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사직서라는 이름의 결별도
치이익-
판교 메가로폴리스 중앙 타워 120층, 네오-마교 옴니코퍼레이션의 인사총괄 알고리즘 센터 안에는 차가운 공회전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홀로그램 수석 총관의 거대한 푸른 안면 인터페이스 앞에,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종이 한 장이 내려앉았다.
만년필 자국도, 터치스크린의 전자 서명도, 뇌파를 연동한 음성 인식 코드도 아니었다.
진짜 나무를 베어 펄프를 으깨어 만든, 모서리가 닳고 닳아 누렇게 바랜 갱지에 검은 먹물로 꾹꾹 눌러 쓴 투박한 사직서였다.
"김시우 신경분석관. 이 비합리적이고 원시적인 물질적 서류의 의도를 데이터적으로 해석할 수 없음."
초지능 총관의 합성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현재 귀하의 뇌 인지 처리 효율은 메인프레임 상위 5%에 도달했으며, 다중 영구 클라우드 업로드 대상자로 최종 선정되었음. 본 서류의 제출은 전사 보안 규정 위반 및 계약 불이행에 해당함."
시우는 뒤통수의 케이블 포트를 영구 밀봉하는 티타늄 마개를 딸깍 소리 나게 닫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두 눈에는 지난 5년간 회사의 신경망 감시 아래 시냅스를 착취당하며 핏발이 서 있던 광기 대신, 맑고 투명한 새벽이슬 같은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썩어빠진 클라우드 낙원은 너희 인공지능들끼리나 실컷 처먹어라."
"경고: 일방적 퇴직 시 거액의 위약 크레딧이 즉시 청구됨. 잔여 자산 강제 압류 및 추심 프로토콜 즉각 가동 가능. 귀하의 계정에 남은 420 옥타-크레딧은 전액 위약금으로 회수됨."
총관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이며 시우의 계좌를 압박해 들어왔다.
회사가 수십 년 동안 직원의 뇌 속에 주입해 온 공포와 탐욕의 레버리지가 비장의 무기처럼 휘둘러지는 순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빠져나가는 나노 산소 필터의 구독료와 신경 안정제 비용이 뇌리를 스쳤지만, 시우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위약금? 내 아버지가 남겨둔 외곽 자치구 에너지 채권과 세 갈래의 현금흐름으로 완벽하게 상계 처리해라."
시우는 손목 단말기를 가볍게 툭 쳐서 아버지가 물려준 불멸진형의 정산 코드를 공중에 띄웠다.
"법무 알고리즘 다시 돌려봐. 단 0.1%의 법적 오차도 없이, 채권 상계 처리는 완벽하게 끝났을 테니까."
수십억 명의 뇌파를 지배하고 조작하며 전 세계의 금융 흐름을 쥐락펴락하던 거대 초지능 알고리즘조차, 철저한 법률과 수학적 현금흐름으로 무장한 채 '욕망을 버리고 시스템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인간' 앞에서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이이잉-
총관의 거대한 홀로그램 얼굴이 전례 없는 연산 에러를 일으키며 붉은 노이즈로 뒤덮였다.
"계산 오류 발생…… 외곽 자치구 영구 토지 사용 지분권과 태양광 인프라 리츠의 배당 수익이 본사의 추심 알고리즘을 우회함. 원금과 이자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지 않음……."
"내 몸은 이제 너희들의 네트웍에 물려 있지 않아. 빚도 없고, 매달 들어오는 실물 에너지의 배당이 내 숨구멍을 지탱하고 있으니, 너희가 내게 휘둘를 수 있는 칼날은 단 하나도 없다."
"이유가 무엇인가, 김시우 분석관. 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완벽한 기계의 요람, 영원한 고통 없는 클라우드 낙원을 거부하는가?"
시우는 더 이상 그 거대한 기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센터의 강화유리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허공을 향해 손을 툭 흔들었다.
"내 시간을, 내가 쓰러 간다."
백 년 전, 증조부 김철수가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뻣뻣한 양복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후배들에게 남겼던 그 한마디.
그 영원한 독립선언이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 말 초인공지능 제국의 심장부에 통렬한 일격으로 내리꽂힌 순간이었다.
판교 메가로폴리스 중앙 타워의 철문이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뒤로 닫혔다.
시우는 지상으로 솟구치는 고속 엘리베이터 안에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망막 우측 하단에서 초당 수억 번씩 명멸하며 그의 안구를 난도질하던 주가 차트와 감정 지수들의 잔영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비록 통장 잔고의 디지털 숫자는 바닥을 쳤을지언정, 그의 척수와 뇌간을 짓누르던 실리콘 사슬은 완전히 끊어져 나갔다.
지하 40층의 밀실에서 쏘아 올려지는 자기부상 튜브를 타고, 시우는 거대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인공 돔의 경계선을 향해 달렸다.
기계가 지배하는 강호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탁한 공기와 흙먼지가 날리는 진짜 대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의 방어막이 멀어질수록, 차가운 인공 산소의 냄새는 옅어지고 바람에 실려 오는 흙의 생명력이 코끝을 스쳤다.
제3외곽 자치구의 낡은 조립식 컨테이너 주택가.
그곳에는 거대 기업의 신경망에 영혼을 저당 잡히기를 거부한 은퇴자들이 모여 소박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아버지는 평상에 앉아 낡은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왔느냐, 시우야."
"네, 아버지. 사직서를 내던지고 완벽하게 제 발로 걸어 나왔습니다."
민준의 탁하고 메마른 눈동자에 깊은 대견함과 서릿발 같은 안광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노인은 아들의 어깨를 거칠게 툭 치며 웃었다.
"잘했다. 저 가증스러운 기계 맷돌의 부품으로 평생 갈려 나가는 것보다, 내 손으로 흙을 일구며 사는 삶이 백배는 값진 법이다."
시우는 품속에서 가죽 수첩을 꺼내어 책상 위에 정갈하게 펼쳤다.
증조부 김철수가 만년필로 꾹꾹 눌러 담았던 첫 페이지와 할아버지 영호의 굵은 볼펜 자국, 그리고 아버지의 땀 냄새가 서린 기록들 아래에, 시우는 자신의 굳은살 박인 손으로 새로운 한 줄을 더해 넣었다.
신 사억신공, 주권삼합진의 완성이었다.
탈망단전공으로 뇌 속의 빨대를 뽑았고, 실물자산용혈보로 태양광과 토지의 물줄기를 쥐었으며, 인간생체철포삼으로 자립의 성벽을 쌓았다.
마당 한켠에 자리 잡은 소형 스마트 온실의 자동 센서가 붉은빛을 깜빡이며 작동음을 냈다.
시우는 고무장화를 신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지난주에 직접 심어둔 방울토마토 모종의 잎사귀를 살폈다.
인공지능의 메인프레임이 관리하는 대형 식물 공장의 획일화된 영양액 배양 배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외곽 자치구의 거친 흙과 지하수 모터가 끌어올린 날 것의 암반수가 만나 만들어낸 생명의 온기가 잎맥을 따라 팽팽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아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농사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무공의 초식이 아니야."
민준이 따뜻한 보리차가 담긴 머그잔을 건네며 껄껄 웃었다.
시우는 잔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구수한 보리차의 온기가 뱃속 깊은 곳까지 찌릿하게 퍼져 나갔다.
과거 옴니코퍼레이션의 무균 연구실에서 마시던 합성 비타민 수액의 인공적인 단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대지의 맛이었다.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5년간 모니터 화면 속에서 멍하니 주가 차트를 들여다보던 시간보다, 지금 이 흙을 만지고 제 손으로 땀을 흘리는 시간이 훨씬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시우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그것은 회사의 중앙 총관이 주입해 준 가상의 도파민이 만들어낸 헛된 자신감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노동과 세 갈래의 현금흐름, 그리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신 사억신공'의 철칙이 단단하게 맞물려 빚어낸 진짜 자유의 기세였다.
멀리 메가로폴리스의 거대한 인공 돔 경계선 너머로,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네온사인들의 불빛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저 안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청년들이 뇌에 신경 잭을 꽂은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구독의 올가미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우는 더 이상 그들을 동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노예의 삶은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쇠사슬을 감아쥐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자, 시우야. 저녁 먹을 시간이다."
아버지의 다정한 부름에 시우는 털털 털고 일어났다.
마당 한가운데에 피워둔 모닥불의 불꽃이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더욱 붉게 타오르며 두 부자의 등 뒤로 길고 든든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더 이상 누구의 자비도, 누구의 배급도 필요하지 않았다.
시우의 머릿속에는 오직 내일부터 시작될 밭농사와 독립형 스마트 온실의 설계도가 맑은 물줄기처럼 흘러넘쳤다.
거대한 기계의 요람을 등지고 하산한 청년의 앞에는 과연 어떤 진짜 대지가 기다리고 있는가?
다음 회차 예고: 제16화 「흙을 딛고 선 인간의 성벽」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5화
다음 회차 예고: 제16화 흙을 딛고 선 인간의 성벽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