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아버지를 믿는가
지하 300층 승강장의 거대한 철제 격벽이 스러진 잔해 사이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찢었다.
챙—!
공간을 가르는 섬광은 청백색의 뇌전 마기를 두른 검날이었다. 강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마강(雷電魔剛)]의 여파가 승강장 바닥의 강화 티타늄 합금을 두부처럼 베어가르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 궤적의 중심에 진세린이 있었다.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특수전 후사대용 군용 생체 코어 수트는 이미 과부하로 인해 곳곳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시퍼런 살기로 불타고 있었다.
"강진혁……!"
진세린의 입술 사이로 피비린내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인 충성과 자신이 누려온 특권층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부서지는 치욕 속에서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슈우우웅—!
전신 코어 출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그녀가 두 자루의 고주파 카타나를 역수로 틀어쥐며 진혁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잔상이 공기 중의 수분을 증발시키며 궤적을 그렸다. 단거리 공간 왜곡을 일으킬 정도의 고속 돌진. 일반적인 2계급 초인이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날아갔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20,000 MW의 압도적인 마기가 전신 혈관을 타고 나노머신과 완벽하게 동기화되었다. [초월천마경(超越天魔經)]의 경지에 이른 그의 감각 속에서 진세린의 움직임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늘어져 보였다.
지익—.
진혁의 발이 허공을 차며 [마광신보 - 극(極)]을 전개했다.
몸이 빛의 입자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진세린의 맹공이 쏟아지는 바로 그 찰나의 사각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기묘한 유체화(流體化). 진세린의 검날이 진혁의 잔상을 베었을 뿐, 실제 육체는 이미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든 뒤였다.
"커헉……!"
진혁의 손바닥이 진세린의 단전 부근, 즉 생체 코어가 내장된 흉갑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타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흡원천공 - 개량(改)]의 흡수 직전 단계였다. 순간적으로 진세린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멎어 버리며, 그녀의 전신에 장착된 모든 기계 장치가 굳어 버렸다.
웅가아아—.
"네……!"
진세린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질렸다. 목숨을 거두려 한다면 언제든 거둘 수 있는 압도적인 격차. 반항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대적인 무력의 벽 앞에서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진혁의 검은 그녀의 목을 베는 대신, 귓가에 서늘한 한기를 남기며 멈춰 섰다.
툭.
천마검의 시퍼런 날끝이 진세린의 하얀 목덜미에 닿아 미세한 생체 전류를 일으켰다.
"아버지."
진혁의 입술이 낮고 차갑게 열렸다. 그 목소리에는 일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자가 네게 무엇이라 가르치던? 너를 완벽한 후계자로 키워내 가문을 물려주겠다 속삭이던가? 아니면 인류의 진화를 이끄는 위대한 개척자라고 떠벌리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눈을 떠라, 진세린."
진혁의 왼손 손가락 끝에 장착된 나노 회로가 붉은빛을 발하며 하나의 데이터 드라이브를 공중으로 투사했다.
그것은 조금 전 지하 500층의 암호화된 기밀 서버에서 강제로 추출해 낸, 티타늄 그룹 최상위 기밀 파일이었다.
치지지직—.
공중에 홀로그램 형태로 펼쳐진 데이터는 진세린의 시야를 강제로 채웠다.
그것은 화려한 마천루의 이면, 슬럼가의 버려진 실험체들과 지하 수조에 갇힌 인간들의 생체 코어가 어떻게 수확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실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진무극이 직접 서명한 프로젝트 명세서가 박혀 있었다.
[프로젝트 명: 그릇 (The Vessel)]
[목적: 1,000년 전 마교 유골의 마기를 담아낼 최종적인 생체 그릇의 양산 및 최적화.]
[비고: 대상 체호 중 적합도가 가장 높은 개체는 후계자 진세린의 육체와 동등한 유전자 백업을 공유하는…….]
"아……."
진세린의 눈동자가 파멸적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믿고 따랐던 아버지, 티타늄 그룹의 회장이자 절대적인 지존인 진무극. 그가 자신을 진정한 후계자로 대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완성될 불멸의 '그릇'을 위한 예비 부품이자 완벽한 유전자 백업용 품목으로만 여겨왔다는 진실이 머릿속을 후벼팠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던 그 가문, 네가 목숨을 바치려던 그 아버지는 처음부터 너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나를 실험체로 버렸듯, 너 역시 언제든 소모될 수 있는 일회용 장기(臟器)에 불과했지."
"거짓말…… 거짓말이야……!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어!"
진세린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부정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물기를 머금고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데이터의 암호화 키와 생체 서명은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진혁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처단하는 것은 복수의 완성이 될 수 없었다. 스스로 믿었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 속에서 진실과 마주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가였다.
파앗—!
진혁이 손을 거두며 [마광신보 - 극(極)]을 전개했다.
그의 형체가 순식간에 승강장 한가운데서 지워졌다.
"강진혁! 기다려……!"
진세린이 주저앉은 채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에 잡히는 것은 허공의 잔상뿐이었다.
콰아아앙—!
진혁이 도약한 자리에 남겨진 여파만으로도 지하 300층의 거대한 철제 격벽과 승강장 통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토사와 철근 사이로, 진혁은 단전의 2만 킬로와트 출력을 폭발시키며 제2계급 중층 공업지대를 향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제2계급 중층 공업지대.
햇빛이라곤 단 한 조각도 들지 않는 이 거대한 철의 도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고출력 인공 조명과 거대 공장들의 매연으로 가득했다. 하늘을 뒤덮은 메가 마천루의 거대한 발치에 위치한 이곳은, 1계급 특권층을 지탱하기 위해 밤낮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장치와 다름없었다.
치익, 지지직…….
"진혁 대장. 들리나?"
윤아영의 목소리가 진혁의 뇌내 HUD 회로를 두드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과 함께 흥분이 서려 있었다.
"말해라."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한 이사가 타이탄-01과 함께 날아간 이후로 상층부 보안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됐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제2계급 공업지대 전역에 깔린 기업 직속 자동 보안군과 블랙 가드의 잔존 세력이 네가 이동하는 궤도를 타겟팅하고 있다."
"상관없다."
진혁의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았다.
중층 공업지대의 거대한 메인터넌스 베이 입구.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감시 로봇의 눈치를 보며 일하던 그곳의 상공을, 진혁은 칠흑의 잔상을 남기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퍼엉—!
공장 지대의 메인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던 대형 드론 편대가 진혁의 존재를 감지하고 일제히 플라즈마 포를 난사했다.
수십 갈래의 고열 플라즈마 광선이 진혁을 향해 쏟아졌다. 일반 초인이라면 방어막을 전개하느라 진땀을 뺄 공격. 하지만 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끄럽군."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천마검의 검신을 타고 휘몰아쳤다.
[만법귀마 - 파동(波動)].
적의 공격이 지닌 에너지 주파수와 위상을 단 0.1초 만에 분석해 낸 진혁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 검강이 플라즈마 광선의 공진 주파수를 역으로 타격했다. 순간적으로 연쇄 폭발이 일어나며 공장 지대 상공을 뒤덮었던 드론 편대가 빗발치는 불꽃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주변에서 작업하던 노동자들이 경악하며 엎드렸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채 밤하늘을 가르는 칠흑의 유성이었다.
진혁은 추락하는 잔해를 뒤로한 채, 공업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비밀 연구소의 외벽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크로노스 바이오 제2연구소. 진무극의 사후, 이현도가 숨겨둔 진짜 본거지이자 모든 비극의 기원이 된 곳이었다.
"찾았다."
진혁의 흑안이 서늘한 살기로 물들었다.
그의 손에 쥔 천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 마기가 거대한 연구소의 강화 방화벽을 통째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SYSTEM INFO: 경고, 제2연구소 메인 보안 시스템 강제 해제 시도 감지.]
[보안 레벨 EX: 방어 프로그램 가동. 모든 살인 병기, 기동 개시.]
쿠구구구구궁—!
연구소의 거대한 강철 문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인간의 형태를 아예 상실한 괴물형 생체 개조 병기들—혈마병의 완성형들이 일제히 붉은 눈을 번뜩이며 걸어 나왔다.
진혁은 그들을 향해 천마검을 겨누며 나지막이 뇌뱉었다.
"오늘부로, 이 세상에서 썩은 기틀은 전부 끝장낸다."
쿠구구구구궁—!
크로노스 바이오 제2연구소의 거대한 강철 격벽이 비명을 지르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인간의 체온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실험체들이 겪어낸 절규와 부패한 생체 조직의 비린내가 뒤섞인, 썩어 문드러진 죽음의 공기가 공업지대의 매연 속으로 왈칵 쏟아져 나왔다.
촤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십 쌍의 붉은 안광.
인간의 뼈와 근육을 강제로 늘리고, 그 위에 티타늄 합금 외골격과 4세대 생체 코어를 이식한 괴물형 개조 병기들—혈마병의 완성형들이 지면을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일제히 포효했다.
그들의 목덜미와 척추를 따라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시퍼렇게 썩어 문드러진 마기(魔氣)의 부산물이었다. 티타늄 그룹이 1,000년 전 마교의 유골 데이터에서 추출해 낸 저주받은 병기들의 진정한 실체였다.
"크으으으……!"
선두에 선 거구의 혈마병이 마운트된 중기관총의 총구를 진혁을 향해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탕—!
초당 수천 발의 고폭탄이 공간을 메우며 진혁의 전신을 벌집으로 만들 기세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 탄환들은 진혁의 몸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멈춰 섰다.
진혁이 단전의 20,000 MW 출력을 미세하게 조율하여 전신에 전개한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역장 때문이었다. 탄환들은 물리적 충격을 잃고 진혁의 발치로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이런 고깃덩어리들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그의 손에 들린 EX급 [천마검]의 검신을 타고 청백색의 뇌전 마기와 칠흑의 흑염이 거칠게 뒤틀렸다. [뇌전마강(雷電魔剛)]의 형상이었다.
슈우우웅—!
진혁이 보법을 밟았다. [마광신보 - 극(極)].
빛의 궤적마저 지워버린 잔상은 시야의 잔류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혈마병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진혁의 형체는 이미 그들의 진형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있었다.
스으윽— 툭.
검광이 한 번 스칠 때마다 거구의 혈마병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나뒹굴었다. 단 한 점의 저항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절단. 베인 단면은 고열의 플라즈마 검강에 지져져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매끄럽게 타들어 갔다.
[SYSTEM INFO: 경고! 제2연구소 코어 룸과의 연결망이 강제로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방어 시스템 효율 84% 급감. 침입자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연구소 내부의 인공지능이 비명을 지르며 경보음을 울려댔지만, 이미 대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진혁은 [만법귀마 - 파동]을 전개해 연구소 내부의 복잡한 방화벽과 레이저 트랩의 주파수를 역으로 교란시켰다.
지지직, 콰아앙!
사방에서 보안 터렛들이 스스로를 향해 기관포를 난사하며 자멸했고, 철제 통로들은 진혁이 뿜어내는 마기의 압력에 못 이겨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지하 500층의 가장 깊은 곳.
모든 생체 실험의 총책임자이자, 천마 프로토콜의 설계에 가담했던 수석 연구원 이현도(크로노스)가 버티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진혁은 피 냄새와 기계 오일이 진동하는 복도를 걸으며, 차갑게 빛나는 흑안으로 전방의 거대한 방탄 유리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배양액 탱크 속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수많은 케이블과 연결된 또 하나의 '그릇'이 흉측한 형체를 드러낸 채 잠들어 있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현도. 네가 벌인 그 광기의 실험에 대한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다."
천마검을 고쳐 잡은 진혁의 발걸음이 최종 연구소의 문을 향해 거침없이 내딛어졌다. 신서울의 밤하늘 아래, 진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