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흙을 딛고 선 인간의 성벽
치익, 칙-
낡은 비닐 온실의 스프링클러가 부드러운 물줄기를 뿜어내며 늦가을의 건조한 공기를 적셨다.
김시우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거친 흙더미를 헤치며 둥글고 단단하게 여문 알타리무의 잎사귀를 잡았다.
주변을 뒤덮은 메가로폴리스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인공 구름막 대신, 그의 머리 위로는 진짜 늦가을의 차갑고 투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시우야, 그쪽이랑 이쪽이랑 고랑에 퇴비 좀 더 얹어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다가온 아버지 김민준이 허리를 두드리며 밭둑에 섰다.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성성해졌지만, 목소리에는 젊은 날 옴니코퍼레이션의 양자 알고리즘에 영혼을 저당 잡혔을 때의 쉰내 나던 피로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올해는 태양광 발전 조합 배당도 쏠쏠하고 지하수 모터도 안정적이라 채소들이 아주 실하게 자랐네요."
시우가 흙이 묻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씩 웃었다.
목덜미 뒤편의 제4경추 신경 접속 포트는 완전히 아물어 희미한 십자 모양의 흉터만 남았다.
초고속 양자 링크가 뇌간을 찌르며 초당 수억 번씩 주가 차트와 감정 지수를 난도질하던 지옥 같은 데이터 큐브 구역의 삶은 이제 전생의 일처럼 아득했다.
그들이 누리는 평온은 우연이나 자선이 아니었다.
매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입금되는 400 크레딧의 고정 연금과 배당, 그리고 흙을 딛고 선 실물 자산이 만들어낸 단단한 철포삼이었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도파민을 갈아 넣지 않아도, 최소한의 식량과 에너지를 제 손으로 쥐고 있는 자는 그 어떤 거대 기업과 인공지능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자, 이 배추 좀 받아라. 오늘 시장 거래소에 내다 팔고 오는 길에 보리쌀 좀 더 사 오마."
민준이 리어카에 수확한 배추를 차곡차곡 실으며 아들을 돌아보았다.
시우는 마루 끝에 앉아 낡고 닳은 가죽 수첩을 펼쳤다.
백 년 전 증조부 김철수가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만년필로 첫 페이지를 적어 내려갔고, 할아버지 영호의 굵은 볼펜 자국을 거쳐 자신에게 도달한 《사억은퇴신공(四億隱退神功)》의 마지막 장이었다.
수첩의 누런 종이장 사이로 잉크 냄새 대신 은은한 풀내음과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시우는 만년필을 꾹 눌러 쥐고 새로운 불멸의 지혜를 한 자 한 자 새겨 넣기 시작했다.
자산의 덩어리를 탐하지 말고 마르지 않는 현금흐름의 물길을 파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은, 2095년의 황량한 외곽 자치구에서 비로소 완벽한 실체로 꽃을 피웠다.
"돈이란 통장에 찍히는 허황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자의 부당한 명령을 단칼에 거부할 수 있는 권력이며, 내 하루 24시간을 내 의지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시우는 펜끝을 잠시 멈추고 종이 위로 떨어지는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손바닥만 한 수첩의 페이지마다 세대를 이어 전해진 묵직한 숨결이 묻어났다. 증조부 김철수가 거친 넥타이를 매고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던 종로의 비상계단도, 할아버지 영호가 절연 장갑을 끼고 흙먼지를 마시며 버텨낸 현장도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초석이었다. 옴니코퍼레이션의 중앙 메인프레임이 아무리 실시간으로 수십억 인류의 뇌파를 스캔하고 도파민을 쥐어짜도, 흙을 딛고 선 인간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시우야, 저녁때가 다 되어 간다. 장작불 좀 더 넣거라."
마루 끝에 앉아 곰팡이 슨 목장갑을 툭툭 털어내던 민준이 아들을 향해 너털웃음을 지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당 한구석에 쌓아둔 참나무 장작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장작더미 속으로 손을 넣자, 바짝 마른 나무 껍질 사이로 깊은 숲의 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판과 인공 합성 단백질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메가로폴리스의 지하 40층 캡슐과는 완전히 다른,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시우는 부싯돌을 툭툭 쳐서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타닥, 타다다닥-
어스름한 저녁 어둠 속에서 마침내 붉은 모닥불의 화마가 거칠게 피어올랐다.
불꽃은 매서운 가을바람을 타고 위로 솟구치며 흙마당의 그림자들을 길게 늘어뜨렸다.
불빛이 시우의 얼굴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기계의 명령을 기다리는 멍한 핏발이나 빚더미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
오직 자신이 직접 일군 대지와 마르지 않는 현금흐름의 물줄기가 가져다준 단단한 평정심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빠, 불꽃이 엄청 커요!"
방 안에서 부엌일을 돕던 아내 수진의 품에서 빠져나온 다섯 살 딸아이가 아빠의 다리를 irc 붙잡고 까르르 웃었다.
시우는 허리를 숙여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태웠다.
아이의 작은 손이 시우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헤집었다.
"우리 딸, 오늘 온실에서 배추랑 무 뽑는 거 구경하느라 고생했네. 배고프지?"
"응!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 냄새가 여기까지 나요!"
아이의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가 흙마당 위로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수진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투박한 토기 뚝배기를 들고 마루로 걸어 나왔다.
구수한 된장 냄새와 직접 키운 알타리무로 담근 김치의 풋풋한 향기가 모닥불의 매캐한 연기 냄새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두 부자와 아내, 그리고 아이까지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화려한 레스토랑의 인공 배양육 스테이크도, 가상 현실 아바타가 유영하는 황제들의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은 저녁 식사였다.
숟가락을 들기 전, 민준이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시우야."
"네, 아버지."
"우리가 이 흙바닥에 뿌리를 내린 지 몇 년 안 되었지만, 저 도시의 녀석들은 평생 모를 거다. 돈이라는 게 통장에 찍힌 숫자가 아니라 내 호흡을 지켜주는 방패라는 걸 말이다."
민준의 눈빛이 등불처럼 빛났다.
시우는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밥그릇을 들어 올렸다.
숟가락을 떠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구수한 쌀밥의 단맛과 직접 일군 밭에서 거둔 채소의 싱그러움은, 옴니코퍼레이션의 데이터 큐브 구역에서 마시던 화학 영양제의 씁쓸함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밤하늘에는 어느새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메가로폴리스의 인공 돔이 뿜어내는 가짜 푸른빛 너머로, 우주의 진짜 밤하늘이 고요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우는 마루에 가만히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거대 기업의 타워들은 밤새도록 멈추지 않고 전력을 소모하며 차가운 연산의 톱니바퀴를 돌려댈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거대한 성벽은 오직 자본과 도파민의 노예들 위에서만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 흙을 딛고 선 인간의 마당 위에는 그 어떤 자본주의의 폭풍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튼고한 방패가 가로놓여 있었다.
시우는 품속에서 손때 묻은 가죽 수첩을 꺼내어 마지막으로 단단하게 여민 뒤 가죽 끈을 묶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꺾이지 않고 이어져 온 그 불멸의 기록은 이제 그의 손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바람이 불어와 모닥불의 작은 불티 하나를 밤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그 불티는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아득하게 멀어지며,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멸의 별처럼 은은한 흔적을 남겼다.
인간의 존엄은 지켜졌고, 멈추지 않는 물줄기는 오늘도 묵묵히 대지 속에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7화 「백 년을 이어온 모닥불의 밤」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6화
다음 회차 예고: 제17화 백 년을 이어온 모닥불의 밤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