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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17화목차

제17화 백 년을 이어온 모닥불의 밤

탁!

시우는 손에 쥐고 있던 낡은 만년필을 수첩 위에 내려놓았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호호 불어 넘긴 뒤, 가죽 밴드를 팽팽하게 당겨 묶었다. 백 년 전 증조부 김철수가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허름한 수첩에 첫 글을 적어 내려간 이후, 할아버지 영호와 아버지 민준의 거친 땀방울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손에서 완성된 《사억은퇴신공(四億隱退神功)》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시우야, 슬슬 저녁상 차릴 테니 장작불이나 좀 더 다져라."

마루 끝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던 아버지 민준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불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시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거대 메가로폴리스의 삭풍이 인공 돔의 균열 틈새를 타고 외곽 자치구까지 스며들고 있었지만, 이 작은 흙마당만큼은 오직 두 부자의 손으로 일구어낸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마당 한구석에는 오늘 아침 싱싱하게 수확해 둔 배추와 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옴니코퍼레이션의 중앙 메인프레임이 쏘아 올리는 데이터 가속제나 합성 단백질 젤리가 아니었다. 대지의 기운을 고스란히 품은 흙과 땀방울이 만들어낸 진짜 생명의 실물들이었다.

타닥, 타다닥-

시우가 집게로 마른 장작개비를 밀어 넣자, 붉은 불꽃이 튀어 오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불티가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을 향해 춤을 추듯 솟아올랐다. 머리 위 거대한 철제 반투명 돔 너머로 메가로폴리스의 차갑고 기괴한 푸른색 네온 타워들이 번뜩였다. 수천만 명의 전뇌 노동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신경망 잭에 목을 매단 채,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독료의 늪에서 핏발 선 눈으로 야근을 거듭하고 있을 터였다.

잠시 후, 부엌문이 스르륵 열리며 아내 수진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를 안고 걸어 나왔다. 구수한 집된장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보, 찌개 다 됐어요. 어서 손 씻고 와요."

"아빠! 이것 봐요! 오늘 온실에서 내가 제일 큰 딸기 따왔어!"

다섯 살배기 딸아이가 마당을 아종아종 가로질러 달려오며 빨갛게 익은 딸기를 시우의 코앞에 내밀었다. 시우는 거친 흙 묻은 손을 툭툭 털어내고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삭살스러운 바람을 타고 뜰 가득 메아리쳤다.

"우리 딸이 직접 딴 거야? 어구, 기특하기도 하지."

시우가 아이의 통통한 볼을 간지럽히자 아이가 까르르 넘어갔다. 평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얼굴 위로 모닥불의 붉은 빛이 아늑하게 내려앉았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마당 가득 번지는 밥 냄새는 세상의 어떤 진수성찬보다 풍요롭고 포근했다.

민준이 숟가락을 들며 툭 내뱉듯 말했다.

"참 평화롭구나. 옛날에 내 아비가 네 나이 때 나를 붙잡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강호는 늘 시끄럽고, 세상은 언제나 우리보고 빚을 지라며 칼을 겨누지만…… 막상 내 발로 딛고 선 이 땅과 내 손으로 쥔 그릇 하나만 지켜내면, 그 어떤 마교의 지배자도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고 말이다."

시우는 품속에 단단히 갈무리된 가죽 수첩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꼈다.

증조부 철수가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검은 잉크로 꾹꾹 눌러 담았던 생존의 맥박이, 할아버지 영호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가슴속에 뜨겁게 안착해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전뇌의 신경망을 통해 인류의 도파민을 착취하고, 구독이라는 이름의 악랄한 흡원천공(吸元天功)으로 사람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기계 제국의 아가리 속에서, 시우와 그의 가족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라타 있었다.

남의 자비와 빚에 목숨을 저당 잡힌 채 매일 아침 양자 감시망의 경고를 두려워하던 날들은 이미 영원히 지나갔다. 지금 그에게는 스스로 일구어낸 흙과 태양, 그리고 3대에 걸쳐 벼려낸 불멸의 진형이 있었다.

"여보, 이거 한 번 맛봐요. 이번에 온실에서 거둔 상추가 아주 달게 잘 자랐어."

수진이 싱싱하게 씻어낸 채소를 시우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시우는 쌈 채소 위에 갓 지은 밥과 된장찌개 건더기를 듬뿍 올려 한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구수한 된장의 풍미와 신선한 흙의 향기는 옴니코퍼레이션의 구내식당에서 강제로 주입하던 합성 단백질 젤리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맛이었다.

인공지능 중앙 감시 총관이 아무리 초당 수억 번의 트랜잭션을 처리하며 전 인류의 뇌파를 쥐락펴락해도, 이 소박하고 따스한 저녁상 앞에 앉은 인간의 존엄을 강탈해 갈 수는 없었다.

"아빠, 내일도 저랑 같이 밭에서 딸기 따실 거죠?"

품에 안긴 딸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요. 우리 공주님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같이 나와서 밭을 일구지요. 내일은 아빠랑 같이 고구마 심는 법을 배워볼까?"

"와! 고구마요? 엄청 커다랗게 자라나요?"

"그럼요. 우리가 땀 흘려 가꾼 만큼, 대지는 언제나 정직하게 보답해 준단다."

민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백 년 전, 자신 역시 젊은 날의 무모한 마진콜과 자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문을 풍비박산낼 뻔했던 아픈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때 아버지 영호가 서릿발 같은 채찍으로 자신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지금쯤 판교 지하 40층의 캡슐 구역에서 뇌수가 닳아 없어지도록 신경망에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했고, 그들은 13년의 암흑혈을 견뎌내며 마침내 이 단단한 방패를 완성해냈다.

그리고 그 방패는 이제 아들 시우의 손에서 더욱 굳건하게 진화하여, 세상의 어떤 세력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요새가 되었다.

타닥, 타다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웠다.

마당 한가운데 피어오른 모닥불의 붉은 불빛은 메가로폴리스의 차갑고 음산한 푸른빛을 온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수천만 명의 전뇌 노동자들이 시냅스를 태우며 뿜어내는 가상의 불빛보다, 이 소박한 외곽 흙마당의 모닥불이 훨씬 더 뜨겁고 영원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 돔의 균열 틈새로 반짝이는 저 별빛은 기계가 조작할 수 없는 진짜 하늘의 빛이었다.

돈이란 통장에 찍힌 숫자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당한 명령에 기꺼이 칼을 뽑아 들 수 있는 권리이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온전한 숨을 쉴 수 있는 자유의 크기였다.

백 년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몰아쳤던 자본주의 무림의 풍파 속에서, 시우의 가문은 마침내 그 진정한 해답을 찾아내었다.

"시우야, 불이 조금 약해진 것 같다. 장작을 더 넣으마."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지."

시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굵직한 장작개비 몇 개를 집어 불길 위로 던져 넣었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불꽃이 다시 거세게 타올라 마당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 빛은 어둠이 깊어갈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세상의 모든 공포와 탐욕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은퇴 무림의 성벽을 단단하게 구축해 주었다.

마르지 않는 물줄기는 오늘도 도도히 흘러, 과연 새로운 백 년의 강호 속으로 어떤 영원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가?

답은 이미 그들의 굳은살 박인 두 손과 따스하게 피어오르는 모닥불 속에 온전히 담겨 있었다.

시우는 국물을 한 술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달 통장에 정확히 꽂히는 400 크레딧의 배당과 연금, 그리고 옴니코퍼레이션의 숨통을 벗어나 스스로 일구어낸 150 크레딧의 흑자 방패. 그것은 숫자에 불과한 가상 화폐가 아니었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가족의 하루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절대의 권력이었다.

저 멀리 도시의 네온 불빛이 웅장한 기계를 돌리며 굉음을 낼 때, 이 조용한 외곽의 마당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와 가족의 웃음소리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물줄기는 세대를 이어 흘러, 강호의 새로운 역사 속으로 가장 완벽한 영원의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8화 「감가마령의 시한폭탄과 엔트로피 불역공」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7화

다음 회차 예고: 제18화 감가마령의 시한폭탄과 엔트로피 불역공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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