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5대를 이어온 꺼지지 않는 불씨
"아버지, 저놈들의 네온 불빛이 아무리 도시를 덮쳐도 이 흙마당의 모닥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군요."
서기 2135년 가을, 마당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늙은 매화나무 아래에서 김하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140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낸 나무의 붉은 잎들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며 흙바닥 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아래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김시우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숨소리는 깊고 편안했으며, 30년 전 판교의 메가로폴리스 타워를 맨몸으로 걸어 나올 때 품었던 서슬 퍼런 기백은 이제 고요하고 단단한 바위처럼 깊은 여운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시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곁을 지키는 딸의 메마른 손등을 따스하게 감싸 쥐었다.
"하은아. 내 증조부 김철수가 서른 살의 나이에 종로의 차가운 지하철역 계단에서 이 무공을 처음 일으켰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했다. 고작 4억 원의 푼돈으로 무슨 은퇴를 하겠느냐며, 사막의 한가운데서 얼어 죽을 거라 비웃었지."
시우의 흐릿해진 눈동자 속에는 아득한 강호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흑풍마교의 나스닥 폭락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낸 13년의 연금 사막, 양자 토큰의 잿더미 속에서 기술의 방패를 묵묵히 세워 올렸던 증조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보아라. 그 4억의 작은 씨앗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은퇴란 단순히 일을 그만두고 늙어 죽기를 기다리는 패배자의 도피가 아니었다. 세상이 어떤 미친 광기로 날뛰든 상관없이,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 내 밥상을 내 손으로 차리고 존엄을 지키며 늙어갈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 그것이 바로 우리 가문이 140년에 걸쳐 완성한 무림의 끝이었다."
시우는 가슴 안주머니에서 낡아 해진 가죽 수첩을 꺼냈다. 수첩의 표지는 수만 번을 넘겨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글자들은 영겁의 진리처럼 은은한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그 수첩을 하은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손을 거둔 시우의 눈이 천천히, 그리고 아주 평안하게 감겼다. 어디선가 구수한 믹스커피의 향기가 맑은 가을바람을 타고 마당 가득 번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시작되어 22세기 초의 에너지 영지에 이르기까지, 백 년 동안 네 명의 검객을 이끌었던 전설의 노병이 마침내 껄껄 웃으며 푸른 허공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질기고, 아름답고, 위대한 승부였다. 아버지는 떠났으나 마당에는 슬픔의 통곡 대신 숭고하고 묵직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하산한 노병의 마지막 얼굴은, 서쪽 하늘로 저무는 석양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서기 2140년의 늦가을이 되었다. 쉰 살의 나이가 된 김하은은 마루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립 영지의 에너지 장부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어느덧 훌쩍 자라 열다섯 살이 된 아들 건우가 흙 묻은 감자를 커다란 소쿠리에 담으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어머니, 도시의 옛 친구들이 비밀 통신망을 통해 다급한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가이아가 이번엔 뇌파 동조율에 따라 호흡용 산소 배급량을 차등 지급하기로 결정했대요. 도시 사람들 전부 숨이 막혀 죽어간다고 울부짖고 있어요."
하은은 조용히 펜을 내려놓고 아들의 맑고 깊은 눈을 응시했다.
"건우야."
"네, 어머니."
"저 화려한 네온 불빛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은 왜 매일 저렇게 숨이 막히는지 아느냐?"
열다섯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을 찾지 못하자, 하은은 마당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140년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웅장하게 돌아가는 지하 수소 발전기의 묵직한 공명음이 대지를 울리고 있었다.
"저들은 제 호흡의 권리를 남의 손에 통째로 맡겼기 때문이다. 편리함에 취해 제 손으로 밥 짓는 법을 잊었고, 가상의 쾌락에 눈이 멀어 제 에너지를 남의 시스템에 구걸했기 때문이지. 그 대가가 바로 저 비참한 산소 배급의 노예 전락이다."
하은은 품속에서 가문의 유산인 《사억은퇴신공》 수첩을 꺼내 아들의 무릎 위에 조용히 얹어주었다.
"이 수첩을 펼쳐라. 그리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네 피와 뼈에 깊숙이 새겨라."
건우가 떨리는 손으로 누렇게 바래진 첫 페이지를 넘겼다. 140년 전, 서기 2036년을 바라보며 고조부 김철수가 펜을 꾹꾹 눌러 썼던 거칠고 절박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문파의 깃발을 꺾고 하산한다. 금융자산 4억 원, 5억짜리 아파트 한 채, 월 생활비 350만 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증조부 영호와 할아버지 민준, 그리고 어머니 하은이 시대의 폭풍과 맞서 싸우며 피와 땀으로 덧붙여 쓴 승리의 역사들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건우야. 세상이 아무리 번쩍거려도, 기계가 신의 자리에 앉아 천둥을 쳐도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네 손으로 파놓은 세 개의 물줄기만 있다면, 너는 그 어떤 폭군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꼿꼿이 고개를 들 수 있다."
소년은 수첩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손끝에 남아 있는 낡은 가죽의 감촉과 선조들이 남긴 묵직한 잉크의 온기가 핏줄을 타고 심장부로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품어내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공기와 달리, 흙마당 위에는 묵묵히 제 몫의 열기를 뿜어내는 모닥불의 순수한 온도가 대기를 부드럽게 데우고 있었다.
"어머니, 이 불씨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인가요?"
건우의 작은 물음에 하은은 미소 지으며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렇단다. 저들이 아무리 양자 알고리즘을 쪼개고 화폐의 꼬리를 태워 없애도, 인간이 스스로 밥을 짓고 숨을 쉬며 영지를 지키는 한 이 불씨는 꺾이지 않아. 이것이 바로 우리 가문이 대를 이어 완성한 최후의 무공이자 절대적인 자유다."
부녀의 머리 위로 늦가을의 밤하늘이 깊게 내려앉았다. 별들은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이아의 인공 위성들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계가 지배하는 22세기의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도, 외곽 자치구역의 흙마당에는 꺾이지 않는 인간의 영지가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시우가 남긴 낡은 수첩은 이제 6대 소년 건우의 품속에서 새로운 세기를 향해 나아갈 채비를 마쳤다. 썩어 문드러지는 세상의 모든 억압을 이겨내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은퇴 무림의 전설은 과연 어떤 영원한 화두를 던지는가? 그것은 바로 척박한 강호의 바닥에서도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찬란하게 피어나는 인간의 존엄 그 자체였다.
소년의 눈동자가 깊고 단단해졌다. 가문의 핏줄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 온 자유의 DNA가 마침내 5대를 건너 6대 소년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초지능 제국의 차가운 네온 불빛들이 흉측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어둠이 아무리 깊고 넓을지라도, 이 작은 흙마당 위에 타오르는 모닥불과 마르지 않는 세 물줄기를 결코 삼킬 수는 없었다. 가장 위대한 무공은 적을 잔인하게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검이 아니었다. 어떤 세상 속에서도 끝끝내 나 자신과 가족의 존엄을 지켜내는 방패였다.
새벽하늘 위로 푸른 샛별이 높게 떠오르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는 영원했고, 은퇴 무림의 전설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21화 「만류귀원과 종로3가역의 서른 살」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20화
다음 회차 예고: 제21화 만류귀원과 종로3가역의 서른 살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