터를 밀려났다.
그의 어깨 부근의 장갑이 종잇장처럼 찢어져 내부의 기계 회로가 흉하게 드러났다.
"크윽……!"
백무현이 단음의 신음과 함께 중기관총의 총구를 번개처럼 돌렸다.
영점 조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전신 사이보그화된 그의 반사 신경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치이익-!
총구에서 압축된 플라즈마 에너지 탄막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며 진혁의 전신을 옭아넸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않았다.
"어설프다."
진혁의 눈동자가 암흑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전신을 감싼 [천마무상체]의 마기 방벽이 플라즈마 탄막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지지직,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에너지가 서로를 소모했으나, 진혁의 전진은 단 0.1초도 멈추지 않았다.
마기를 머금은 검신이 공기를 가르며 포물선을 그렸다.
[만법귀마 - 파동 반사]
진혁이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백무현이 쏘아낸 플라즈마의 파장이 역으로 뒤틀리며 백무현 자신의 부위로 튕겨 나갔다.
콰광!
자신이 뿜어낸 화력에 스스로의 하체가 휘청거린 사이, 진혁의 검격이 이미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투둑, 우두둑!
백무현의 복부를 방어하던 5세대 생체 코어의 출력 장치가 진혁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 진동 파쇄에 의해 여지없이 박살 났다. 코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냉각수와 시퍼런 전류가 뒤섞여 흉하게 튀었다.
"큭…… 괴물 같은 놈……."
백무현이 피를 토하며(정확히는 기계 유압유와 붉은 생체 액체의 혼합물이었다) 뒤로 물러섰다.
그의 전신 사이보그 의수들이 경고음을 내지르며 전력 공급이 끊겼음을 알렸다.
하지만 백무현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네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상층부의 '준비'는 이미 끝났다……."
"……."
"네가 꺾으려는 그 그릇은, 단순한 육신이 아니다. 1,000년 전 천마의 의지와 이 거대한 도시의 자본이 융합된 절대의 힘이지. 네 놈이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 그 그릇의 부품 중 하나로 흡수될 뿐이다!"
백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혁의 검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챙강-!
전신 사이보그의 단단한 목 부위가 붉은 궤적과 함께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백무현의 거대한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92층 로비의 차가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붉게 빛나던 시야 센서가 점차 흐려지며 완전히 꺼졌다.
진혁은 쓰러진 백무현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92층 로비의 끝, 최상층인 100층으로 향하는 유일한 초고속 승강기와 비상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밀 통로의 철문이 저절로 열리며, 그 안에서 차갑고 무거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냉기가 아니었다.
백무현이 말했던 '제2의 최종 그릇', 그리고 1,000년 전 마교의 유골 데이터가 자아내는 기괴한 마기의 잔재였다.
진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흩어진 핏물과 기계 부품의 잔해들이 밟힐 때마다 바삭한 소리를 냈다.
단전의 출력은 여전히 4만 MW를 유지하며 그의 혈관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시스템이 없어도, 누군가가 짜 놓은 프로토콜의 안내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진혁은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베어낼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릇이라."
진혁의 입가에 짙고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만든 것은 무공이고, 내가 밟고 올라온 것은 너희가 만든 지옥이다. 그 따위 가짜 그릇에 내 영혼을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철컥.
진혁이 계단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 티타늄 타워 전체의 조명이 붉은색 비상등으로 전환되었다.
[시스템 경고. 100층 최상층 보안 구역 개방.]
[프로젝트 '아폴론'의 최종 페이즈가 강제 가동됩니다.]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상층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칠흑과 푸른 뇌전이 뒤섞인 거대한 마기의 폭풍이 타워의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 폭풍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치켜들며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