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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21화목차

제21화 만류귀원과 종로3가역의 서른 살

타닥, 타다닥.

서기 2140년 늦가을, 차가운 밤하늘을 수놓던 모닥불의 붉은 불티가 아득한 허공 속으로 녹아내리던 찰나였다. 5대를 이어 내려오며 가문의 존엄을 지켜낸 가죽 수첩, 《사억은퇴신공》의 마지막 장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시간의 지평선 너머에서 낯익고 구수한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철수야. 강물이 수만 리를 굽이쳐 흘러 바다에 닿으면, 그 바닷물은 결국 구름이 되어 다시 산골짜기 첫 샘물로 떨어지는 법이지.'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코끝을 스쳤다. 지하 40층 캡슐의 메마른 인공 산소 냄새도 아니었고, 140년을 쉼 없이 돌아가던 자립 영지의 수소 발전기 허밍음도 아니었다. 덜컹거리며 레일을 긁는 육중한 쇠바퀴 소리, 퀴퀴하게 바랜 무가지 신문지 냄새, 그리고 새벽 찬바람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출근길 군중들의 비릿한 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삑- 잔액 1,250원.'

둔탁하고 앙칼진 지하철 개찰구의 비프음과 함께 김철수는 번쩍 눈을 떴다.

누렇게 바랜 형광등 불빛 아래, 낯익은 옥색 타일 기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종로3가역 1호선 환승 통로였다. 손에 쥐여 있는 것은 초전도 양자 통신 큐브가 아니라, 왼쪽 어깨끈의 실밥이 허옇게 터져 나온 낡은 인조가죽 서류가방이었다. 스크린도어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게 파인 검버섯도, 백발도 없는 팽팽한 두 뺨. 거뭇하게 돋아난 수염 자국, 그리고 푸른 생기가 감도는 서른 살의 청년 김철수의 얼굴이 그곳에 서 있었다.

"……서른?"

철수는 떨리는 두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었다. 잦은 야근과 위궤양으로 쓰린 속을 달래려 양복바지 주머니를 뒤적이자,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 세 장과 편의점 캔커피 영수증 한 장이 손끝에 만져졌다.

서기 2011년 늦가을이었다.

문파라는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앞에서 매일 밤 불면의 공포에 떨며,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 은퇴라는 아득한 신기루를 꿈꾸기 시작했던 바로 그 출발선이었다. 아내 정순의 간병비로 매달 피를 말리며 주판알을 튕겨야 했던 80대의 처절했던 고통도, 아들 영호가 13년의 연금 사막을 건너며 피눈물로 방패를 깎아내던 순간도, 손자 민준의 도박 빚과 증손자 시우의 목덜미를 조이던 디지털 신경망의 쇠사슬, 그리고 고손녀 하은이 초인공지능 제국 가이아의 목줄을 틀어쥐기까지 겪어낸 140년의 거대한 대서사가 철수의 뇌리 속에 한 폭의 정교한 지도처럼 완벽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허……."

철수의 메마른 입술 틈새로 길고 깊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통의 회귀자라면 이 순간 눈을 뒤집고 기억 속의 대박 테마주나 비트코인을 떠올리며 광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억만금을 쓸어 담아 세상을 발밑에 두겠노라 칼을 갈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140년의 자본주의 무림을 끝까지 살아내고 만류귀원의 진정한 오의를 깨친 이 늙은 영혼에게, 수천억의 돈다발 따위는 길가의 마른 낙엽보다 덧없는 환영에 불과했다.

"돈을 모으는 자는 숫자의 노예가 되고, 흐름을 아는 자는 시간의 주인이 된다."

철수는 어깨끈이 터진 낡은 서류가방을 가볍게 고쳐 멨다. 20년 뒤의 퇴직을 걱정하며 지하철 기둥 뒤에서 바들바들 떨던 애송이 검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좁고 삭막한 지하철 역사 한가운데, 백사십 년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통달한 자본주의 무림의 절대초월자가 헐렁한 기성복 양복을 입은 채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전 8시 40분, 세종로의 중견 무역회사 사무실.

"김 대리! 자네 지금 제정신이야?! 이 바이오 원자재 수입 품의서 결재 라인을 왜 이따위로 올려놨어!"

사무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천장을 찢을 듯한 벼락 고함이 쏟아졌다. 영업2팀의 마두이자, 저승사자와도 같았던 박 부장이었다. 벌겋게 피가 오른 얼굴로 두툼한 결재 서류 뭉치를 책상에 쾅 내리치는 모습은 과거의 철수에게 심장마비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굳었다. 동기들은 숨을 죽인 채 모니터 뒤로 고개를 처박았고, 여직원은 타자 소리마저 멈춘 채 눈치를 살폈다. 평소의 김철수 대리였다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허리를 90도로 꺾고 죄송하다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터였다.

그러나 철수는 가만히 박 부장의 상기된 두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비굴함도, 억울한 분노조차 없었다. 마치 동네 골목길 모퉁이에서 도토리를 빼앗길까 봐 온몸의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쉭쉭거리는 가엾은 다람쥐를 내려다보는 천년 고승의 자애롭고 고요한 안광이었다.

'박 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

철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서슬 퍼런 사내는 3년 뒤 귀가 얇아져 바이오 테마주에 퇴직금을 몰빵했다가 깡통을 차고, 쉰둘의 나이에 권고사직을 당해 통닭집을 차렸다가 2년 만에 보증금을 다 날릴 비극의 운명이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공포,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른다는 자본 무림의 서슬 퍼런 칼날에 짓눌려 만만한 부하 직원들에게 화기공을 뿜어대며 제 나약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부장님."

철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사무실의 미세한 기계 소음을 뚫고 맑은 종소리처럼 울리는 기묘한 공명이 실려 있었다.

"품의서 3페이지의 수입 단가 산정식에 환율 변동 완충 마진 4%를 미리 산입해 두었습니다. 다음 주 미국 연준의 금리 발언이 나오면 달러-원 환율이 단숨에 50원 이상 요동칠 텐데, 이 쿠션을 넣어두지 않으면 부장님께서 다음 달 임원 주간 회의에서 마진 훼손 건으로 크게 낭패를 보십니다."

"……뭐? 미, 미국 연준?"

박 부장이 씩씩거리며 서류를 거칠게 넘겼다. 완벽했다. 일개 4년 차 대리가 짤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시경제의 거대한 지형도와 환위험 헤지, 그리고 통화 스왑의 숨은 위험까지 한 치의 빈틈없이 방어해 둔 신급의 장부 구조였다.

"그, 그래도 결재 라인은 규정대로……."

"부장님의 결재 도장이 임원실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날 수 있도록 밑자리를 단단히 다져두었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검토해 주십시오. 속 쓰리실 텐데 믹스커피 한잔 타 드릴까요?"

철수가 사람 좋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의 보온병을 집어 들었다. 박 부장은 귀신이라도 본 듯 입을 뻐끔거리다 헛기침을 큼큼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흠, 흠! 자, 자네가 웬일로 거시적인 맥락까지 신경을 썼군. 책상 위에 두고 가."

철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사무실의 탁한 형광등 불빛마저 깊은 산골의 신선한 아침 안개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목숨을 걸고 승진과 성과급이라는 외나무다리에서 서로를 밀어 떨어뜨리며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이미 은퇴의 정점을 찍고 영겁의 순환을 돌아온 철수에게 이곳은 그저 매달 은전 250만 냥을 꼬박꼬박 내어주는 평화롭고 한적한 유람지에 불과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흘려보내면 그만인 것을.'

철수는 모니터 한구석에 엑셀 창을 조용히 띄웠다. 복잡한 단타 차트나 핏빛 레버리지의 계산식 대신, 작은 텃밭에 물을 주듯 온화하고 단단한 장기 배당 파이프라인의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 정각.

찰칵.

철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컴퓨터 전원을 끄고 서류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김 대리, 벌써 가나? 오늘 부서 삼겹살 회식……."

"아내와의 선약이 있어 먼저 일어납니다. 다들 고생하십시오."

뒤에서 선배들이 눈치를 주든 말든, 철수는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 유유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회사의 눈치라는 사슬은 스스로 마음에 얽매이지 않는 자에게는 거미줄보다 가벼운 법이었다. 퇴근길 종로의 낡은 시장 골목에 들렀다. 단단한 찌개용 두부 한 모, 살이 연한 애호박 한 개, 그리고 맑은 물에 해감된 바지락 한 봉지를 사 들고 낡은 복도식 아파트의 계단을 올랐다.

도어록의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 안 가득 은은하고 포근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여보, 왔어요? 웬일로 이렇게 일찍……."

주방에서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젖은 손을 닦으며 돌아보았다. 스물여덟의 정순이었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뺨, 총기 넘치는 맑고 깊은 눈망울,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아내. 80대의 요양병원 침대에서 온몸이 마비된 채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그 가련했던 아내가, 거짓말처럼 건강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제 눈앞에 서 있었다.

철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를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아내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 여보? 왜 그래요?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정순이 놀라 토끼 눈을 뜨며 철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철수는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샴푸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살아있었다. 아프지 않았다. 수억의 병원비 계산서도, 성인용 기저귀도, 숨 막히는 소독약 냄새도 없는 완벽하고 건강한 봄날이 그의 품 안에 오롯이 안겨 있었다.

"아니다…… 아무 일도 없다."

철수가 슬그머니 눈가를 훔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예뻐서."

"어머, 징그럽게 왜 이래! 오늘 진짜 이상하네. 얼른 손 씻고 와요. 찌개 끓일 테니까."

"내가 끓여주마. 바지락 사 왔다."

철수는 양복 소매를 걷어붙였다. 140년의 은퇴 무림을 지배했던 절대고수가 부엌칼을 쥐었다. 달궈진 뚝배기에 멸치와 다시마 육수를 은근하게 우려내고, 시골 외할머니가 담가준 구수한 집된장을 체에 걸러 풀었다. 애호박을 정갈한 반달 모양으로 썰어 넣고, 두부를 깍둑썰기해 얹은 뒤, 해감된 바지락을 듬뿍 털어 넣었다.

보글보글- 바글바글-

맑고 칼칼한 김을 뿜으며 끓어오르는 찌개 소리가 그 어떤 천하의 교향곡보다 평화롭게 온 집안을 채웠다. 식탁에 마주 앉아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뜨끈한 된장찌개를 듬뿍 떠먹는 순간, 철수는 온몸의 세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궁극의 지복을 느꼈다. 진정한 무공의 끝은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가 새지 않는 지붕 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이 소박한 여유. 그것이야말로 백 년 전에도, 백 년 뒤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지고한 영지였다.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 철수는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늦가을 밤바람이 밀려들어와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스쳤다. 베란다 바닥에는 스티로폼 상자로 만든 작은 화분 서너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철수는 낡은 분무기를 들고 초록빛 상추와 방울토마토 잎사귀에 안개 같은 물방울을 부드럽게 뿜어주었다. 잎사귀 위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 위로 서울 도심의 네온사인 불빛이 영롱한 보석처럼 반사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2011년의 증권 계좌. 화면 한가운데에는 3,500만 원이라는 소박하고 작은 종잣돈이 찍혀 있었다.

"욕심낼 것 없지."

철수는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무리하게 빚을 내어 레버리지의 마검을 휘두르거나, 역사의 흐름을 억지로 비틀며 시장을 교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물이 흐르듯, 계절이 바뀌듯 우직하게. 매달 아끼고 절약한 은전으로 가장 단단한 글로벌 배당 인프라의 씨앗을 하나씩 사 모으고, 훗날 태어날 아들 영호에게 빚이 아닌 자립의 지혜를 물려줄 단단한 토양을 다져가면 그뿐이었다.

'바람이 참 좋구나.'

어둠이 내린 베란다 한구석에서 문득 달콤하고 쌉싸름한 노란 믹스커피 향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허공을 올려다보자, 찌그러진 보온병 뚜껑을 든 백발의 연금진인이 푸른 달빛 속에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철수야, 이제야 네가 진짜 신선의 걸음을 걷는구나.'

철수 역시 허공을 향해 소리 없이 투명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강호는 내일도 여전히 시끄러울 것이다. 누군가는 내일의 주가 등락에 피눈물을 흘릴 것이고, 누군가는 승진의 칼바람에 쫓겨 잠을 설칠 것이며, 세상은 또다시 수많은 위기와 공포의 파도를 밀어 올릴 것이다.

그러나 철수의 마당만큼은 그 어떤 세상의 풍파도 침범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소박한 일상을 지극히 사랑하며, 시간의 흐름 자체를 아군으로 삼은 절대고수의 삶.

"여보, 커피 한잔할래요?"

거실에서 정순이 다정하고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지. 설탕 조금만 넣어서 따뜻하게 타 주구려."

철수는 분무기를 내려놓고 거실의 따스한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푸른 달빛이 평화롭게 드리워졌다. 조급함도, 두려움도 없는 한 사내의 유유자적한 은퇴 무림이, 마침내 가장 완벽하고 따스한 일상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22화 「마두를 가엾게 여기는 법과 평화로운 유람지」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21화

다음 회차 예고: 제22화 마두를 가엾게 여기는 법과 평화로운 유람지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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