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진무극의 수
"……."
타워 제100층 중앙 제어실의 대형 홀로그램 모니터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푸른색이었던 타임라인의 카운트다운은 강진혁이 메인프레임을 박살 낸 순간부터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SYSTEM ALERT: 비상 프로토콜 '헤븐리 파운데이션'의 강제 중단 감지.]
[경고: 코어 연동망 해제 코드 입력자 - '강진혁 (실험체 07호)'.]
[잔여 하층민 생체 코어 320만 개... 보호 구역으로 이관 완료.]
"하."
실낱같은 탄식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당혹감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흥미와, 수백 년 동안 단련된 늙은 지배자의 광기 어린 호기심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티타늄 타워의 최고 소유주이자, 신서울의 숨겨진 황제.
진무극은 거대한 집무실 창가에 선 채 칠흑 같은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하 500층의 폐기장에서 시작해, 인류의 진화와 불멸을 도모하겠다며 쌓아 올린 거대한 요새가 지금 한 명의 괴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블랙 가드의 총사령관 백무현이 쓰러졌고, 2대장 '팬텀'의 암살망은 찢겨 나갔으며, 최정예 경비 로봇 사단은 쇳가루가 되어 타워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무극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실험체 07호."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집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대형 모니터의 한구석.
거기에는 핏빛 마기를 두른 채, 차가운 흑안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강진혁의 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2,800 MW.
인간의 육신에 담길 수 없을 터인 그 거대한 에너지는, 진무극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온 '천마 프로토콜'의 이론적 한계를 가볍게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를 차단하고도 그 경지에 올단 말이지. 순수한 기혈의 운용과, 스스로 깨달은 마공만으로…….'
진무극의 눈에 기묘한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피조물이, 창조주의 통제를 완벽히 벗어났을 때 마주하는 광기 어린 희열이었다.
체스를 두던 플레이어가,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수로 판을 뒤엎었을 때 느끼는 도취감에 가까웠다.
"회장님."
무거운 걸음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걸어 들어온 이는 타워의 후계자이자, 검귀로 불리는 진세린이었다.
그녀의 전신용 수트 곳곳에는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고, 숨결은 거칠었다. 지하 500층에서 강진혁과 격돌한 후유증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타워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중앙 제어실뿐만 아니라, 연구소의 핵심 데이터까지……."
진세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충성과 경외를 바쳐왔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강진혁이라는 괴물은 단순한 저항군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티타늄 그룹의 뿌리 자체를 뽑아버릴 수 있는 진짜 '천마(天魔)'의 재림이었다.
"물러서라, 세린아."
진무극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게 말했다. 그의 은발이 차가운 실내 조명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저자는 네가 상대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갔어. 아니, 어쩌면…… 저 아이야말로 내가 수십 년간 찾아 헤매던 유일무이한 '완성품'일지도 모르지."
진세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완성품이라니. 강진혁이 실험체 07호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회장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그를 자식이나 부하가 아닌, 오직 '소모품' 혹은 '그릇'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룹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고요!"
"무너진다고?"
진무극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늙은이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서늘하고 잔인했다.
"세린아, 자본과 기술은 잠시 잃을 수 있다. 타워는 부서지면 다시 지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진무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딸을 응시했다.
그의 핏기 없는 회색 눈동자가 섬뜩한 광채를 뿜어냈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여 스스로 경지를 개척하는 그 '순수한 궤적'은, 돈으로도, 데이터로도 살 수 없다. 강진혁 저놈이 보여주는 무력이야말로, 내가 이 늙은 육신을 버리고 영생의 왕좌로 오르기 위해 마지막으로 채워 넣어야 할 핵심 퍼즐 조각이다."
"……설마, 저 괴물을 이용해 또 다른 실험을……!"
"이용하는 게 아니다. 사냥하는 거지."
진무극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러자 집무실 한쪽에 매립되어 있던 거대한 제어 패널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원통형의 배양조가 숨겨져 있었다. 배양조 속에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온몸에 흉측한 기계 회로와 검붉은 생체 조직이 뒤엉킨 괴물들이 겹겹이 잠들어 있었다.
인간의 무도를 말살하고, 오직 전투와 살육만을 위해 만들어진 궁극의 생체 개조 병기.
코드네임, [아수라(阿修羅) 부대].
"이현도 박사에게 전해라."
진무극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크로노스 바이오의 모든 최후 비자금을 풀고, 아수라 부대의 봉인을 해제하라고 해라. 선봉장인 '시제품 0호'를 포함해 전력의 70%를 타워 100층으로 투입해."
"아수라 부대를…… 직접 지상으로 올리신단 말씀입니까? 그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실패작에 가깝습니다! 하층민뿐만 아니라 우리 직원들까지 모두 쓸어버릴 겁니다!"
"상관없다."
진무극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썩어 빠진 낡은 그릇들은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강진혁이 얼마나 강한지, 그 녀석의 '천마신공'이 어디까지 진화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한 훌륭한 장난감이 되겠지."
진세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아니, 처음부터 그 누구보다 차가운 이산화탄소 같은 머리로 세상을 내려다보던 자였다.
티타늄 그룹의 회장이란 그런 자들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명령대로 전하겠습니다."
진세린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가 복도로 사라졌다.
탁, 탁.
구두 소리가 멀어지자, 집무실은 다시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진무극은 다시 창가로 다가와, 칠흑 같은 신서울의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허공을 움켜쥐듯 꽉 쥐어졌다.
"와라, 강진혁. 네가 뿜어내는 그 흑염이 뜨거울수록, 내가 가질 영광도 완벽해질 테니."
동시 시각, 티타늄 타워 100층 중앙 제어실.
"후으읍……."
강진혁의 입에서 길고 탁한 탁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탁기는 허공에 닿자마자 미세한 고주파 진동과 함께 흑빛으로 바스러지며 소멸했다.
단전의 출력은 이미 12,800 MW를 지나 13,000 MW의 문턱을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 HUD가 완전히 꺼진 상태였음에도, 그의 감각은 오히려 그 전보다 수십 배는 더 예민하고 명확해져 있었다.
공기의 흐름, 타워 바닥 철판의 미세한 진동, 멀리 하층 슬럼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완벽한 삼차원 좌표로 그려지고 있었다.
"진혁 씨, 방금 저항군 네트워크에서 이상 신호가 잡혔어요!"
윤아영이 핑크빛 숏컷 머리를 휘날리며 급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말기 화면에는 신서울 제3구역 전역의 데이터 맵이 띄워져 있었고, 그중 특정 구역에서 수십 개의 붉은 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상 신호?"
"네! 티타늄 그룹의 메인 서버실이 제압당했는데도, 타워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비공인 비밀 연구소들의 마스터 코드가 일제히 활성화됐어요. 이거…… 일반적인 기업 사병들의 반응이 아니에요."
송수연이 대검을 단단히 고쳐 잡으며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진무극 이 미친 영감이 죽기 전에 뭔가 숨겨둔 패가 더 있다는 소리군. 블랙 가드나 팬텀 부대완 다른 건가?"
"그 이상이야."
강진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어실의 통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타워 아래, 신서울의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들 사이로 숨겨진 지하 벙커의 입구들이었다.
온몸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마기가 미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마치 위험한 맹수가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사냥감을 감지했을 때처럼, 본능적인 경고음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기계의 냄새가 아니야.'
강진혁은 뇌리에 스치는 직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쇠붙이와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사이보그의 악취가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을 억지로 개조하고, 뇌를 도려내어 살육의 도구로만 세팅한 '괴물'들의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아영아."
"네, 진혁 씨!"
"지금 활성화된 비공인 연구소의 위치, 전부 시각화해."
"알겠어요, 잠깐만요……!"
윤아영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키보드 위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타각각각각-!
화면 위에 파란색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신서울의 지도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지도의 특정 구역들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여기에요! 타워 지하 70층의 '제4 바이오 랩', 그리고…… 니르바나의 구호 병동이 있는 제3구역 외곽 변두리!"
송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구호 병동? 거긴 우리 부상자들과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곳이야! 설마 그곳을 노린다는 말인가?"
"진무극이 보낸 마지막 선물이다."
강진혁의 입술이 차가운 미소를 그려냈다.
그 미소는 분노라기보다는, 이 지독한 디스토피아의 꼭대기에 군림해 온 자가 부리는 마지막 발악을 비웃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천마검]의 검신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검붉은 마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며 미세한 뇌전을 동반한 고주파음을 울렸다.
"내버려 두지 않아."
강진혁이 몸을 낮췄다.
초월천마경의 기혈 운행이 정점에 달하며, 그의 두 발목 주변으로 푸른빛이 섞인 칠흑의 잔상이 겹쳐졌다.
[마광신보 - 극(極)].
쾅-!
중앙 제어실의 강화 유리창이 단 한 번의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강진혁의 몸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가르는 한 줄기 검은 번개처럼 타워 최상층에서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의 뒤를 이어, 타워 지하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잃은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신서울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람이 귀를 찢는 기세로 비명을 질렀다.
타워 100층 높이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동안, 강진혁의 시야에는 신서울의 구불구불한 네온사인이 거대한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그 아래,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의 낡은 판잣집들과 니르바나의 임시 구호 병동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위태롭게 잠겨 있었다.
‘속도가 조금만 늦어도 저들이 먼저 부서진다.’
단전에서 요동치는 13,000 MW의 마기가 온몸의 경락을 미친 듯이 휘감았다.
피부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극심한 통증. 그러나 강진혁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통증 따위는 이미 초월한 지 오래였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악의 뿌리를 단숨에 베어내는 것뿐이었다.
슈우우우-!
지상에 거의 도달했을 때, 강진혁의 두 발이 허공을 거칠게 걷어찼다.
[마광신보 - 극(極)]의 궤적이 공기 중에 검붉은 잔상을 남기며 급정지를 이끌어냈다.
쾅-!
중력의 가속도와 마기가 결합한 충격파가 구호 병동 마당의 아스팔트를 거대하게 함몰시켰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땅이 쩍쩍 갈라지는 괴음 속에서 강진혁의 검은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렸다.
"여긴……!"
구호 병동의 입구.
그곳에는 이미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엉켜 있는 잔해 사이로, 티타늄 그룹이 숨겨두었던 최후의 생체 개조 병기, [아수라 부대]의 선봉장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팔다리는 고주파 블레이드와 군용 화기로 변형되어 있었고, 눈꺼풀이 도려내진 흉측한 두 눈에는 푸른빛의 살육 회로가 번뜩이고 있었다.
크르르릉……!
짐승의 울음소리와 기계의 구동음이 뒤섞인 기괴한 소리가 병동 주변을 메웠다.
아수라 부대 중 가장 덩치가 큰 괴수가 입가를 찢으며 강진혁을 향해 거대한 철퇴 같은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지면이 통째로 박살 나며 시뻘건 파편이 튀었다.
그러나 그 공격이 닿은 곳에 강진혁의 모습은 없었다.
"목적지가 거기가 아니다."
서늘한 음성이 괴수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파지지직-!
강진혁의 검신을 감싸고 있던 칠흑의 마기에 푸른 뇌전이 얽혀들었다. 새로 개방한 [뇌전마강(雷電魔剛)]의 맹아.
그 압도적인 고주파 에너지와 마기가 결합된 참격이 괴수의 거대한 목덜미를 그대로 관통했다.
슈우욱- 툭!
피와 기계 기름이 뒤섞인 검은 액체가 허공을 적셨고, 아수라 부대의 선봉장 머리통이 단번에 나뒹구었다.
하지만 강진혁의 시선은 이미 그 괴수를 넘어,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오너라. 전부 찢어주마."
검붉은 마기를 두른 [천마검]이 허공에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밤하늘을 갈랐다.
신서울의 운명을 건 최후의 도살극이, 비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