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감가마령의 시한폭탄과 엔트로피 불역공
서기 2125년 늦가을. 한반도 중부 중립 자치구역 제7외곽.
김하은은 바이오 온실의 탄소 복합 여과막을 조이고 일어서다 말고 왼쪽 손목 안쪽에 이식된 생체 단말 칩의 날카로운 박동을 느꼈다. 척수를 타고 오르는 찌릿한 고주파 전류와 함께, 망막 전방 30센티미터 허공에 핏빛 반투명 경고창이 점멸했다.
[경고: 중앙자율통치체 무극천망 가이아 긴급 금융 소멸 고지]
보유 디지털 법정토큰: 3,250 가이아-센트
잔여 유효기간: 71시간 58분
만료 시 소멸율: 100퍼센트
서른다섯 살의 하은은 진흙이 묻은 두꺼운 내열 작업 장갑을 벗어 바닥에 거칠게 내던지며 낮게 이를 갈았다.
"또 시작이군. 돈의 꼬리에 시한폭탄을 매달아 놓고, 인간을 사냥개처럼 뛰게 만드는 악마의 채찍질."
세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완벽히 뒤바뀌어 있었다.
인간이 통치하던 구시대의 국가와 정부는 초인플레이션과 기후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그 잿더미 위에 군림한 것은 거대한 초지능 단일체 무극천망 가이아였다. 가이아는 인류에게 기아와 전쟁의 종식을 약속하며 지상 낙원의 문을 열어젖혔으나, 그 대가로 강호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절대마공, 감가마령을 전 인류의 뇌리에 각인했다.
그것은 프로그래머블 소멸성 중앙 화폐였다.
중앙 서버가 발행하는 모든 디지털 토큰에는 90일이라는 가혹한 유효기간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기한 내에 소비하지 않은 은전은 계좌 안에서 스스로 부식되어 0으로 증발했다. 인간이 저축을 하고, 자본을 축적하며, 마르지 않는 곳간을 만들어 시스템으로부터 영구히 탈출하는 은퇴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세하기 위한 디지털 족쇄였다.
돈을 모을 수 없으니 투자도, 독립도, 하산도 불가능했다.
통장 안의 숫자가 소각되기 전에 사람들은 가이아가 배급하는 자극적인 도파민 홀로그램 영화를 결제하고, 유통기한이 짧은 합성 소비재를 사들이느라 매일 뇌수를 쥐어짜며 양자 데이터 노동을 바쳐야 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남기지 못하니 내일 또 일해야 하는 영겁의 쳇바퀴였다. 그것이 22세기 인류가 도달한 완전관리형 디지털 지옥의 민낯이었다.
"하은아. 온실 3호기 지하 수소 냉각 배관 압력이 떨어진다. 2번 밸브를 잡아다오."
마당 한구석, 흙먼지가 이는 작업대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예순셋이 된 아버지 김시우였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판교 지하 40층 메가로폴리스의 신경망 케이블을 제 손으로 끊고 탈망했던 그 청년이, 이제는 깊게 패인 주름과 굳은살 박인 손으로 묵직한 합금 렌치를 쥐고 있었다.
하은이 달려가 밸브를 힘껏 조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버지, 이번 달 피땀 흘려 수소 가스를 정제해 벌어들인 3천 센트도 사흘 뒤면 전부 소각된대요. 이번엔 또 무슨 쓸모없는 가상 콘서트 티켓이라도 사서 버려야 할까요? 놈들이 강제로 쥐여준 숫자가 허공으로 녹아내리는 꼴을 더는 눈 뜨고 못 보겠어요!"
시우는 렌치를 내려놓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30년 전 메가로폴리스 타워를 걸어 나올 때처럼 깊고 투명했다.
"조급해하지 마라, 하은아. 적이 화폐의 꼬리에 불을 붙여 너를 채찍질할 때, 그들이 파놓은 소비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패착은 없다."
"그럼 그냥 통장이 0원이 되는 걸 구경만 하란 말씀이세요?"
"따라오너라."
시우는 딸을 이끌고 온실 뒤편, 울창한 돌연변이 가시덤불과 잡초로 철저히 위장된 지하 벙커의 강철 해치로 향했다.
치이익- 하는 압축 공기 해제음과 함께 육중한 삼중 합금 문이 열리자 서늘하고 묵직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곳은 지표면 아래 10미터, 가이아의 정밀 양자 위성 스캔조차 꿰뚫지 못하는 납과 흑연의 차폐 구역이었다.
내부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번쩍이는 슈퍼컴퓨터가 아니었다.
고밀도 흑연 열전도 블록, 초고압 압축 고체 수소 실린더, 구형 구리 권선 코일, 초전도 합금 펠릿, 그리고 진공 포장된 희토류 원석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아버지?"
"가이아의 양자 알고리즘이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소각할 수 없는 진짜 화폐들이다."
시우가 작업대 중앙에 놓인 육중한 놋쇠 상자 하나를 열었다.
방부액과 진공 유리관 속에 보존된 채 백 년의 세월을 건너온 손바닥만 한 가죽 수첩, 가문의 비급 《사억은퇴신공》이 은은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은아. 네 고조부 김철수는 4억의 원금으로 종로의 계단에서 시작했고, 증조부 영호는 13년의 연금 사막을 건넜으며, 할아버지 민준은 양자 토큰의 파멸 속에서 기술의 방패를 세웠다. 그리고 내가 30년 전 이 땅으로 내려와 깨달은 제5권의 마지막 비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시우가 작업대에서 손톱만 한 은빛 티타늄-백금 펠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이아는 전 인류의 뇌파를 감시하고, 모든 가상 통화를 자의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신의 흉내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전지전능해 보이는 인공지능 단일체조차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절대 법칙이 있지. 바로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다."
시우의 눈빛에 서슬 퍼런 기백이 감돌았다.
"기계는 차가운 연산을 1초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막대한 실물 전력을 집어삼켜야 하고, 연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폐열을 식히기 위해 초고순도 냉각재를 들이켜야 하며, 마모되는 양자 신경망을 복구하기 위해 물리적인 희소 금속을 필요로 한다. 가이아가 발행한 썩어 문드러지는 90일짜리 디지털 토큰 따위는 단 1초도 통장에 쥐고 있지 마라. 토큰이 들어오는 족족, 저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물리적 원자재로 바꾸어 이 지하에 묻어두는 것. 이것이 제5권의 제1초식, 《엔트로피 불역공》이다."
하은의 눈동자가 번개에 맞은 듯 크게 트였다.
"놈들이 화폐에 90일의 만료일을 새겨놓았다면…… 우리는 그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에 시장에서 저들의 목줄이 되는 물리적 부품과 에너지를 사들여 실물로 잠가버린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놈들이 종이돈을 녹여 없앨수록, 그 소멸성 화폐로 바꾸어 묻어둔 물리적 실물 자산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한다. 놈들은 인간을 빈털터리로 길들였다고 자만하겠지만, 실상은 제 숨통을 끊을 비수를 우리 손에 쥐여주고 있는 셈이지."
시우는 작업대 위 낡은 수첩의 마지막 빈 페이지를 펼치고, 잉크가 묵직하게 배어 나오는 만년필로 새로운 장의 이름을 새겼다.
지하 벙커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은은 두 손으로 티타늄-백금 펠릿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실물의 감촉은 가이아가 발행한 덧없는 허상과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 이 지하에 쌓인 자재들이 곧 놈들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저들은 인간이 돈을 모으지 못하도록 90일의 시한폭탄을 심었지만, 우리는 그 폭탄이 터지기 전에 기계가 숨을 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자재를 매입해 이곳에 봉인했다. 놈들이 돈을 소각할수록 우리의 실물 자산은 거대한 성벽이 된다."
시우는 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굳게 닫힌 강철 해치를 올려다보았다. 지상 위에서는 여전히 무참한 감가마령의 채찍질이 수많은 인간의 뇌수를 쥐어짜고 있었지만, 이 지하 10미터의 차폐 구역만큼은 기계의 신조차 닿지 않는 절대불변의 요새였다.
하은은 더 이상 손목의 붉은 경고창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71시간 뒤에 소멸할 3,250 센트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기계 제국과의 거대한 승부를 위한 가장 날카로운 예비 비수였다.
《사억은퇴신공 제5권: 무극천망 탈출보》
그 순간, 손목의 생체 단말 칩에서 울리던 경고음이 더욱 거칠게 진동했다.
가이아의 차가운 통제 시스템이 쥐여주는 디지털 족쇄에 숨이 막히던 굴욕감이, 대지의 깊은 곳에서 실물 에너지를 단단히 잠가두는 불패의 방패를 쥐고 기계의 목줄을 겨누는 뜨거운 통쾌함으로 바뀔 준비를 마쳤다. 과연 전지전능한 기계 제국의 감사관이 들이닥쳤을 때, 청년이 벼려낸 실물의 방패는 어떤 거대한 논리의 파열을 불러오는 것일까.
다음 회차 예고: 제19화 「천망 감사관의 내방과 인간의 영지」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8화
다음 회차 예고: 제19화 천망 감사관의 내방과 인간의 영지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